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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지은 집 | [지구촌교회] 주일예배 | (20) 반석 위에 집 짓기 | 이동원 원로목사 | 2021.04.18 108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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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주일예배
누가복음 (20) \”반석 위에 집 짓기\”
누가복음 6:46-49 | 이동원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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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복음 7:21-27) 176호 – 기독타임즈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수가 난다는 말은 홍수가 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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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times.co.kr

Date Published: 11/14/2021

View: 3391

비유. 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마태 7.21-29)

비유. 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마태 7.21-29) 마태복음 7장 21절 29절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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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4/2022

View: 2915

생명의 말씀 – 반석 위에 지은 집(마7:24-25) – 광성교회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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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h.net

Date Published: 2/13/2022

View: 1776

[오늘의 설교] 반석 위에 지은 집 – 국민일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땅을 깊이 파고 견고한 바위에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도 없이 지반이 약한 모래 위에 세운 것입니다. 평소 …

+ 여기에 표시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4/26/2022

View: 8510

반석 위에 집을 세워라 – 당당뉴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날 때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진다. 집은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 *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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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2/4/2022

View: 2831

제 12 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경전 이야기. 마태복음 7장 24~27절과 누가복음 6장 47~49절에 나와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래 대신에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내용을 가르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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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6/17/2021

View: 3281

[스크랩]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 다음블로그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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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1/2022

View: 1724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Bible Study Notes Blog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 주님의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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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Date Published: 1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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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반석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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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교회] 주일예배 | (20) 반석 위에 집 짓기 | 이동원 원로목사 | 2021.04.18
[지구촌교회] 주일예배 | (20) 반석 위에 집 짓기 | 이동원 원로목사 | 2021.04.18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반석 위에 지은 집

  • Author: 지구촌교회
  • Views: 조회수 6,300회
  • Likes: 543501 Like
  • Date Published: 2021. 4.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GUs6_ESi0A

비유. 9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마태 7.21-29) -김성수 목사-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에 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비유를 너무나 쉽게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대조로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라는 거죠

원래는 제가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과 로마서의 행함을 부정하는 듯한 그런 믿음을 예로 들어서 좀 더 깊은 설명을 해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좀 모자랄 거 같아서 그 부분은 제가 다음 시간에 깊이 다뤄 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전후 문맥을 중심으로 해서 이 부분을 좀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의 키는 29절이에요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는데 왜 놀랬냐면 이 이야기가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이야기 율법을 강조하는 서기관들의 이야기와 달랐기 때문에 놀랐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추론하고 있는 내용은 완전히 꽝인 거예요 잘못된 거라는 이야기죠

여러분이 이 비유를 잘 보시면 반석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고요 모래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다라는 것이 이 비유의 대 전제입니다 그죠 모래 위에는 집이 안 지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지어져 있어요

멋지게 지어져 있습니다 집의 외형으로만 본다면 어떤 기초 위에 지어진 집이 훌륭한지 아무도 몰라요 지금 이 비유는 집의 외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초에 관한 이야기인 거예요

쉬운 말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기초 위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말입니다

21절로 올라가 보시면 주님께서 성도의 행함에 관해서 언급을 하시죠

그런데 그 행함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여야 돼요

그렇죠 그리고 이어지는 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 아닌 다른 행함에 관한 경고에요

22절 보시면 주님의 심판에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읍소를 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이거 목사 노릇했다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하고

자신이 행한 일들의 목록을 마일리지로 쌓아서 주님 앞에 제시를 하고 있어요

22절에서의 행하다도 포이에오구요 21절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다에서의 행하다도 포이에오에요

같은 단어에요 그 말은 22절에 악당들이 자신들의 행함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함이라는 확신 속에서 굳게 믿고 행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행했잖아요 포이에오라는 단어를 써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22절의 행함은 주님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기각을 당해요

그들이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게 잘못입니까 아니죠

그 외형으로만 보면 그건 절대 잘못된 거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준 게 잘못된 건가요 아니에요 잘한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해서 기적과 이사를 통해서 연약한 이들을 도와준 게 잘못인가요

자꾸 귀신을 쫓아준다고 그러니까 미친 사람 고쳐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제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귀신 쫓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예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존재가 귀신에게 붙들려 있거든요 그걸 데몬 포제션 귀신들린 자라고 해요.

모든 인간을 다 거기에 복음이 떨어지는 게 귀신 쫓아내주는 거거든요

저는 축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자 이 모든 것이 전부 오늘날 교회가 열심을 부려가면서 추구하고 행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이에요

맞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주님은 그들의 행함을 불법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 걸까요 불법

​그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게 뭔가

요한복음 6장으로 가볼게요

38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뭐예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게 아버지에 뜻이에요

우리들에 행함을 내놓아서 영생으로 가는 길에 들어가 그 영생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게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예수의 행하신 일을 그냥 믿고 영생을 얻는 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조력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든지 우리의 선한 행실로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그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거라는 말이에요

그 말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아버지 앞에 납작 엎드리라는 말씀인 거예요 그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과 피조물의 창조된 목적이 뭐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이사야서 43장 7절 보세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내 영광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거예요 전부 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거죠 그게 좀비에요

그게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건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 무트 타무트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그렇게 선악과를 금단의 열매로 규정을 하신 것은 인간의 자기 가능성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를 애초부터 막아 버린 거예요

너희들이 먹고 선악 판단하여 생명나무로 못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금해 놓은 거예요

인간은 선악을 알도록 지어지지 않았어요 선악과를 먹은 후에 비로소 인간이 선악을 알았지 인간은 원래 선악을 알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에요 못 먹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요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걸 스스로 판단해서 선악 판단의 주체자가 되면 안되요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걸 선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규정하신 것을 악으로 규정하면 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만 열심히 쫓아서 살면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어진 거예요

죽여 그러면 죽이면 돼요 먹어 그러면 먹으면 돼요 먹지 마 그러면 안 먹으면 돼요

선악은 하나님이 판단하여 우리에게 그냥 명령해 주시고 우리는 그냥 듣고 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버렸죠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보기 쉬운 동산 중앙에다 놔둔 거예요 먹으라는 거예요 먹고 뭘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 인간은 선악 판단에 눈이 밝아져서 세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과 현실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을 하기 시작했어요

거기에 하나님의 뜻은 전혀 개입될 수가 없어요 이미 선악 판단의 주체자는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절대 개입이 안됩니다

인간 자체가 선악 판단의 주체자인 신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즉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봉쇄해 버리셨어요

그 길은 절대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들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정성으로도 따먹을 수 없도록 하늘의 조치가 내려져 버린 거예요 이제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버린 인간은 자신들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기 시작했어요

인간들이 스스로 영생에 이르려고 온갖 선행 체계 지식체계 이념 종교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그 생명나무 실과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폭로당하지 않기 위해서 갖가지 방어기제를 내 놓으면서 디펜스 메커니즘을 내놓으면서 스스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를 하는 거죠

그들은 바벨탑이라는 것을 쌓아서 인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려 하기도 했고

가인의 후예들에서 시작된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지고의 행복 즉 구원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기도 해요

​그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선함과 악함을 규정해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을 많이 행하는 자들을 착한 사람 위대한 성자 훌륭한 위인 본받아야 할 사람 등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마치 그렇게 사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을 하며 살죠

착한 사람이니까 훌륭한 위인이니까 좋은 일 많이 한 사람이니까 인간들의 판단입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선함 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꽤 괜찮은 자들인 것처럼 포장을 해서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을 시도하죠

그게 역사입니다 더러운 똥 덩어리 같은 역사

이러한 선행 체계와 지식체계 문화와 문명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타락한 인간들의 방어기제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꽤 기특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시도와 노력에 어디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거예요 그 모든 시도의 중심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시도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게 죄인 거예요

생명나무 실과 즉 영생으로 가는 길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혀 있어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아무도 그 어떤 선행 체계 그 어떤 지식체계로도 그 길은 접근 불가에요

그래서 창세기에서 막아버리는 거예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가 내린 선악의 판단을 기준으로 그것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의 결과물을 갖고 천국을 침노하려 하고 있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선한 행위로도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은 열리지 않아요 못 들어 갑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은 길이에요 그 길은 오직 예수로만 열려요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 길은 열리도록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하늘 위로부터 땅 아래로 찢어졌죠

그 휘장에 뭐가 그려져 있다 그래요 그룹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생명나무를 가리고 있는 그룹이 거기서 해산이 되는 거예요 찢어지는 거예요 그 그룹들은 지성소 즉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시은좌를 지키고 있던 그룹들이란 말이에요 상징적이지만 그게 인제 생명나무잖아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살아있으면 그게 산 거예요 영생인 거예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죽으면 그 자들이 멸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지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버린 거예요 지성소가 열려 버린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는 일 년에 한번 완벽한 죄 씻음의 결례를 행한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에요

그 외에 모든 접근 시도는 그룹들과 화염검에 의해서 차단이 되고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 무시무시한 곳을 가리고 있던 그 그룹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산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과학과 문명과 교육과 선행 체계 지식체계 등을 동원하여 그 휘장을 자기들이 찢으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좁은 문 좁은 길 내가 들어가겠다라는 것이죠 그때 그룹들의 공격이 온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에 현실입니다

전쟁 기아 폭력 간음 별 지저분한 것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죠 그게 인간들의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 대한 침노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룹들의 공격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로 들어가 영생의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어요

너무 쉬우니까 자존심 상하죠 너무 쉬우니까 자존심 상하죠 차라리 팔이라도 하나 자르라면 선뜻 자르겠어요 아니 63빌딩에서 한번 뛰어 내라라면 한번 뛰어내려 보겠는데 그냥 믿으라고 하니까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이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신의 경지에 다 올라갔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 경지지만

