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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as Choir]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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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25.
Seoul IYF Center

[Conductor] Boris Abalyan
*Graduate of the Glinka College and St.Petersburg Conservatory
*Awarded Special Conduction Prize at the Choral Competition in Marktoberdorf(Germany)
*Participated in many prestigious choral competitions as a conductor and a jury member
*Currently serves as a professor at the St.Petersburg Conservatory
*The head conductor of Gracias Choir
* Gracias Choir \u0026 Orchestra
Gracias!
\”Gracias\” is a Spanish word that means \”Thank you.\” The Gracias Choir sings songs of thankfulness with the love they have received in their hearts. Formed in the year 2000, the Gracias Choir is moving the hearts of many people along with Gracias Music at Mahanaim in New York and the Gracias Music Preparatory School in Korea with endless challenge, change, learning, and improvement.
– 2000 Established
– 2009 Grand Prize at the Jeju International Choir Festival
– 2010 Grand Prize at the Busan Choral Festival \u0026 Competition
– Many oversea performances in the Sydney Opera House in Australia, Madison Square Garden in New York, and Haydn Hall of Esterhazy Palace in Eisenstadt, Aus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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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누가복음 24:13-35)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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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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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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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엠마오 로 가는 두 제자

  • Author: Candlest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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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3. 4.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eJ6n30OF6g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24:13-35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을 앞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앞에서는 언급만 했을 뿐이며(막 16:12) 여기서 비로소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 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그 날 일어났다.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9절 말씀으로 보아 그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였다.

(1) 두 제자의 목적지와 대화 내용: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2시간 쯤 걸리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갔다(13절).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아침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들은 허탄한 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1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2)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매 그들은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절).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인양 우연히 같은 길로 가게 된 것처럼 꾸며 함께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러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오셔서 그들 중의 하나가 되신다. 이같이 신앙과 사랑이 잘못된 두 사람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삽겹줄”이 된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면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 보지 못하거늘(16절). 어쨌든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훨씬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그리스도는 그들을 알고 계셨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하고 주고 받은 대화:

친구들이 신분을 감추거나 변장을 하고 만났을 때처럼 그들도 여기서 질문을 주고 받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처음 하신 질문은 그들이 슬퍼하고 있는 데 대한 것이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① 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잃었으며, 주님께 걸었던 기대가 무너져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본을 포기했다. 그래서 무슨 수로 그것을 보충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도 슬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좋은 친구와 좋은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슬픔을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정을 되찾게 된다. 같이 울어줌으로써 서로 위로를 받는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②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다.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귀의 상태로 들어가셨지만 자기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아시며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보고 괴로워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교적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다. 지나치게 소심한 것보다는 건전하나 사고를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 또한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슬픔 가운데 있는 친구를 발견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슬픔을 알아 주도록 하자.

2) 그 일을 알지 못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물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 글로바가 그리스도께 정중하게 답변했다. 우리에게 정중한 자들에게 우리는 정중해야만 한다. 그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글로바는 이 낯선 사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우리 주님이 당하신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 주고 싶어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걸 보고는 그냥 두지 못했던 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자들이 예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을 쓰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글로바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소란해졌으며, 거기 살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대답하는 대신 그리스도는 그들이 아는 바에 대해 물으셨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19절). 이렇게 해서 자신을 더 낯선 사람처럼 꾸미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예비되어 있는 기쁨에 비하여 자기가 받으신 고통을 가볍게 여기셨다. 그가 얼마나 태평하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뒤돌아보는지 살펴 보라. 그분에게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그분에게는 너무나 쓰라리고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이뇨’하고 묻는다. 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였다.

19절 이하에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잘 살펴 보라.