다른 길은 없어요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 이외에 모든 시도는 전부 죽음의 시도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버린 인간은 은혜를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내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들은 절대 은혜 앞에 항복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다가 자꾸 인간의 행함을 보태려 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의 저주받을 의였죠 자신들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영광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한 이들이 내어 놓는 종교행위는 전부 자신의 자랑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행치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런 행함이 전부 자기의 의로 쌓이고 있었다 말입니다 마일리지로 차곡차곡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보다 연약한 자들을 향하여 가차없이 화살을 날린 거죠 저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게 자기 의를 쌓은 자들의 모습인 거예요

그들은 말씀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너희들은 바다를 건너 물을 건너 산을 넘어 열심히 전도를 하는데 다 지옥으로 끌고 가는구나 노력을 했다니깐요 그들 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고 권능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구제나 봉사나 섬김의 착한 일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어야 돼요 그 욕은 당시에 가장 더럽고 충격적인 욕이었어요 지금의 개 자제분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런 더러운 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욕을 했다니깐요 주님이 얼마나 그들의 행위에 화가 났으면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그 추악한 욕을 하셨겠습니까 왜 그들의 착한 행위 기특한 행위가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의 모든 목적이 다 자기 영광 챙기기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 바로 앞장으로 가서 인간의 행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죠

마태복음 6장 1절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하는 모든 착한 일과 종교행위가 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법을 행함인 거예요 그 착한 일이 그 선한 일이 불법을 행함이라니깐요

본문 23절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평생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권능도 행했고 선행도 행했어요

당시에 선지자라는 건 거지 꼴로 살겠다라는 것을 각오하고 나선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고 말씀을 전했다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는 불법 행한 거야 이놈아 나는 너 몰라라고 이야기했다니깐요

그 모든 게 다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었고 그 행함을 의지하여 생명나무 실과에 도달해 보겠다고 하는 패역하고 무식한 시도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 많은 행함을 장황히 나열을 하고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쉬운 말로 그들이 주여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 이유는 자신들에게 권능 달라고 그리고 능력 달라고 그래서 내가 뭔가를 해서 내가 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주여 주여 부른 거예요 진리죠 우리도 그렇게 부르잖아요

예수님이 그런다니깐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는 너희들 몰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은 아무리 애타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더라도 모두 지옥행이에요

그런 식의 기도 하루에 여섯 시간 일곱 시간씩 해도 그 기도 때문에 지옥 가요 아십니까

그리고는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러므로에요 항상 이 그러므로 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돼요

거기다가 동그라미 치세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문맥을 여러분이 잘 보셔야 되는 거예요

24절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바로 위에서는 엉터리 행함을 내어 놓은 자들에게 저주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그러므로 행함을 내어 놓으라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 행함은 어떤 행함이겠어요

너네 이런 행함 내놓으면 다 지옥 간다 그게 뭐냐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 행한 건데 착한 일한 건데

그러면 너네 다 지옥 간다 그래놓고 행함을 내어 놓으라라고 그러므로로 잇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반석 위에 짓는 집은 도대체 뭐냐 말이에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죠

고린도전서 3장으로 한번 가서 확인하고 갈까요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돼요 따라서 그 위에 집을 짓는다는 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집은 우리의 행함이나 열심 노력 정성 등에 의해 지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에 의해 지어지는 거예요 시작부터 끝까지가 예수에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믿음의 시작이요 끝내시는 이란 뜻이거든요

시작과 끝이 예수에요

그래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는 그런 말이 나오는 거죠

예수의 터 위에 예수의 집이 지어져야 되는데 거기에 우리의 엉뚱한 못질이 가입이 되는 거예요

그거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인 거예요 그래서 전부다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 거죠

그렇죠 당당한 구원 얻을 수 있는 사람 없어요

다 부끄러운 구원이에요 그건 뭔가를 행하지 않고 겨우겨우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팬티만 입고 들어가는 그런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다 하시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면목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들어가는 게 천국인 거예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건 예수만을 믿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반석 위에 짓는 집이라는 성도의 행함인 거예요

행함은 믿음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행함은 믿음이란 말입니다

오직 믿음 위에 서는 집 예수 위에 서는 집 예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공로 위에 지어진 집

그게 진짜 믿음의 집인 거예요

아이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에요 요 이야기하는 고 인간이 모래 위에 집 짓는 인간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요 내가 언제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랬어요 저는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떤 인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닌대요

요즘 우리 목사님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고렇게 설교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는데 제가 언제 그랬어요

요 인간들이 그동안에 자기들이 뭔가 한 거를 자기 가치로 챙기고 있었다라는 증거에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하나님이 한 거라면 내가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예수의 은혜 의지하라 그랬지 언제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랬어요

그런 착한 일 선한 일은 예수 안 믿는 이들도 다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해도 된다고요 아니에요 인간이면 다 해야 되는 거예요

그건요 이슬람교인도 하고 불교인도 하고 다 하는 거니까 그건 하는 거예요 구원에 그런 거 끌어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의 은혜를 알고 하더라도 하라는 거예요 그런 거는요 언제 제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랬어요 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렇지만 그게 여러분의 의로 쌓이지 않을 때 하세요 여러분에게 점수가 주어질 때 그 일로 여러분 지옥 갑니다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줍지 않은 행함이나 공로들을 내놓으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기의 인기와 영광과 만족을 챙기려하는 그런 음흉한 시도들이 교회 안에 여전히 팽배해요 그것들이 바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이에요

겉으로는 근사하죠 너무 착해 너무 정직해 너무 깨끗해 너무 착착착착 돌아가 교회가 건강하고 건전하게 그런데 그게 모래 위에 짓는 집일 수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여러분 자꾸 모래 위에 짓는 집 그러니까

누가 모래 위에 집을 지어요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소양강댐이 사력댐입니다 모래로 지은 거예요 그거요

모래 위에 짓는다고 해서 다 그렇게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특히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를 잘 알면

그게 무슨 얘긴지 금방 알아요 팔레스타인 땅에는 와디라는 게 있어요

와디는 평소에 건기에는요 너무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해 보여서 사람들이 길로 쓰는 거예요

교통로로 원래 그게 물길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건기에는 그게 딱딱하게 굳어가지고 사람들이 거길 교통로로 삼아요

마차도 거기로만 다녀요 딱딱하니까 그런데 우기 때 비가 오면 그 와디는 금방 본색을 드러내서 질퍽한 수렁으로 변하고 물이 그 길로 잡혀요 다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와디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단단해 보이냐 얼마나 깨끗해 보이니 얼마나 멋져 보여 창수 한번 흘려보내볼까 어떻게 되는지 그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 진짜 그거 네 자랑으로 하는 거 아니야 네 만족을 위해서 하는 거 아니야 네 인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니야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건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훌륭한 종교행위와 감동스러운 착한 일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심판대 앞에 나갔을 때 주님에 의해서 자기 영광 챙기기라는 더러운 외식으로 판정이 되는 그런 행위들을 말하는 거예요

따라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선한 행위와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많이 내어놓는 그런 성도의 삶을 말하는 거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식의 성경해석은 아이 또 이거를 아이 그거구나 이렇게 생각하실까 봐 숨이 차도록 빨리 이야기했는데 그런 해석은 이 비유의 진의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해석이란 말입니다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더 훌륭해 보이고 더 감동스러워 보이는 행함을 많이 내놓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행함이 전부 자신의 인기 챙기기 자신의 만족 챙기기 자신의 가치 챙기기 자신의 자존심 챙기기 자신의 영광 챙기기의 행함일 때 그들은 그 행함으로 심판받는다 말입니다 그 행함으로 딴 게 아니라 그 행함으로 그 착한 행함으로 심판받는다 말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 어떤 행함을 내놓을 때에도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면목없고 공로 없는 겸손한 행함을 내어 놓게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반석 위에 짓는 집은 외려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보다 행함이 덜할 수 있다니깐요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함으로 그 불안함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에 지나친 선행과 지나친 깨끗함을 추구하게 돼요 그것도 방어기제 중의 하나인 프로젝션이라는 거예요 투영 그래야 자신의 더러운 좀비 얼굴이 가려지거든요

자기 안에 있는 더러운 이 죄를요 다른 사람에게 투영을 시켜서 그 사람에게서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로 달려가 죽여 버리는 거예요 공격을 하는 거예요 그게 프로젝션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나치게 지적하는 사람들 여러분들 경계하셔야 돼요

그 사람 속에 그게 들어있는 거예요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스스로에게 폭로되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도덕과 윤리와 선행으로 감추어서 지저분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려는 시도 그 모든 것이 다 추악한 인간들의 저주받을 방어기제 들인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선행과 그들의 종교행위가 다 뭐였다 그랬어요

외식이라 그랬어요 외식은 뭐예요 밖에 나가서 밥 먹는 거 겉과 속이 다른 거 아니에요

내 영광 위해서 행하는 모든 착한 일 종교행위가 외식이에요 내 영광 위해서 내 만족 위해서 내 유익 위해서 하는 모든 것 자기 가치 챙기기였어요

바리새인들의 선행과 종교행위는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길 가운데서 했고요 금식을 해도 수척한 척 괴로운 척 고통스러운척하는 거예요 삼일째가 제일 힘들어 뭐 이러면서 누가 물어봤어요 남을 도울 때도 나팔을 불며 했고 헌금을 해도 남들 앞에서 폼나게 해요 그러한 선한 행위들이 모두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지옥으로 떨어질 불법을 행함인 거예요

우리 제자의 아이가 지금 세 살인데 항상 말을 그렇게 한데요 엄마 싫어 아빠 싫어 그런데요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혼을 내줬데요

어디 그런 말을 하냐고 그냥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그랬더니 애가 막 울면서 아빠 싫어요 그랬대요 허허엄마는 아빠 좋아 엄마 좋아 이 말을 기대했는데 애가 울면서 아빠 싫어요 그러니까 내용은 똑같은데 어투만 바꿔 버린 거죠 그죠 존댓말로 그게 방어기재인 거예요 모든 인간이 바로 고런 모습으로 착한 일을 한다니깐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다 그런데 우리 종교적 열심이나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선교 우리의 구제 우리의 헌금을 한번 돌아보잔 말이에요