① 그들의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요약 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이며,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선생이셨다. 그는 영광스러운 이적 곧 자비의 이적을 많이 베푸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②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③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그분께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를 기대하였다. 바라는 것이 늦어지면 실망하게 되지만 바라던 것이 무너지면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써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마치셨으므로 그들은 어느 때보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④ 그들이 지금 놀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다시 살아나셔서 사흘 전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던 것 같이 영광 중에 모습을 드러내시리라고 기대했던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대단찮게 말하고 있다(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지 그들이 환상을 보았을 뿐인 것 같습니다. 왜 흔히 여자들은 그런데 쉽게 빠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도들 중 몇 사람도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으셨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모두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⑤ 주님은 얼굴로 그들에게 알리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 그는 구약을 잘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셨다. 악한 자라는 뜻이 아니고 연약한 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미련하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디 믿으며 한번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선입견으로 멀리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좀 더 정통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만큼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정통하다면 가끔씩 우리를 사로잡는 당혹함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그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로는 그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오해를 벗겨 주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신다.

첫째, 메시야는 이런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고난은 그가 메시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가 메시야됨을 실제로 증거하는 것이다.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결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이런 고난을 당하신 다음 그는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그는 부활하실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것을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생기기 전 그에게 있었던 바로 그 영광이다. 그는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그런 다음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우리에게도 먼저는 가시 면류관을 그 다음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하라고 명하신다.

㉢ 그는 구약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셨다(27절).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자기가 받은 고난을 통해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모든 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산재해 있다. 예언이든지 약속이든지 기도든지 또는 다른 형식으로든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얻지 못하고서는 성경 어느 부분도 통달할 수가 없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천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섭리에 따라 그때는 막연했지만 지금은 장막이 벗겨지고 신약이 구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시다. 특히 자기에 관한 성경에 있어서 성경을 연구할 때는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점차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니께서 얼마나 빈번하게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족장들에게 아들에 관해서 말씀하셨으며 또 그 족장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좋다.

(4)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나 성경 강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았어야 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설교와 강해가 퍽 마음에 들어서 여행이 빨리 끝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1) 그들은 예수께서 함께 머무시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8절). 예수께서 더 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함께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는 더 가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초청하며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일을 멀리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강권하여 말했다. 함께 유하사이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을 맛 본 자들은 더욱더 그것을 열망하게 되며,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동행해 주실 뿐만 아니라 밤 중에도 함께 계셔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예수는 그들이 조르는 바대로 들어 주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29절).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간청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계 3:20).

2)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31절).

그는 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계속하신 것 같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식사 준비는 곧 끝났을 것이며, 그 식사는 빈약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즐겁게 해 주셨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과 내내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 즉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자 비로소 그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이적적인” 음식도 아니며 성만찬에서와 같은 “성례적인” 음식도 아니다. 단지 보통 음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취하심으로써 특별한 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섭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라고 가르치신다. 음식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식탁의 상좌에 모시며, 음식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자. 그가 떼어 주신 음식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받도록 하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줄 보게 되었으며 그를 알아 보았다. 안개는 걷히고 장막은 벗겨졌으며 그분이 주님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실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은 틀림없이 그분에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과 은혜로 자신을 알리신 방법에 주목하라. 그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여심으로써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신다. 계시를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된다.

3) 그리스도는 저희에게 얼핏 보이신 후 가버리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순간적으로 보게 된다. 즉 우리가 그를 보지만 잠시 후에는 다시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5)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1) 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받았던 느낌을 각자 돌이켜 본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이 비록 설교하시는 분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게다가 그 설교로 인해 그들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빛”과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다. 내내 자기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셨던 분이 바로 자기들이 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자 비로소 이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유익한 설교일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와 같이 단순한 설교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성경적인 설교여야 한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성경으로 자기들의 지식과 신앙의 원천을 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만 유익한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며, 그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생겨나며, 거룩한 소원에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진다.

2) 그들은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했다(33절).

그들은 곧 그 즉시로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시자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강건케 하며 그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만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이루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신 바 된 사람들이 당연해 해야 할 의무이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 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가서 그 기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① 그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열 한 사도와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자들이 밤 늦게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이 두 사람이 들어가자 기쁨과 환희에 차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해 주었다(34절).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본 사실은 고전15:5에 나타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는 여자들에게 그 사실을 특별히 베드로에게 전해서 그를 위로하라고 명령했다(막16:7). 또한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바로 그날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베드로가 그 사실을 전하며 자랑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기뻐하며 말한 사실이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② 그들이 본 것을 말함으로써 부활의 증거를 더 확실히 했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길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서는 길에서 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인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마침내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이주일의 설교(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우리들의 이야기(눅 24:13~35)

예수 부활을 믿으면 담대해집니다

변화된 제자의 모습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더라”(눅24:35)

▲ 김태일 목사

들어가는 말

2013년 부활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있었던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과거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도 사도들과 끝까지 함께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13절)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 성을 등지고 떠나 서쪽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로 가야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마 28:7, 10)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 북부 지역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동쪽에 있는 여리고 성으로 돌아가거나 북쪽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이와는 전혀 반대 방향인 서쪽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들었으나 (22절~24절) 믿지 못하고 동쪽이나 북쪽이 아닌 서쪽 엠마오로 갔던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과거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이제 이런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따르셨습니까? 교회 다니는 분들께서 과거에는 열심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함없이 주님을 끝까지 헌신하며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인생 끝날까지 변함없이 따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현재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절망과 실의에 빠져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2절~24절) 2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두 사람을 꾸중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는 사람들로서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절망과 실의에 빠질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역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 글로바 이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제자가 만일 나라고 하면, 식탁에 앉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가 다 한 순간에 봄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고통이나 아픔이나 실망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소망과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히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믿으면 이처럼 낙심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2013년 부활절 기간에 이런 놀랍고 기쁨이 넘치는 은혜를 맛보아 아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33절에 보면 이 두 제자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부활을 믿게 되자 그 즉시 부활의 증인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이후에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36절 이하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열한 제자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번 더 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120여 명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 중 대표적인 성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되돌아 간 예루살렘 성은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도시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아직 그대로 권세를 잡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인 로마의 군병들이나 그 군중들이 그대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이처럼 담대해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고 증거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해서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왜 그렇게 담대했습니까? 부활 신앙 때문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으므로 믿음의 선조들처럼 담대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현재는 어떻습니까?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변화된 모습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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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상세 본문

어릴적 교회에서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쉬운 기타 코드로 구성된 이 곡은 두 사람이 화음을 맞추기에 손색없는 곡으로 교회 찬송 경연대회에 자주 등장했던 곡이었습니다.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로 알려진 이곡의 본래 제목은 ‘엠마오의 두 제자’ 이고 작곡자는 한국 교회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본향을 향하네’의 고)김두완 박사였습니다.

어릴 때는 음을 뽐내느라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이 곡은 성장하면서 종종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엠마오는 어디이며 두 제자는 왜 그곳으로 가던 중이었을까?

작곡자는 왜 그들이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다 표현했을까?

노래는 개인의 간증이든, 성경의 이야기든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엠마오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地名)이고 그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을까

두 사람이 엠마로로 가던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부활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무참히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여러차례 이야기 하셨고 유대인들 조차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무덤앞에 돌문을 막았건만 정작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러 마리아 중 한명의 남편과 같은 이름이지만 동일 인물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알던 제자들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른 제자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뿐 아니라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자주 나오지도 않는 예수의 제자들도 다 흩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엠마오로 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에게 그들은 예수신줄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분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정치적인 예수로만 그분을 이해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정치가는 힘을 잃은 순간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무도 그들곁에 있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며 엠마오로 떠났던 것입니다.

가서는 안될 곳 엠마오

성경에 등장하는 곳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60스타디온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위치는 불명확합니다.

엠마오는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고향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있던 대상이 사라지자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에 부활절을 보낸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수십번의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 두 사람 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가곤 합니다.

여전한 걱정과 절망, 그리고 불안과 초조로 가득한 삶으로 여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빨리..