어떠십니까 그게 정말 여러분의 자랑이나 여러분의 자존심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백 퍼센트 만일 그렇다면 그게 다 창수가 나면 사라질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저주받을 불법이에요 그것으로 여러분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보고 싶으신 눈물은 바로 그러한 눈물이에요

왜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이렇게 오래 말씀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가치 챙기기와 나의 영광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법을 행함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런 고백과 함께 내놓는 눈물 그 눈물을 하나님이 보시길 원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부인이거든요

여러분 보고 선행과 헌금 구제 봉사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하면서 그게 여러분의 가치 챙기기로 쌓이는 게 아니라

나는 왜 이게 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로 나오지 않을까를 반성하라고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거예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거 가져다가 어따 쓰실라고 하라 그러겠습니까 여러분 돈이 없어서 하나님이 일을 못해요 여러분이 힘을 보태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십니까 아닌 거예요

너희들은 뭘 하나 해도 여전히 너희들에 영광만을 구하는구나 이거 한번 경험하라는 거예요 보라는 거예요 헌금을 하면서 진정한 헌금을 하지 못하는 나를 폭로당하고 헌금이 뭐예요 예수님이 날 위해 첫 번째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잖아요 그래서 나는 나를 드리는 게 헌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게 안되고 내가 이만큼 헌금했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겠지 내가 지은 죄들 요만큼은 상쇄해 주겠지 왜 그런 마음으로 헌금을 하냐 그거 알아먹으라는 거예요

구제를 하면서 참된 구제를 행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들키면서 봉사를 하면서도 우쭐대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당하면서 그렇게 나를 부인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인 거예요 절대 그런 걸 하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뿌듯하게 생각하시면 안되요 그러면 헛돈 쓰시는 거고 헛수고하시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살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세울 유일한 길입니다

이게 자기부인이고 고게 반석 위에 집 짓는 거예요

따라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폭력적 경륜에 의해서 깨끗하고 선한 행위보다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더 많이 폭로될 수도 있는 거예요 완전히 거꾸로죠

그렇게 발각되어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여 생명나무에로의 전진을 한다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의 피공로만을 의지해서 그 그룹들과 화염검을 믿음으로 찢어 내는 삶 그들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의 항복 자기부인 자기 영광 챙기기에 대한 폭로와 경고

이런 것들을 설교함으로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자기 의로 겹겹이 둘려있는 무장을 해제시켜 버리는 게 올바른 설교자의 임무인 거예요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부추겨주는 설교를 해서 그들의 에너지와 소리와 열심을 노략질하죠 착하게 사세요 경건하게 사세요 정직하게 사세요 헌금 많이 하세요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세요 그러면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거기 하나님에 은혜는 어디에 들어갑니까 굉장히 좋은 설교 같잖아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주며 우리의 열심을 부추겨 주는 굉장히 좋은 설교 아닙니까 착하게 사세요 경건하게 사세요 정직하게 사세요 헌금 열심히 하세요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세요 주일 빠지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고 그러한 행위를 강조해서 행위를 끄집어 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스스로 그런 행위를 함으로 해서 야 나는 굉장히 괜찮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라고 여기게 만들어 주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그래서 바로 고 위에 거짓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15절 보세요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고 행간을 잘 읽으실 수 있어야 돼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거 보세요 열매 안 맺으면 다 찍어 버린다잖아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충분히 그죠

그런데 문맥 속에서 이 대목을 이해할 때 뜬금없이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실 리가 있냐고요

15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있고 그 거짓 선지자의 목적은 노략질이에요 바로 이 거짓선지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여 주여 내가 선지자 노릇하지 않았습니까라는 고 선지자에요 그렇죠 바로 고 밑에 그 이야기가 나오니까

고 선지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양의 옷을 입었다라는게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박태선이나 문선명 같은 사람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일까요 아니요 그들은 이미 이름이 폭로됐어요 이리의 옷을 입은 이리에요 그 사람들은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정말 옳아 버리고 정말 깨끗해 보이고 정말 정직해 보이는데 실상은 양들을 노략질하고 있는 그런 자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노략질이라고 하니까 자꾸 돈을 목적으로 해서 양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건축헌금이나 갈취하고 뭐 십일조나 갈취하고 하는 그런 것으로만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을 떠올리시는 거 같은데

진짜 무서운 노략질은 그 사람들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거예요 생명을 갉아먹는 게 그게 진짜 이리들의 노략질입니다

돈 얼마 뺏기고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명을 갉아먹는 그런 노략질하는 이리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양들의 생명을 갉아먹는가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를 하신 후에

갑자기 열매 이야기를 하시죠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 그래요 그게 어떤 열매일까요

구제의 열매 정직의 열매 청빈의 열매 선한 삶의 열매 이런 걸까요 그러면 간디가 최고죠 그건요 법정 스님이 최고예요 성철 아이 최고죠 전 옆에서 봤거든요 그분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럼 그들은 지금 참 선지자가 내어 놓아야 하는 열매를 내놓은 겁니까 맞아요 예수님이 바로 그 열매를 내 놓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열매로 판별하라는 거예요 아닐 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열매는 세상 사람들은 내어놓을 수 없는 특별한 열매를 이야기해요

세상 사람들도 다 내어 놓을 수 있는 열매라면 하나님은 그걸로 절대 지옥과 천국을 가르면 안 돼요

그러면 그게 무슨 열매냐 말이에요 그게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착하게 산다 하더라도 믿음의 열매는 못 내놔요 왜 내가 하나님만 믿어야 돼 나도 열심히 수행하고 고행하고 수도를 쌓아 그리고 착한 일하여 구원에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게 세상 종교 아닙니까 범신론 힌두교 불교 다 그거잖아요 증산도가 어때요 여호와 증인 이슬람 다 뭐예요 우리들의 힘으로 생명나무로 갈 수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폭탄 두르고 자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요 오직 성도만 믿음의 열매를 내놓을 수 있어요

믿음이라는 건요…. 그 자체가 자기 긍정을 부인해 버리는 대 전제를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를 신뢰하는데 왜 다른 존재를 믿어요 믿음은 나라는 존재를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믿음에 의해서 자기가 부인이 되고 성령에 의해서 그들 속에 맺혀지는 게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그 열매를 이렇게 세분하여 기술을 하죠

5장 22절 보세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떠세요 여러분 안에 이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나요

서머나 교회서는 솔직해져야 돼요 껍데기 벗기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목사 앞에서 가면 쓰고 있으면 안 돼요

주렁주렁 열려 있어요 솔직히 자신 없죠 안됩니다 여러분 이게 성령의 열매에요

여기서 성령의 열매는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이라 그랬죠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 이 성령의 열매는 예수를 믿는 순간 즉시로 맺어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 그때 완전한 열매로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는 열매에요

중요한 건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내가 나의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선악의 원리에 입각하여 맺어놓은 가짜 열매들이 제거가 되는 게 선행되어야 돼요

내가 내 가치 챙기기로 그동안 열심을 내어서 행했던 그러한 선행들 그러한 착함들 그런 종교적 열심이 먼저 제거가 되는 게 선행이 되야 돼요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서의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고 완성되어져가는 그 길에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자랑으로 내어 놓는 선한 행위들의 …소멸이어야 되는 거예요

먼저 그러한 잎사귀만 무성한 외식의 행위들이 은혜의 복음앞에서 스러져 가고

그렇게 자신의 의가 부인이 되어져 가게 되면 성령이 맺으시는 진짜 열매가 이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보이지 않게 맺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요 따라서 성도가 진짜 열매를 맺는 모습은 외부로 드러나는 선한 열심과 부지런한 종교행위의 감추어짐으로 드러나요 먼저 그게 감추어져요 먼저 그게 은혜의 말씀의 위력이에요

은혜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골수와 관절을 쪼개버려요

그리고 가짜열매 가짜행위들을 완전히 폭로시켜버리고 내 삶 속에서 포를 떠버리신다 말입니다

그게 말씀의 검이 하는 일이에요

매스를 대신다 말이에요

그래서 겉으로 들어나는 착함이나 열심 등이 감추어지고 숨어서 행하시는 예수님에 진짜 행함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한 자기부인의 모습은 산자의 눈에 때로는 시험이 든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열심이 사라진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첫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으로도 보여줘요 왜 그동안 내가 행했던 그 행위에 대해서 자신감이 점점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야 저 사람 서머나교회 왔더니 시험들었어 이런 소리를 들으셔야 돼요 여러분은요

그렇게 열심히 하루도 안빼놓고 20년동안 새벽기도 다니던 사람이 어느날 부터 새벽기도를 안 가네

잘하고 계시는 거예요 집팔아서 맨날 헌금하고 빚내서 헌금했던 사람이 야 이제는 그런 열심을 보이질 않아 첫사랑을 잃었나봐 잘하시는 거예요

예배당 이전 헌금을 걷어야 하는 이마당이 허허 이런 설교를 하다니 허허허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그 은혜와 긍휼 앞에서의 처절한 자기부인을 가르치지 않구요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면서 긍정적 사고니 뭐니 하면서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요하는 그러한 자들이 바로 양의 탈을 쓴 거짓선지자에요 아세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이 그동안 존경했던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저런 사람이 우리 이민교회를 개혁할 사람이야 이렇게 이야기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은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강조해요 특별 새벽기도니 금식이니 천일제단이니 하면서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강조하고 착하게 살자고 선하게 살자고 눈물섞인 호소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심과 선함의 결과는 항상 인간의 유익으로 결론지어지죠

그들이 다 가짜에요 100프로 이리입니다 그걸 인간의 유익으로 믿는 이들은 전부 가짜에요

그건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행함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들의 삶 속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행위여야 되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성공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우리의 천국을위해 우리가 열매 맺자는 거죠