부활을 몰랐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알고 부활절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줄 아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며 절기행사를 치루듯 아무 감동과 감사 없이 그날을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누구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치 예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예수남께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과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이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무턱대고 읽는 것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주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분의 전화는 온통 질문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질문에 대한 답을 서로 찾아가며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집회금지명령에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예수의 보혈이 나를 덮고(cover)있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다고 말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목사는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보혈이 나를 덮는다고 표현한 그분은 마치 마블 영화처럼 어떤 외부의 공격으로 부터 나를 지켜주는 쉴드로 보혈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혈액입니다. 혈액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고 심장을 뛰게 합니다. 보이지 않게 일하며 서로 역할을 감당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내 안에 흐른다는 것은 내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말하는 회사의 CEO보다 더 엄청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요, 가치관이요 인격이요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혈을 흘려 주시고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피로 (수혈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예전의 엠마오로 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예수님의 탄생은 매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도 매일입니다. 부활하신 영광도 매일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절기에, 명절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의 고통과 예전의 걱정 근심, 예전의 소망이 없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이번주가 바로 그 시작입니다.

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영성칼럼]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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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두제자, 글로바와 마리아 부부/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셨다/

윤사무엘 박사

【뉴스제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대해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의 기사를 말하고 있습니다(눅 24:13-35, 막 16:12-13).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고 제자들인데 부부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글로바(Cleopas, 눅 24:18)와 마리아(Mary, 요 19:25)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25리(11km, threescore furlongs) 되는데, 오늘날 “엘 쿠베이베”(El-Qubeibeh)가 성경의 ‘엠마오’(뜻은 “작은 온천샘”)라고 여겨집니다.

부부는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두 사도가 주님의 무덤을 다녀온 이야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주님의 시신을 도난당했다고 생각하고 슬픈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실 때, 두 제자들은 몇일 동안 있었던 일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파악하시고,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해 전하셨습니다.(눅 24:26-27)

그들이 큰 은혜를 받고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자기들의 집에 주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 풍조는 나그네를 위해 집주인이 식사 기도하며 축복을 하는데, 이들은 주님께 식사기도를 부탁했고, 주님께서 빵을 집어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곧바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영체이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이 가정에 계셨습니다.

글로바와 아내는 서로 말하기를, “주님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는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같이 모여 말하기를, “주님께서 참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는 것을 보고, 엠마오에서 다시 돌아온 글로바와 아내가 길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그분께서 자기 집에서 빵을 떼실 때에 자기들이 그분을 알게 된 일을 보고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과 귀경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한가운데 서서 문안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halom eleyke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자기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기에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하시니,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과 꿀 한 조각을 드리매 주님께서 그것을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김두완 작곡, 작사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생각하며 부르곤 합니다.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

2.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

우리도 코로나로 절망과 슬픔, 공포와 불경기, 분열과 격리의 현장에서 방향을 바꾸어 부활과 예배, 소망과 기쁨이 있는 교회로 돌아와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윤사무엘 목사(겟세마네교회 담임 / 겟세마네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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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Korean Church in Cambridge

4/10/2016 | 부활절 셋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On the Road to Emmaus)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24:13-27

13 그런데 그 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4 이들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5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습니다.

18 그 가운데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이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게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22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지만

23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구나.

26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27 예수님께서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를 들어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쉬운성경)

오늘 읽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 말씀은,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이 “성경 한 장 한 장 다 찢어 없애 버린다고 해도 이 말씀만 있으면 상관이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1779)’ 가사를 쓰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 자신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갔을 때 그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찬송 가사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질 찬송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2002년에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영국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영국)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나왔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21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 법안을 영국 의회에 제출합니다. 숱한 반대와 모함을 당하다가 마침내 1833년에 이 법안이 영국 상원의원을 통과합니다. 무려 46년만에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된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이런 윌버포스의 집념이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존 뉴톤 목사는 윌버포스의 멘토 역할로 나옵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끝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는 소식까지 듣고,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이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아 이미 예수님를 따르던 제자들이 흩어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12제자는 그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제 머리 속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과 성경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딱히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아니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이런 이유들도 저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히브리서를 강해했습니다. 저에게는 히브리서를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들으면서 지루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의 제사 제도와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어 가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히브리서 13:13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 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라고 나와 있습니다.

‘outside the camp’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성 밖을 말합니다. ‘inside the camp’는 예루살렘 성 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outside the camp’는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그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도 그 자리로 가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수치를 함께 당하자고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현장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라는 것입니다. ‘inside the camp’가 성공과 야망과 출세와 인기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outside the camp’는 고난과 희생과 수치를 당하는 자리입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런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로 가서 예수님처럼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서 말씀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지금 ‘outside the camp’를 떠나 ‘inside the camp’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는 두 제자의 모습이 저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보였습니다.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쿼바디스 (Quovadis)’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폴란드의 영화 감독 에르지 카발레로비치가 이 영화를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네로 시대에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서로 주고 받고 있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습니다 (17절). 두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십니까?” (18절) 예수님은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지금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오늘 아침 일찍 무덤에 갔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제자들이 무덤으로 갔었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의 글과 메시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글들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 그렇지만, 메시아는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을 일일이 말씀을 찾아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이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다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해 주실 때에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32절) 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설교자인 저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참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저녁 식사 후였으니까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제자들은 그 밤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살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이기적인 삶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으로, 예전의 생활 (the old life)에서 새로운 삶 (the new life)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하면, ‘inside the camp’에서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없이, 그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로 ‘inside the camp’에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outside the camp’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편안한 곳이 아니라 고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거기는 성공이 보장된 곳이 아니라, 수치와 모욕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바뀌어진 이 새로운 삶의 방향이 아직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두고 있던 희망이 꺾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이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 생활을 접고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한 곳을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나름대로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아니,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너희가 떠나 온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 골고다 언덕,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내가 고난과 수치를 당한 곳, 바로 그 자리가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다시 돌려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되어 있구나!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로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요한복음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inside the camp’에 계시지 않고, ‘outside the camp’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inside the camp’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해 주는 자리, 그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나와 함께 수치를 당하자!”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말씀에 응답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기고, 우리 교회에게 소망이 생깁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몰라보다니요! 잠시 스쳐지나갔던 거리의 행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내가 응원한 팀이 지고나서는 응원했던 이들은 허탈하게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스포츠에 일희일비하는 소견 좁은 사람이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요. 그리고 며칠 뒤에는 머릿 속에서 패배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아니, 아예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거지요.

예수님을 싸고 있었던 세마포는 보았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아직 만나보지는 못했던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믿기지 않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나는 원래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수에 목매어 살던 사람도 아니고…”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괜히 예수라는 사람에게 얽혀서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튈까봐 모른 척하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은 불과 며칠 만에 예수님을 까맣게 잊어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몇몇 열렬한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했지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도마는 부활의 소식 앞에서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겠노라고 공연히 말했습니다 (요 20:24-29).

도마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또 한 무리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지요 (그 중의 한 명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합니다 (18절)). 엠마오로 가는 그들에게 한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어요. “낯선 사람”이라고 제가 표현하기는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로 낯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존경하는 선생님(랍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몰라보다니요!

엠마오의 교회 터에 걸터 앉아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부활 하신 예수님을 상상하고 있다보니, 예수님이 참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토록 그 분의 “주님”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주었지만, 감히 “제자”라고 불리던 자들이 하는 말이라는 것이 “나사렛 예수는 말과 일에 능했던 선지자” (19절) 였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도 아니고,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구약 시대에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와 같은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왔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던들 그 분이 불과 사흘 전에 돌아가셨던 “그 분, 예수님”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 수 있었을까요? 그저 달변이어서 율법학자와 서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절대로 지지 않고, 성경을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기적도 행하는 “유다 땅의 유명 인사”로 예수님을 이해했고, 그런 예수님과 남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다닌다는 것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는가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을리가 만무합니다.

자신들이 바랬던 예수님의 상(21절)은 있었지만, 예수님이 바라셨던 믿음과 신앙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무지함을 보면서, 저도 참 부끄럽습니다. “과연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바로 “나” 인가?”하는 질문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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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설교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눅2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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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설교문 중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눅24:13-20)

♣명제: 엠마오로 가는 자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을 대변하고 있다.

♣목적: 현재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으로 엠마오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안식일에 무덤에 들어가게 됩니다.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난 주일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몸을 씻겨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씻겨드리기 위해서 무덤에 갔던 자들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놀라 예수님을 장례 했던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보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확인하고 빈 무덤을 보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도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신앙의 자세도 고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일까요?