나 나 나 우리 우리 우리 이게 다 뭐였어요 시내산 아래에서의 금송아지였고 그게 바로 선악과 사건 아니였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우리의 신을 만들자 여호와라고 만들어 놨더니 금송아지가 쑥 나왔어요

우리 나 그게 중심인건 전부 가짜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의 영생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거예요

그걸 아는 이들은 절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착한 일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착한 일 해요

그걸 아는 이들은 절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백일기도 하지 않아요 자신의 소원 이루기 위해 백일기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재를 위해 기도해요 그걸 아는 이들은 절대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서 구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으로 구제해요

그걸 아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몇 배로 더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아들 예수의 목숨으로 우리를 위해 헌금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나 자신을 전부 주께 맡긴다는 신앙고백으로 헌금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진짜 열매를 맺게 하는 예수님의 은혜를 충분히 가르쳐 주지도 않고 무조건 착하게 살고 종교적 열심을 부려서 이 세상에서도 인기와 자랑을 챙기고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복을 누리며 천국도 가자는 식의 가르침은 마귀의 가르침인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게 마귀의 속삭임인 것입니다 그게 마귀의 교리에요

이렇게 열심을 부리는데 하나님이 감동하지 않을까 이게 마귀라니깐요 감동 안해요 믿어야 감동하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동시켜 주길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감동시키신다니깐요

그런데 이 시대에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감동시킬려고 하고 있어요 군사가 되겠대요 어떤 군사가 될라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제가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깊이 체험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은 헌금도 구제도 봉사도 다 멈추라고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을 드린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럴때마다 헌금이 줄고 일할 사람이 줍니다 실제로 교회로선 손해에요 그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나 자각도 없는 이들에게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부리고 헌금도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많이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시다 그래야 복받습니다라고 설교를 한다면 그건 선동이고 웅변이지 설교가 아닌 거예요

그게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나 기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그 인간들은 그냥 자동적이지만

성경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가르치는 것을 뒤로한채…. 착한 삶 열심있는 삶 선한삶 세상을 밝히는 삶 등을 가르치는 이들이 더 무서운 이리들인 거예요

그렇게 개혁을 외치면서 깨끗하게 살자 사회를 개혁하자 정화하자라고 설교하는 이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 안에 말씀이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전부 도산 안창호에요 이순신이야 다 그걸 교회에서 들으셔야 돼요?

꼭 교회에서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그 피의 공로 이외에 다른걸 절대 들을 생각하지 마셔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를 받은 자들의 실체에 대해서 완전히 까발려야 돼요 먼저 은혜를 알려면 그들이 어떤 지경에 있었던 자들인지를 먼저 까발려야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도 그렇게 죄인됨의 폭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놔두시는 거예요

그냥 너희들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배우라고

설교시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당신들이 얼마나 죄인들이고 지금도 얼마나 그 죄성 속에서 헤메고 있는지를 까발려 버리는 거예요

폭로시켜 버려야 돼요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며 얼마나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매일같이 폭로해 버려야 돼요 그래서 올바른 설교를 듣는 양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속에서 자신을 직시 하셔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들으시면서 제가 미워져야 돼요 도대체 저 인간이 나의 이 실체를 어떻게 알고 설교시간에 나를 찝어서 표적설교를 하는가 예 목사의 설교는 모든 죄인들을 표적하며 설교하는게 맞아요

그래서 새로오신 양집사님이 저한테 메일을 보내셨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까 독사 중에 맹독사에게 물린거 같다고 상처받았어요 독사 중에 가장 지독한 맹독사에게 물린것 같이 아팠다 그래요 잘들으신 거예요

어떤분이 저보고 기독교계에 김구라래요 아 내가 그런 인간하고 비교가 될줄은 정말 개그맨 중에 독설 잘하는 그런 친구있죠 저보고 기독교의 김구라래요 어떤 사람은 왕비호라고 그러고 왕비호감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는다는 거죠 괜찮아요 그런 평가를 받아야 돼요 듣기가 싫어야 돼요 그래서 때로는 한 3-4개월 나갔다 들어와야 돼요 너무 듣기 싫어서 꼴보기 싫고 듣기 싫어서

​​

왜 나를 이렇게 폭로시키는가….그 때에 저는 그런 악역을 하고 하나님이 오셔서 덮으시는 거예요

은혜로

그렇지 않고는 여러분이 은혜를 몰라요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분과 화목하지 못해요 그러면 천국 못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가시는건데 그분을 몰라요

그리고 착하게 살자 경건하게 살자 사회를 개혁하자 내가 다 해버렸어요 하기 싫은거 억지로

그것도 어떨때는 자기 만족에 취해서 그러니까 그걸 시킨 하나님이 미운 거예요

화목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는 없고 맨 자기사랑에서 지 깨끗함만을 챙긴 인간들만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교회와도 어디 발을 둘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사람 저 뒤에서 밥도 안먹고 빌빌 돌아다니는거 있죠 어딜가서 누구랑 애길해야 되나 하나님이 그러실거 같아 교회 와갖고 얘네들이 나를 아무도 모르는데 나 누구랑 얘길해야 하나 뒤에서 서성서성 돌아다니실거 같아요

전부 착하고 깨끗한 인간들만 있어갖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다가 은혜로 덮어야 되는지 성경도 너무 많이 알어 너무 경건해 다들 울어 또 그런데 내가 왔는데 날 못알아봐 여러분 하나님을 아셔야 돼요

그분을 배우셔야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진짜 올바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제가 예수 죽인거 맞네요 저 지금이라도 그냥 지옥 보내주세요 전 아무 할 말 없어요 하나님 차라리 이 더러운 인간 지옥보내 주세요 그 말이 먼저 나와야 돼요 어떻게 해서든지 나 천국 가야돼요가 아니라 하나님 나 더러워 죽겠네요 정말 지옥 보내주세요 이 더러운 인간 지옥 보내주세요가 먼저 나오셔야 돼요

여러분 설교를 들으면서 그 고백을 터트려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이 여러분 덮고 오셔서 얘야 지옥이 왠말이야 내가 다 용서했대니깐 난 몰라 네가 무슨 죄 졌는지 몰라 예수가 다 묻어 버렸단다

나는 몰라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거예요 여러분 열매맺는 주체​가 누굽니까 여러분 보고 열매 맺으라 그랬어요 예수님이

요한복음으로 가보세요 15장 4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누가 맺는다는 거예요 예수가 맺으신다는 거예요 너희는 그냥 붙어 있으라는 거예요

붙어 있는것도 내가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접붙임을 단단하게 콱 시켜 줬어요 그냥 있으면 돼

살아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가 열매 맺어요 그때에 그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갖고 있는 현실인식이 뭐겠어요

나는 돌감람나무에요 참감람나무는 예수밖에 없어요 이 예수에 내가 붙어서 이렇게 수지맞고 있네요 이걸 인식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 나쁜 나무가 어떻게 스스로 열매를 맺어요 하나님이 열매 맺어주시겠죠라고 해야 되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한다구요 아니야 너 좋은 나무야 열매 맺을 수 있어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너 좋은 나무야 열매 맺어…..

그 열매를 보고 그러한 스스로의 시장에 가서 사다가 매달아 놓은 그런 열매보고 먹어라가 거짓 선지자이야기인 거예요 완전히 뒤집어 지죠 그죠

로마서 11장 24절 보세요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힘을 얻었은즉

수동태잖아요 요게 나라는걸 인식하는 거예요 나는 나쁜 나무에요 나는 나쁜 나무에요

뭐라고 그래요 거짓선지자 이야기에서 가시에서 엉겅퀴에서 어떻게 포도와 무화과를 따느냐 그러죠

가시와 엉겅퀴가 어디 나왔던 단어에요 창세기의 저주받은 인간이에요 너희는 가시와 엉겅퀴야…

그 가시와 엉겅퀴가 포도나무에 지금 붙어 있는 거거든 그런데 너희들이 지금 포도를 맺겠다고 하고 있잖아 너희들이 맺겠다고 하고 있잖아 그게 가당하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슨 열매를 맺어 못맺어 그러니까 예수의 은혜를 의지해 예수가 어떻게 맺어가는지 보란 말이에요

내가 가시와 엉겅퀴인걸 아는게 뭐예요 눈을 뜨는 거라니깐요 내가 개 돼지라는걸 아는게 눈을 뜨는 거예요

그때에 자기가 부인되는거고 그 부인된 비워진 그릇 안에 예수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의 삶이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은닉되어서 숨어서 나오는 거예요

남들앞에 들리지도 않아요 자랑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그가 착한 일을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시험 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열심이 사라진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맺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인거에요

겉만 번드르르한 그런 행위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부 나쁜 나무인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의 비유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 된다는 결론이 나죠

7장 13절 보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에 드디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이 나오죠 이게 무슨 길이에요

창세기에 나오는 그 길이에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 보세요

3장 24절

이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나

이 길이란 말이에요 이길 이게 좁은 길이에요

말이 좁은 길이지 아무도 못 들어가 나는 길이에요 그렇죠 그룹들과 천사가 막고 있단 말이에요

아무도 못 들어 가는 길이에요

그 좁은 길 끝에 좁은 문이 있는 거예요 그 길은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대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게 이 말씀을 육신의 편안함과 연결을 시켜서 생각하는 건데 즉 자기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을 받고 잘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걸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의 신앙을 육적인 고난의 신앙이라고 해서 좁은 길 좁은 문이라고 그래요 물론 그게 틀린건 아니에요 그러나 이 산상수훈의 문맥 속에서 그정도의 추론은 너무 가난한 해석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개 돼지에 비유와 황금율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의 대접에 관한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먼저 우리를 대접해주신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일이였고

그 대접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믿음이라는 대접을 내어 놓게 되어 있다라는 그런 내용이였잖아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그렇게 대접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자기의 개 돼지됨을 폭로 당하고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의 역사를 기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거고 그거는 다 들어준다라는게 산상수훈의 내용이였잖아요 그이야기 바로 밑에 붙어 있는 게 좁은 길 좁은 문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거니까 걱정하지마 믿기만 해 은혜를 의지해 라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애써라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아니죠

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대접 하나님의 율법지킴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너희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고난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내용이 나오면 안되요

그리고 그러한 것이 좁은 문이라면 고생한 사람은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거고 이 땅에서 편안한 삶을 살다간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간 사람입니까 그러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전부 좁은 문 좁은 길로 간 사람들이에요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들은 전부 고생하면서 살았으니까 좁은 문 좁은 길 간 사람들입니까

고생하다가 조그만 교회에서 그냥 월급도 쥐꼬리 만하게 받고 그렇게 평생 목회하다가 간 사람은 좁은 길 간 사람이고 큰 교회에서 월급 많이 받고 그렇게 편안하게 목회하다가 간 사람은 넓은길 간 거에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건 육신의 안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인간들은 전부 자신의 영광 챙기기로 일생을 올인하는 존재에요

인간들이 자신의 영광 챙기기를 위해서는요 손해도 감수하고요 상함도 감수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 놓습니다 그게 죄의 무서움이에요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영광을 챙기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는다니깐요

그게 굉장히 위대한 일인거 같죠 그게 죄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자랑과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수도원에 올라가서 금욕생활을 하기도 하고 순교도 불사해요

여러분 그렇게 금욕생활을 하면 알 수 없는 쾌감이 있어요

마라톤을 열심히 뛸때요 한 두시간 뛰면 사람이 죽을거 같거든요 그런데 고 순간에요 얼마나 강력한 쾌감이 오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이 마라톤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나친 금욕생활을 하다보면 자기 만족이라는 것이 쾌감으로 와요 엄청난 쾌감으로요 그거 역시 자기 만족 챙기기에요 자기 영광 챙기기란 말입니다 인간들은그런것을위해서 순교도 불사해요

학생운동 하다 보면요 어느날 친구들이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하고 심지어 창자를 꺼내서 목에다 걸고 투신하는 이들이 있어요

예수를 모르는데도 명분을 위해서 자기 챙기기를 위해서 인간들은 충분히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존재에요 무섭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그 자기챙기기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인간들은 자신의 가치챙기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해요

선악의 판단에 주체가 되어서 신이 되어버린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챙기기라는

본성에 의해서

남에게 인정받는 착한 일 선한일 종교적인 일 고생하는 일 이런거에 열을 올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부러 고생을 자처하여 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 중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목숨걸고 고생고생하는 단기선교 열심히 가는지 아세요

거기에서 쾌감을 얻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거길 떠나는 사람들 몇 명 못봤어요

죽도록 고생하는데 그게 굉장히 뿌듯하게 만들어줘요 그런데 우리는 고런 길을 좁은 길로 알고 있어요 그게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자기 영광 챙기기를 위해서 교회에 집팔아 헌금하고 고생이잖아요

매일같이 새벽기도 나가고 금식하고 선교가고 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 영광 챙기기에서 나온 것이였을때 그게 넓은 길입니다

찾는이가 적다고 했는데 많잖아요 주변에 많잖아요 찾는이가 적다고 했다니깐요

많습니다 왜 자기영광 챙기기이기 때문에 고생을 자쳐할 수 있어요 심지어 순교도 할 수 있다니깐요

그게 넓은 길이에요

그러면 그 반대 좁은 길은 뭐겠어요

길은 누구에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내가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만 붙드는 게 좁은 길이에요

자존심 상하죠 그래도 내가 뭔가 좀 해야 되잖아 그래서 좁은 길로 안들어 가는 거예요 좁고 협착하여

요한복음 10장 7절 보세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다

좁은 문이 누구에요 예수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좁은 문 좁은 길이 누구? 예수 예수의 은혜만 붙들고 가는 거예요 면목없이 공로없이 자기부인의 삶 이게 좁은 길 좁은 문인 거예요

그 좁은 문 좁은 길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갈수도 없어요 찾을 수도 없어요

누가복음 13장 24절 보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힘쓰라 그래놓고 그래도 못 들어간다 힘써라 힘써봐 들어갈 수 있나 이 말이에요

못 들어간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좁은 문 좁은 길은 하나님의 편애에요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티끌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가는 길이에요 그게 좁은 길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풍성한 행위를 내어 놓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착한 행위에 자신이 없어요

그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가요

그리고 혹시 그러한 행위가 자신에게서 나온다 할지라도 그게 자기께 아니라 자기 안에 사는 예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대 자기 의의 마일리지로 쌓아 두지도 않아요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저놈은 예수를 믿고도 왜 저렇게 열심히 안살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니깐요 그렇다고 또 일부러 그런 평가를 받아야지 그러고 일부러 하던 것도 안하고 그러면 안되요

저는 여러분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냥 늘 감사하고 부끄럽고 면목없이 살면 돼요 거기에서 예수가 여러분의 삶을 장악하여 예수의 열매를 맺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세상적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볼 때 굉장히 넓은 길로 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요

야 저 사람은 저거 난 이렇게 고생하면서 이렇게 열심을 부리면서 매일 새벽기도가고 매일 금식하고 그러는데 왜 그런 거 하나도 안해 이렇게 볼 수 있다니깐요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저 사람 좁은 길 간다 넓은 길 간다 이런 거 판단하시면 안돼요

자기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되는 일은 자꾸 감추게 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일은 자꾸 숨기게 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고 선한 일을 힘쓰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게 좁은 문 좁은 길 가는 사람들이에요 왜 남에게 인정 못받고 가는 길이 쉬울거 같으세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에요 그래서 좁은 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혀 있어요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막아 놓으셨기 때문에

그 길은 인간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못 들어가고 못가는 길이에요 오직 예수의 은혜만 의지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를 아십니까 …그 예수의 은혜를 아세요 그 예수 앞에서의 나의 추악함을 인정하십니까

나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 ‘퓔씨 랙’ 더러운 걸레 똥걸레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의만 겸손히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좁은 길을 가는 분이 맞아요 여러분이 향하는 문은 좁은 문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이 참선지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거고

그런 여러분이야 말로 지금 열심히 반석 위에 집을 짓고 계시는 것이에요

그게 산상수훈의 전체 내용이에요 전혀 어렵지 않죠

그거 지킬려고 평생 노력했던 간디가 불쌍해 지는 순간입니다 그렇죠 그게 넓은 길 간거에요

내가 지켜서 남들에게 존경 받았잖아요

그게 넓은 길이라니깐요 근데 간디가 간 길을 좁은 길로 착각들 하고 있어 이 시대의 교회는

그래서 제가 요즘 강하게 은혜에 대한 설교를 정말 다소 강하게 설교하는 거예요

마치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라는 식의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제가 은혜만을 지금 강조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5년간 우리 성도의 행위에 대해서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죄인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 알라고 한거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실지로 그렇게 착하게 살아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열심히 성경공부해서 머리가 이만해져 가지고 그 성경말씀으로 그 지식으로 남들을 밟고 다니고 있어 막

우리는 이렇게 많이 배웠어 너는 뭐했어 여태 우리는 이렇게 착해 우리교회는 이렇게 건전해

우리교회는 목사가 월급도 조금받어 그게 뭐 자랑입니까 많이 주세요 허허허 그런데 그걸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뒤집어 엎어서 당신들이 지금 하는 게 전부 불법이며 전부 모래 위에 짓는 집입니다

부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로 급선회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정확히 같은 설교인 거예요

예수의 은혜를 붙들자

우리는 나쁜 나무다 우리는 여전히 개와 돼지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거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된거다 그 은혜에 감사하자 그거 설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셔야 돼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랬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열심을 부릴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죄 속에서 뒹굴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안됐을 때 절망하지 마시고 예수의 은혜로 한발짝씩 더 나가시란 말입니다

귀있는 자만 들으세요

여전히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존재로 부각이 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자기 자존심 챙기기와 자기 구원 챙기기 자기 천국 챙기기 자기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도 하고 순교도 하는 그런 사람들 그들이 바로 죽도록 고생은 하지만 넓은 문으로 가는 자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이며 모래 위에 와디 위에 번드르르한 집을 짓고 있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에요

​그 길에서 나오십시오 좁은 길로 나오세요 예수의 은혜만 붙드는 좁은 길로 나오세요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이 있으라 하는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거예요

그 자유는 피조물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있으라고 하는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자꾸 꼭데기로 올라갈려고 하니까

내 가치 챙기기 내 영광 챙기기로 자꾸 올라갈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일을 못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 있어 보세요

나는 나쁜나무에요라고… 무력하게 있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나

제가 지난주에 꽃나무 열 그루를 심었는데 땅을 파다 보니까 지렁이 벌레 바구미 별게 다 있어요

그런데 물어보고 싶었어요 너희들은 무슨 재미로 여기 이렇게 계속있니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 가득 있었을 거라구요 그 땅에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어요 무용한것 같고 불필요한 것 같은데

그런데 걔네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으면 우주가 멸망합니다 그들이 가장 선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자리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내려가야 할 자리인 거예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가득 채워 여러분 안에서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해 보십시오 그게 성도가 사는 삶인 거예요

자유하세요 행복하세요 평안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마7:24-25)

> >2012. 6. 3.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64)

본문 : 마 7:24-25

제목 : 반석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요즘 사람들은 외모를 아주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속은 볼 수가 없으니까 겉모양이라고 보도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만 외형적인 것을 보고 만족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실속이 중요한 것입니다.

밖으로 보이는 것은 보기에 좀 좋지 않다는 것일 뿐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속에 들어 있는 그 사람의 마음 상태는 정말로 인생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모도 아름답고 속도 차고 그런 사람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외모보다는 속사람의 상태를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그 중심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속을 볼 수 있는 분이시고 속을 중심적으로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겉보다는 속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똑 같이 생긴 집이 두채가 있습니다.