첫째, 엠마오로 가는 영적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눅24:13-14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나 되는 마을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주일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자들입니다. 이 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엠마오로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왔다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장사 지낸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때문에 엠마오로 가지 못하다가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 Εμμαους(엠마우스 1695) 엠마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ים(옘 3222) 온천, 따뜻한 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יום(욤 3117) 낮, 날, 일평생, 생일, 영원히,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을 보면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엠마오는 ‘따뜻한 우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현재 제자들은 모두가 정신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평생 자신과 함께 있을 것과 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은 하셨지만 제자들의 신앙은 육체의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부활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회복시켜주시고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내 주시는 부활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빈 무덤을 보고 다들 놀랍게만 여기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것과 무덤에서 살아나신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육적인 것에만 생각하고 맞추기 때문에 나의 주로 고백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에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엠마오의 뜻을 통해서 깨달은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고통의 죄악 가운데 있던 모든 죄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엠마오는 따뜻한 온천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물은 따뜻한 온천과 같은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모든 물들이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심령이 죽은 영혼들을 주님의 따뜻한 십자가 진리의 복음으로 녹여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임하면 녹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주님의 이야기를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심령은 따뜻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 속에 임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하여 말씀을 들려주었을 때에 차가웠던 심령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에는 매일 주님이 함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온천과 같은 주님의 사랑과 말씀이 나를 떠나지 않고 일평생 함께 하여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태양이 되어 주셔서 어둠이 사라지고 영원히 생명 되신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 이 날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생일과 같은 날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영적 생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과 믿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영적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같이 주님이 함께해주시고 영원히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고 있다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입니다. 아직 말씀만 알고 있지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하여 깨닫게 해 주셨을 때에는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엠마오로 가면서 주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눅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서로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사 지내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도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옆에서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도 함께 그들 중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현재 동행하고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육적인 구원자로만 알고 있으면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전 영적인 눈이 열려있지 않으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이 가려져있다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나’ συμπορευομαι(쉼포류오마이 4848) 동행하다, 함께 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주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사건을 목격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도 함께 계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함께 계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들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엠마오로 갈 때까지 함께 해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두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동행하시면서 이들을 보호하시고 영적인 눈이 멀어있는 것을 직접 뜨게 해 주셔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나와도 이렇게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세전에 선택하여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영원한 천국에 갈 때까지 함께 동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리워져서’ κρατεω(크라테오 2902) 체포하다, 붙잡다, 꽉 붙잡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κρατος(크라토스 2904) 힘, 능력, 세력,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눈이 가려졌다는 것은 사탄의 세력에 의하여 강하게 붙잡혀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도록 감옥에 감금되어 체포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눈이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미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가 있는 것처럼 눈이 멀어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아담이 먹음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의 미혹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깨달으려고 해도 깨달을 수 없도록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통하여 이런 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눈이 멀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열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는 상태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눈이 멀게 된 것은 외부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하와도 뱀의 미혹에 빠져서 눈이 멀어지게 되었고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들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영원한 죽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시니 예수님을 보게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셋째, 제자 중에 글로바라는 인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눅24:18-20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글로바라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하고 있는 관심 주제에 관하여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두 사람들이 슬픈 얼굴을 하고 머물게 됩니다. 그중에 한 명인 글로바가 예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도 이런 중요한 사건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큰 충격이었고 부활하신 사건도 엄청난 파장을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자 글로바가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글로바’ Κλεοπας(클레오파스 2810) 글로바,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κλεος(클레오스 2811) 영광, 칭찬, 이라는 뜻과 πατηρ(파테르 3962)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글로바는 ‘영광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적인 예수님의 사건에 관하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글로바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글로바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광의 아버지를 찬양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권적으로 눈을 열어주셔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이름을 생명 책에 기록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교회생활을 하면서 글로바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와 사건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육적인 신앙에 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신앙은 달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엠마오입니다. 엠마오에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 엠마오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 중심과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을 엠마오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뜨거운 은혜가 넘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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