크기도 똑 같고 설계도도 똑 같고 재질도 똑 같고 밖에서 볼 때 어느 것 하나 다른 것이 없는 똑 같은 집입니다.

그런데 볼 수 없는 곳에 아주 다른 부분이 있는데 하나는 반석위에 세워졌고 하나는 모래위에 세워졌다는 점이 다릅니다.

외모나 용도가 똑 같기 때문에 평소에는 별로 다른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이 잘 버티고 있지만 모래위에 지은 집은 바로 무너져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어떤 사람은 그 신앙이 기초가 아주 든든한 반석 같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신앙의 기초가 모래와 같이 든든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의 기초를 아주 반석과 같이 든든하게 해 두고 그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기초가 시원치 않아도 그냥 방치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다짐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말을 잘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다가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고 나의 말을 잘 들었으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위에다가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조금도 반응이 없거나 반응은 있었는데도 실천을 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들이지만 특별히 산상보훈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이요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을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다짐을 한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기초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어떤 경우든지 무너지지 않고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우리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이 본문을 대하면서 아 우리는 반석위에다가 집을 짓는 사람들이구나. 반석위에다가 우리 집을 짓자고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 중에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터 닦고 집을 지음 같아”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후렴에는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집을 잘 짓자는 말은 없습니다.

이미 잘 지어진 집에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라고 했지 집을 잘 지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은 사람이나 짓고 있는 사람이나 지을 사람이나 결국은 짓는 것인데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위에다가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반석위에 지어진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우리는 반석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을 나타내는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을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 때문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좋은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무화가 나무나 포도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무화과나무이고 이미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우리가 양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양이기 때문에 양에게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염소는 염소라는 이유 때문에 작은 잘못 하나까지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양은 양이라는 이유 때문에 별 볼일 없는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아주 작은 일 하나까지도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행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아 말씀을 듣고 순종을 해야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불안해합니다.

내가 선을 행한 일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할까?

내가 의로운 일을 행한 것보다 불의를 행한 일들이 더 낳은데 어떻게 할까?

이러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라고 고민을 합니다.

반대로 뭘 좀 잘 한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교만한 마음도 가지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양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반석위에 기초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든든한 반석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겉모습은 양 같지만 속에는 이리가 들어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잎은 푸르고 무성하지만 실상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나무나 엉겅퀴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주인처럼 섬기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정말로 바른 신앙의 기초를 가진 참된 성도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냥 아무렇게나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고신교단의 교회이고 순교자의 후손이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경의 핵심진리를 다 배워서 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을 10년 20년 동안 계속 듣고 배우고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통해 경배와 찬양의 의미를 알고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복지선교를 하며 직접 간접적으로 이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믿으시면 됩니다.

제가 학설을 만들고 규정을 만들어서 그 규정에 맞춰서 여러분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든든한 기초위에 세워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반석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면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서 가난하고 애통해 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삶을 사모하고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니야 심령만 가난하면 되고 육신은 부자가 되어도 괜찮아 부자로 잘 사는 게 좋아 부자가 되자 라고 생각하면서 부자 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죄에 대해서 부족함에 대해서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만날 잘난 척 하고 싶어 하고 만날 자랑하고 싶어 하고 만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면 참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 참 어렵습니다.

잘난 사람이 되는 것 참 어렵습니다.

자랑거리 만들려면 어렵습니다.

죄짓지 않고 바르게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부자가 되어라, 잘난 사람이 되어라, 자랑거리를 많이 만들어라 죄짓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라, 라고 하셨다면 그 말씀 실천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솔직히 부자 되기 싫은 사람 여기 있습니까?

다 한 때는 한번 일어서 보려고 부자가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아보려고 노력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더냐구요.

좀 되는가 싶으면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좀 벌어 놓으면 더 쓸 일이 많아지고 그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해지는 것은 참 쉽습니다.

그냥 나누어주고 내버리면 가난해 집니다.

욕심내서 많이 안 벌면 금방 가난해집니다.

일부러 가난해지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가난해지는데 그게 복이라고 하는데 뭘 걱정을 합니까?

남들 앞에 교만하게 자랑하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잘난 척 하는 것도 뭐 잘난 척 할 건더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아무나 잘난 척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잘난 것도 없는데 잘난 척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냥 겸손하게 조용히 있는 것 참 쉽습니다.

그냥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너무 쉽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못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되는 일이니까 너무나 쉽습니다.

이 복잡하고 죄가 관영하는 세상에서 나만 죄짓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생각하는 것이 늘 죄고 계획하는 것이 늘 죄뿐이 이 세상에서 어찌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형제에게 욕한 마디 안하고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른뺨을 맞으면 외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예, 저는 어쩔 수 없이 죄를 많이 짓고 삽니다.

노력은 하지만 부패한 심령이 어쩔 수 없이 또 죄를 짓곤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난 도저히 회생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죄 때문에 애통해 울고 그런 나를 용서받게 하시는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해서 웁니다.

어리석게 부자가 되려고 그렇게 욕심 부리고 살지 말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면 됩니다.

어리석게 자랑하고 잘난척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게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지로 행동으로는 주님을 주인처럼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 하는 대로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돈 몇 푼 때문에 그 돈 따라 가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냥 없으면 굶고 가난해지십시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차라리 가난해지면 되잖아요.

주님께서 굶게 놔둔다고 하셨습니까?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을 하면서 사십니까?

말로는 주님을 주인으로 섬긴다고 하면서 주일날 그까짓 좀 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따라가십니까?

산으로 들로 바다로 스포츠 경기장으로 여행지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까?

이 좋은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일을 제쳐두고 세상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까?

정 노력해도 안 되면 손이 안 되면 손이라도 잘라 버리고 눈이 안 되면 눈이라도 뽑아 버리고 바르게 사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좀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들이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마시고 지혜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3.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이나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하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을 당할 때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기초가 든든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그 어려움이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미리 그 어려움에 대한 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유익합니다.

제가 요즘은 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삽니다.

수산동에 작은 텃밭에 고구마랑 호박이랑 여러 가지 채소들을 심었는데 비가 와야 됩니다.

비가 안 오면 가서 물을 길러다가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지만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논밭이 떠내려가기도 하지만 비는 와야 하고 바람은 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풍파는 필요합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고통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 풍랑으로 인해서 인생을 깨닫기도 하고 훈련을 받기도 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풍랑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가면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도 안 계신 것 같고 믿음도 없는 것 같고 신앙에도 갈등을 느낄 때가 더러 있습니다.

남들은 다 재미있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늘 기도하는데도 응답도 없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도 현실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서 회의를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돈과 교회, 이 세상의 쾌락과 천국, 별별 생각들이 우리를 괴롭게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갈등들이 우리를 시험하는 풍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이기고 승리하면 더 굳건한 믿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작은 시험들을 이기게 될 때 천국에 들어가게 될 때 만나게 될 최후의 시험에서 능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말씀해 주신 산상보훈의 귀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려고 다짐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설교] 반석 위에 지은 집

삼풍백화점은 지금까지도 부실공사의 대명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인생도 부실공사 때문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나름 잘 살아보겠다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노력하지만 끝에 가서 보니 무너진 인생이 된다면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기에 일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튼튼하고 복스러운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생을 집짓기로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24절)

인생의 집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초의 차이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땅을 깊이 파고 견고한 바위에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도 없이 지반이 약한 모래 위에 세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실상이 드러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 비와 홍수, 그리고 바람은 인생에 불어오는 갖가지 시련을 의미합니다. 질병 고통 환란 실패 죽음 심판입니다. 이런 것들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재계 순위 5위 안에 드는 기업 총수가 그동안 가정생활이 불행했다며 이혼 계획을 밝혔습니다. 행복의 개념이 소유에 있다면 이 가정은 우리나라에서 5번째 안에 드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이기에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을 지켜주는 견고한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것들은 모두 모래와 같이 연약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입니다. 다시 말해 온갖 욕망들입니다. 이런 것들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면 언젠가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참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말씀대로 살 때 비로소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9:1∼2) 성도 여러분, 이 같은 신앙 위에 집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원토록 주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병하 서울 양천구 화평교회 목사

반석 위에 집을 세워라

마태복음 7장 24-27절 반석 위에 집을 세워라 가.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한다. 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본문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하므로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 집은 모래 위에 짓는 것이 쉽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날 때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진다. 집은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 *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라고 하였다.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 집을 반석 위에 세운다는 것은 주님과 그의 말씀을 토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가치관의 문제다. 가치관이 인생을 좌우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반석’(페트라, 여성명사)은 주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이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나. 편의주의가 문제다.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사람들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은 쉽게 살려는 편의주의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현재, 분사) 않는다. 또한 그들은 말씀대로 철저하게 행하려고(현재, 분사)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씀은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힘들고 불리한 말씀은 무시한다. * 쉽게 살려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 먹는다. 사람은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하나님 말씀의 규제를 벗어나서 자신이 좋은 대로 살기를 원한다. 이는 말씀을 따라 힘들게 살기보다는 편하게 자유롭게 살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문제다. *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여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껍데기가 전부가 아니다.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또한 물질문명이 전부가 아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너무 쉽게 살려는 욕구가 인생을 망친다. 다. 말씀의 고삐에 묶여 있으라. 24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려면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기서 ‘지혜로운’(프로니모스)은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는 주님의 말씀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안 된다. 주님과 그의 말씀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네게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라고 하셨다. 말씀에서 떠나면 안 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1:2)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은 자가 되어야 한다. 남은 자는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과 그의 말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육신의 소리, 마귀의 속삼임, 세상의 악한 풍조가 유혹할지라도 오직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항상 말씀의 고삐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한다. 라.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좋은 날에는 모른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는 날이 되어서야 반석 위에 세운 집의 가치가 드러난다. 언젠가는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기억하고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한다. *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하여 두 가지를 요청하였다. 하나는 그리스로를 터로 삼고 집을 지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에 타지 않는 금이나 은으로 집을 지으라는 것이다(고전3:10-15). 언젠가 있을 심판의 날을 기억하고 튼튼한 집을 세우라.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온전히 준행하였던 노아는 큰 홍수 가운데서 가족을 지켰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라고 하였고,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6:22)라고 하였다.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 앞의 구절을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엄숙한 성구임을 여러 번 말한 바 있으나 지금 고찰하는 24-27절은 더욱 엄숙하고 더욱 경외감을 품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절에서도 같은 주제의 계속이며, 그 주제의 최종의 결말이다. 이것은 주의 교훈에 순종하지 않는 위험, 즉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지 않는 위험에 대한 동일한 경고이다. 이번에도 자기기만의 위험이다. 여기서는 인상적인 방법으로 모래 위에 세운 집이 크게 무너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특정 장면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련의 장면 중 제 3의 장면으로 보는 방법이다.

첫째 장면은 거짓 선지자에 관한 15-20에서 외견 때문에 속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고 마음으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장면은 ‘주여 주여’ 라고 말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 장면은 신념의 관점에서 혹은 우리의 열심과 열정과 우리의 활동의 관점에서 우리를 속이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기 위한 장면이다.

– 셋째 장면이자 최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 주님의 주요 관심사는, 구원의 이익과 축복만을 찾아 구하고 원하며 그것들을 표면상으로 가지는 것으로 안심하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교인에게,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하며 구원에서 오는 이익과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것이 거짓 신앙고백과 진정한 신앙고백의 차이와 그리스도인과 외견상의 그리스도인이 차이,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과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장면에는 두 사람과 두 집, 이중의 대조가 있다.

1) 두 사람의 차이점

첫째 유사점, 그들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집을,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집을 세우려고 했다. 두 집은 서로 매우 가까이에 있어서 정확히 같은 상태 아래에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종류의 집을 좋아했고 설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다른 점은 없었다. 두 집은 땅 밑에 있는 단 하나의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분명히 같았다. 두 사람의 생각은 똑 같았다. 더 나아가 두 집은 모두 같은 시험을 받았다.

둘째 다른 점, 먼저 일반적으로 그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관념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요점이다. 만일 이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산상 설교의 주의 가르침의 전 목적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완전히 분명하다. 두 집, 두 사람의 차이는 시험이 와서 홍수가 밀어닥치고 바람이 불 때에만 알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 해석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때에는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주의 목적은 우리들이 이 둘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이 주실 수 있는 안약을 눈에 바르고(계3:18),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으면(요일2:20), 두 사람과 두 집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6:48-49절에 현명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자기 집의 기초를 닦았고,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파지도 않았고 기초를 닦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다.

‘어리석다’ – 이 말은 어떤 특정적 전망, 어떤 인간에 대한 특정한 유형을 말해 주고 있다.

①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성미가 급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라고 말씀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당황하거나 동요하거나 성미가 급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과 계획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언제나 지름길이나 조급한 결과에 관심을 둔다.

② 그는 동시에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집 구조나 건축을 규제하는 법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건축가가 설계도를 작성하고 견적서를 만들듯이 일하는 데 바른 방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일상생활 중에서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적인 심성인 것이다.

③ 어리석은 사람은 성미가 너무 급해서 지시사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불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자기의 생각만이 최고인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충동과 생각만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의견에 만족하고 언제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서두르는 것이다.

④ 이것은 사물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심성이다. 기초 없이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은 잠시 일을 멈추고 생각하거나 자문해보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그 특정한 장소에 아주 쾌적한 집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여러 조언을 모두 물리치고, 이런 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집을 세운 것이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교회사에서 교훈을 배우는 데 무관심하다. 그는 성경이 말한 것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하면 자신의 방법으로 그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설계도를 참고하지 않는다. 그는 장래를 예상하거나 건축 중에 있는 그 집에 머지 않아 불가피하게 엄습해 올 어떤 시험이 있을 것을 직시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물론 이것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그는 한 가지 큰 소망은 영구성이 있는 집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상의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나는 지도와 가르침을 원한다” 현명한 사람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알고자 노력한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이나 열심에 떠밀려감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지식, 진리, 이해를 구한다. 그는 성급하게 뛰어들지도 않으며, 행동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한다.

2) 두 집의 차이점

첫째, 검토할 시기가 이미 자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집을 세우고 끝났을 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검토의 시기는 맨 처음 착수할 때이다.

둘째, 두 집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차이는 사활적으로 중대한 차이다. 그 이유는 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인 까닭이다. 기초가 나쁘면 다른 모든 것이 나쁠 것은 필연적이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셋째,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후일 시험의 시기가 왔을 때 분명하게 된다. 시험은 조만간 확실히 다가온다. 우리들은 이 시험에 직면해야 한다. 이것들에 대한 시험은 변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리 주님이 이 두 사람과 두 집의 차이점을 이처럼 사실적이며 극적으로 묘사하신 까닭은 이 차이점이 영적 영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수단이 된다. 청교도 시대나 복음적 신앙 각성시대와 같은 위대한 시대에는 이 문제에 크게 주의를 기울인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이 분별력을 구사해야 하는가?

첫째, 양자 간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① 양자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두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함께 교인된 것을 보게 된다. 두 종류의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② 이 두 사람은 외견상으로는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죄에서 용서함을 구하고, 자기의 죄가 용서된 것을 믿고 싶어한다. 평안을 원한다는 것이다. 내적인 평안을 구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늘의 세계는 평안에 굶주려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교로 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③ 위로나 위안을 구하는데 있어서도 같다. 이 세상은 위로를 구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마취제를 먹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④ 여러 가지 문제나 난국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는 소원에도 적용된다. 인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다.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고, 불행하게 된 비신자들도 누군가가 이끌어 주겠다는 말과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교훈에 탐내는 듯 뛰어들게 되는 것이며. 거짓 신앙고백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만큼 이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⑤ 그는 좋은 삶을 살아보고 싶어할지 모른다. 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철학 서적을 읽고 각종 윤리체계를 연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선하며 도덕적인 생활을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 시금석들만으로 이 두 사람을 구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둘째, 더 나아가 거짓 신앙고백자도 영적 힘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과 같이 오늘날도 영적인 능력을 탐내고 구하는 일이 있다. 강단에서 영적인 능력으로 설교하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고 육적으로 행한다. 진리보다 맹목적으로 영력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셋째, 거짓 신앙고백자도 또한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고 있다. 그도 천국과 지옥을 믿으며 멸망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적 관심의 영역 안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사실이겠는가?

– 거짓 신앙고백자는 자기가 안전한 줄로 믿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쫒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안하며, 종교에서 오는 위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거짓된 내적 평안을 가질 가능성은 없는가? 만일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사탄도 놀랄만한 안도감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거의 모두 위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세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참된 것과 거짓된 것과의 유사점은 이런 것까지도 포함할 수 있고 이런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분석하는 시금석이 어떤 것인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급한 심성, 설계도에 무관심한 이 심성, 집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안다고 생각하여 치달려가는 이 심성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한다. 다만 집을 세우는 데만 열중하는 이 심성을 이 기준에 비추어서 자신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부류에 속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

출처: 자기부인 ..글쓴이..바퀴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 예수.코리아

메모 :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I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실제에 적용 안된

진리의 불안정성 –

성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종교는 삶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주님의 비유 중에서도 의미 파악이 가장 명백한 비유에 속할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두드러진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화된 진리만이 시험에 잘 견딘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 이는 주님이 말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밝혀 주심이다는 것, 우리의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영혼의 정부(government)를 위해 그분이 내려놓는 위대한 삶의 원리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인 것은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요, 인격화되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성경 부분에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은 아버지요, 진리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선이 진리와 하나를 만들듯 하나인 것이다. 진리는 선의 형체이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 마치 불의 열이 불의 빛과 불가분하게 하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듣는 것

속뜻에서 듣는 것은 속 사람, 즉 영이 듣는 것, 즉 영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은 진리이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되고, 그분의 소유인 그 말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자연적인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생각해 봄도 없이 단지 과학적인 수준 정도에서 진리를 원리로서 채택한다. 예를 들면, 세상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말하기를,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고 말하고, 그는 가장 정직한 정책을 채택한다. 채택하는 이유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정직한 정책보다 정직한 정책이 소득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 받지 않고 세상적인 정책에 규율 받아진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정책을 선택함에 있어 뱀의 신중성을 사용해 간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고 뜻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이 있는 사항을 행동에 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진다.

오늘 비유는 경고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 경고가 갖는 힘의 출처는 천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저 알고 이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이해한 뒤 행동함에 의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인지 아니었는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 듣기는 했고, 양쪽 다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응용해서 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경우이나, 후자는 그분의 말씀을 지적 측면에서는 간직했으나, 일상 생활에서의 응용이 없었던 결과, 시험이라는 폭풍이 불어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영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한마디로 그 말씀을 행동에 놓기 위함이요 듣는 목적인 바, 듣는 것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세상은 많이 아는 자를 슬기롭다고 흔히 부른다. 그러나 주님이 슬기로운 자라고 하실 때 그 사람이란 자기 지식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선용을 만드는 자를 두고 일컫고 계신다. 어리석은 자란 지식을 선한 삶에 응용 못했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증거 한다. 영적 의미에서의 이 비유는 영적인 사항들, 즉 영이 마음속에서 짓게 되는 영적인 집과 관계가 있다.

영적인 집

마음은 각자의 영적인 집이고, 그 집은 각 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음은 의지와 생각으로 구성되고 의지는 애정(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지성을 동반하고 있다. 인간의 영적 삶은 그의 마음, 즉 그의 의지와 이해성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영적 삶의 질, 또는 삶의 종류는 그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리 하에 각자의 마음을 짓고 있다. 뾰족이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될 집을 우리 속에 짓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계획에 의거 집에 구조물을 하나씩 하나씩 붙여 세워가고 있다. 우리가 이 집을 천국의 재료들인 선한 애정, 진정한 생각들로 짓고 있다면, 우리의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이 거하실 집을 짓게 된다. 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시는 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23).

선한 사람이 자기 몫인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동안, 주님은 그분의 몫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 속에서 집을 실지로 지으신다. 악한 사람의 경우, 악령이 그에게 역사해서 그를 악마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속에 짓게 되는 집이라는 인격은 지어지는 집, 즉 상부 구조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정성은 집이 앉게 되는 기초에 의존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견고한 기초 없이 안전한 집은 있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번쩍거리는 궁전일지라도 그 기초가 가라앉는다면 그 궁전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반석

성경 글자에서 반석(rock)은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고로 그분은 바위(rock)라 불리우신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시편 18:2).

반석, 그 위에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짓는데, 그 반석은 주님이시다. 좀더 뾰족한 의미로 보면 반석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는다.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은 주님의 진리 위에 마음을 세운 것이며 순수한 믿음을 붙잡게 된다. 위에서 살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은 집의 두 부분과 같다. 의지는 집의 기초이고, 이해성은 기초 위에 세운 상부 구조이다.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 주님의 진리 위에 정착시킬 때, 한 마디로 그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이 영위될 때 반석 위에 집은 건설되는 것이다.

모래

“모래”란 의지로 사랑됨이 없이 기억이나 지성 속에 놓여 있는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나 모래는 똑 같은 재료인 돌로 구성되어 있다. 둘 다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있지만, 모래는 과거 수많은 세월 동안 큰 바위가 서로 결집된 상태가 흐트러진 죽은 해골 같은 돌들이다. 바위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우리 마음에서 결합되고 응고되어 서로 단결되어 있는 생생한 진리와도 같다. 이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원리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분자는 서로 풀리어 있어 서로가 접합하고 있을 뿐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서로 옆에 놓여 있는 상태이므로 기반을 주지 못하는 기억이나 지성 속의 진리들과 같은 것이다.

의지에 기초를 둔 진리, 즉 진리에 의거 살고 있는 믿음이라는 반석이 아니면 단단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6장 49절에서는 더 뾰족하게 서술되는데,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우리의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반석이란 진리를 살아 내는 믿음, 즉 의지 안에 기초를 둔 진리이다. 우리가 반석 위에 영적인 집을 건설할 때 그 집이 교회인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인간 안에서, 믿음의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원리를 두지 않으면, 자아 사랑으로 흘러 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천국적인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의존하면 어떤 힘도, 안정성도, 견고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를 지상적으로 받게 될 때 그 진리는 자기에게 자기 속의 악들을 보여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악들을 끊지 못하며 진리의 실제 응용 역시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 왜, 어떻게 모래가 우리 집을 짓는데 불안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위험은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에서 온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위험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공히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버티고 다른 하나는 허물어진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별난 재주가 있기라도 해서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을 피할 뿐이다.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이란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강타하는 시험을 표현해 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것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자는 그것들 아래서 견고하게 서 있고, 악한 자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 속에서 그 강도, 기량, 성질 등등 모든 것의 상태를 조사 받게 된다. 만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주님 위에 기초를 두고 심정으로 사랑되고 있는 바, 그 믿음은 그 테스트에 견디게 되어 불 속에서 연단된 금같이 더 품질 좋은 순수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가짜 믿음이라면, 혹은 지성 속의 믿음에 불과했다면,또는 사랑이 주도해 가는데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훼손되어 쓸려 가버리고 만다.

시험 (temptation)

악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발판으로 해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꾀어 들이어 유전적인 우리의 악한 성질(propensity)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악한 영향력과 맞서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리의 믿음이 지성 속에만 있을 경우, 천사들은 생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고, 만일 우리 심정이 악과의 대결에서 포기된 상태이면, 악령은 심정에 다가가서 애정을 수단으로 우리를 끌고 가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정이란 언제나 전진 방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애정과 이견을 보인다 해도 애정은 지성을 점진적으로 장악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천사들이 우리의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려면, 우리는 믿음에 속한 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한 만큼 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악한 기질까지도 우리를 장악할 힘을 어떤 시험 속에서도 갖지 못한다.

시험은 모든 이에게 온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있어 시험은 자신을 더 순수해지게 만들고, 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악을 더 확증하는 기회가 된다.

시험의 심한 시련이 비나 홍수, 바람이 집에 불어 들이치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비,” 이것도 물과 같이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가 광폭하고 파괴적일 때 이는 꺼꾸로된 진리, 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를 명시하게 된다.

집을 때려부술 듯 퍼붓는 비는 마음을 공격하는 거짓, 우리에게 오는 거짓 암시, 속임을 당하게 만드는 거짓들, 악령에서 나와 마음에 오게 되는 각종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악에 대한 유전적인 자연적 경향성을 흥분시키는 것들까지도 비가 표현해 준다.

홍수

시험 속에서 이런 거짓 암시들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차츰 이 암시들의 부피가 증가해 간다. 자연계에서 오래 계속되고 무거워진 비가 홍수를 야기시키듯, 시험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이 거짓 암시라는 사악한 비는 처음에는 조금 들어오지만 차차 거짓을 축적해서 이를 부풀려 홍수를 만들고, 넘칠듯 넘실거리는 홍수와도 같이 돌진하여 그나마 우리 속에 남아 있던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바람

비에는 바람이 흔히 동반한다. 비와 동반하는 바람이 세어지면 폭풍이 되는데, 이는 거짓이 생각에 관계하여 있어지는 독특한 모습들을 표현해 준다. 폭풍은 비나 홍수보다 더 미묘함을 가지고 은근히 강타하게 된다. 바람은 모든 틈새나 구석까지도 침투해 들어와 약한 모든 구석을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고 만다. 바람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오나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거꾸러트린다.

단어의 차이점

번역 성경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한다. “부딪치매, beat”라는 단어는 두 집의 경우 똑같지는 않다. 반석 위에 지은 집에 있어지는 부딪침은 약한 부딪침, 엄습함, fall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 같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때려눕힘, beat upon, 또는 때려부숨, dash against가 더 나을 것 같다고 본다. 시험 기간 동안 거짓들은 악한 마음에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광폭하게 돌진하여 그 속에 잔류한 선과 진리들을 모두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선 자체에게는 아주 약한 광폭함을 가지고 다가와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 더우기 거짓은 거짓을 초대한 우리의 악한 성질을 광폭하게 끌고 가 버린다. 그래서 선한 자의 경우, 엄습한 폭풍인 시험이 끝나면 선한 자 속에든 악한 기질이 그만큼 더 사라진 결과 달콤한 평화가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영적 폭풍의 근원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인간 안에서 지으시되 “죽음도 감히 누르지 못할” 살아 있고, 사랑받는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지으신다. 이는 우리에게 광폭한 시험의 근원을 암시해 주게 된다. 시험은 성난 폭풍이고, “지옥문”으로부터 돌진해 나와, 우리 속의 악들이나 악한 기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그 이유는 지옥의 것과 우리 속의 악한 성질과는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험을 수단으로 악령은 우리의 영적인 집을 파괴하거나 유인해낸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위와 같은 폭풍은 선한 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고, 더욱이 주님의 경우는 “분노한 자로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함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함을 허용받는 계기가 된다. 시험 중에 선한 자는 더 굳건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이 거듭나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들 안쪽의 사랑들이 시험을 야기시키는 주범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유전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집은 영계에서 세워진다

인간의 영은 언제나 영계에서 사는 바, 우리 안쪽의 집 어디에 계속 건축되어 가고 있을까? 물론 영계이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슬기로운 자이어서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같다고 했다. 사실 영적으로 보건대 슬기로운 자는 “…사람 같다”가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영적인 반석 위에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인 모래 위에 짓는다.

본문은 영적인 사항에 관해 글자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선한 자의 안쪽에 있는 집은 실제로 천국에 짓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게 아닌 내향의 상태(inward stat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각자에게 자기 집에 대한 소유권을 100% 획득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시험 동안에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게 될 천국 쪽에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옥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뜻을 같이 한다. 따라서 악한 자는 자기들의 집을 지옥에다 실지로 짓고 있다.

반석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에 견디고 무너지지 않는다. 즉 자기 의지 속에 기초한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에게 생명과 도움을 구하고, 받기 때문에 어떤 시험, 죽음까지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는 바, 그는 악령과의 대적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무너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에 노출되면 무너진다. 여지없이 무너진다. 즉, 진리를 알고 이해하되 마음 안쪽에서 악을 흠모하는 이들은 시험 동안에 무너진다.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있어지는 지식이나 이해성의 남용으로 인해 스스로 “더 큰 단죄를” 자초한다. 그 무너짐이란 아주 크고, 완전한 무너짐이다. 이 무너짐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경미한 거짓의 수준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미한 거짓이 반복되어 가다 보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라는 크고 강한 급류로 돌변해 간다. 이 급류의 원인인 억수 같은 비는 진실로 크게 무너지는 것, 영적인 것을 완전히 침식하여 영적 인간을 영원히 멸해 축축한 무덤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인격

실제로 사용된 진리만이 참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업무는 우리의 주님이 거하실 집을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지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야생 동물이나 불결하고 보기 싫은 새들이 거할 굴을 짓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애정들은 우리 안쪽의 집을 짓는데 쓰여지는 품질 좋은 재목들이다. 모든 진정한 생각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돌이다. 그 반면 우리 속의 악한 애정은 벌레 먹은 재목이요, 모든 거짓 생각은 인간이 찍어 만든 벽돌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을 잘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계산할 수 있게 섭리해 두셨다. 이 건축의 실제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자는 주님의 계획대로 집을 짓는다. 슬기로운 자는 온 정성을 가지고 재료들을 선발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서 집을 지어 간다. 그러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손에 편리할 듯 싶은 재료이면 선뜻 선택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감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 고정된 원리들이다. 원리를 가지고 뭔가를 실현하지 않고는 고정된 원리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생각함, 선을 사랑함들이 한 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지침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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