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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주석 | 2021-07-13 새벽예배 (히브리서 강해 – 히브리서 2장) – 박한수 목사 모든 답변

2021-07-13 새벽예배 (히브리서 강해 - 히브리서 2장) - 박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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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의원이 발의한 반헌법적이고 자유를 침해하고
역차별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악법 중에 악법인
평등법(차별 금지법)을 반대해 주시기 바라며,
주변에 널리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5백만명 반대 합시다.
🚨평등법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한 일간지 광고비 후원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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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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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3 / 히브리서 2장
[ 제자광성교회 ] 박한수 위임목사
제1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로 462 (정발산동 1140번지)
제2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하늘마을1로 72 (베스트요양원 옆)
전화번호 : 031-975-4004, FAX : 070-8277-2525
헌금계좌 : 301-0170-1798-71 (농협, 제자광성교회)
홈페이지 : http://www.jejak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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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참여하고,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래세대후원 전용계좌가 개설되었습니다.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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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용 계좌 : 301-0277-1597-91 (농협,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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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히브리서 2장 주석 … 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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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26/2021

View: 9703

헬라어 히브리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성 경: [히2: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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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6/13/2022

View: 6938

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02장

2:1 구원의 확증(히브리서 2:1-4)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하여 아주 논리적으로 내용을 … 전 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제정한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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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9/27/2021

View: 8367

히브리서 강해 – 옛신앙

히브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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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2/19/2022

View: 6917

[히브리서 2장 – 교사용]

예수님의 탁월함? ] [ 2장 5절부터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됨: 그리스도의 성육신 ]. 7. 앞 장에서 예수는 천사보다 더 뛰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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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9/30/2022

View: 7485

두란노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2장에 대한 주해와 적용 … 우리는 주석할 때 멀리 있는 문맥보다도 가까이 있는 문맥, 특히 그 단어나 표현이 속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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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6/6/2022

View: 7630

성서연구 – 히브리서 2장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이, 그 교회 공동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대한 것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가리키는지 아니면 정말 율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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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2/13/2021

View: 2989

히브리서 2장. 하나님의 큰 구원_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히브리서 2장에서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된다. 특히 구원사역과 관련된 천사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장차올 세상올 천사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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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unmill.tistory.com

Date Published: 5/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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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4 (히브리서 2장 요약, 히브리서 2장 1절

히브리서 강해4 (히브리서 2장 요약, 히브리서 2장 1절~4절, 구원을 소홀히 여김, 큰 구원,하나님의 증언, 완전함에 이름, 성육신,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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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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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설교말씀] 구원의 확증(히 2:1-18) – 알쓸잡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2장 설교말씀 중에서 구원의 확증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주간의 찬송 : 221 (나가난 복지 귀한 성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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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123.tistory.com

Date Published: 10/27/2022

View: 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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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3 새벽예배 (히브리서 강해 - 히브리서 2장) - 박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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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히브리서 2장 주석

  • Author: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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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7.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PhXoqOAwSg

히브리서 2장 주석

히브리서 제 2장

=====2:1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앞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따라서 이것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 보

다 우월한 존재이므로’라는 의미이다.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들은 것’의 헬라어 ‘아쿠스데이

신'(* )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

적인 계시 즉 ‘복음’ 혹은 ‘케리그마’를 의미한다(Bruce, Lane, Morris).옛 계시는 모

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

를 통하여 직접 임한 것으로서 옛 계시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다(Bruce).

한편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페릿소테로스 프로세케인'(*

)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며, 전해주신 복음이 온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상고해야 함을 강조한다(Hewitt).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 ‘흘러 떠내려갈까’의 헬라어 ‘파라뤼오멘'(*

)은 ‘흘러가다’ 혹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의 의미로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린는 것을 시사한다(Lane).

이것은 성도가 복음의 진리라는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위험하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Westcott).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 이것은 모세가 시내(Sinai)산에서 하나님께

로부터 받은 율법을 암시하고 있다(갈 3:19).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

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의 오른편에 함께 하였

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1세기의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율법을 전해준 천사에 대해 설명했으며(Antiq XV. 36),랍비들도 율법과 관련된 천사들

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사들이 율법을 전해주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Lane,

Bruce).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과 바람을 계시해 주었고 율법 안

에 제시된 모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Robinson).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 ‘순종치 아니함’의 헬라

어 ‘파라코에'(* )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것으로(TDNT)

‘범죄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도적(意圖的)인 거절을 내포한다(Lane). ‘공

변된’의 헬라어 ‘엔디콘'(* )은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

)과 법정 용어인 ‘공의’를 의미하는 ‘디케'(* )의 합성어로서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보응’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다포

도시안'(* )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으로 율법

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리대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행위를 시사한다

(롬 2:2-12). 하나님께서 옛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에 대한 범죄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는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 ‘큰 구원’이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의 구원 사역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시사한다(Bruce, Morris, Hewitt). 한편 ‘어찌 피하리요’로 번역된 헬

라어 ‘포스 에크퓨크소메다'(* )는 수사적 의문문으

로서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은 그리스도보다 열등

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무시하게 되면 율법을 통해 시행되었던 공의의 심판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주로’에서 ‘로’의 헬라어 ‘디아'(*

)는 ‘…을 통하여’의 뜻을 갖는 전치사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

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낸

다(Morris).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들은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

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서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증거해줄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Lane). 한편 ‘확증한 바니’의 헬라어 ‘에베바이

오데'(* )는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

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2:4

하나님도…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본절은 ‘큰 구원'(3절)과 상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에 대해 함께 증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함께 증거하셨느니라’의 헬

라어 ‘쉬네피마르튀룬토스'(* )는 ‘쉰'(*

, ‘…함께’)과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가 결합된 이중

합성어이다. 예수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

께 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표적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오이스'(* )는 ‘표시’,

‘증거’, ‘표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적

의 의미, 곧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Morris, Lane, Hewitt).

기사들 – 이로 번역된 헬라어 ‘테라신'(* )은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표적’과 함께 나타난다(마

24:24; 막13:25; 요4:48; 행2:19,22,43; 4:30; 5:12; 6:8; 7:36; 14:3; 롬15:18; 고후

12:12). 이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로서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Lane).

여러 가지 능력 –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메신'(* )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

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

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

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성령의 나눠 주신 것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소유격으로된 ‘성령

의’를 목적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

(갈3:5). (2)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아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

주신 은사를 의미한다는 해석(고전12:11).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나님

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Morris,

Hewitt).

=====2:5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에 해당

하는 헬라어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

)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

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Lane, Bruce,

Hewitt).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

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

조되었기 때문이다.

=====2:6,7,8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

다.(Hewitt, Robertson, Morris).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

시나이까 – ‘사람’과 ‘인자’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

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

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Morris, Hewitt).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 휘오스 안드로푸)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인자'(* ,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

않다.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

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Lane, bruce, Hewitt). 한편 ‘생각하시며’의 헬라어 ‘밈네

스케'(* )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

하시나이까’의 헬라어 ‘에피스케프테'(* )는 ‘조사하다’혹은 ‘방

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저를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

힘'(* )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

사들'(* , 파르 앙겔루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

(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

으나(Westcott)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

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빌 2:7,

Morris).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의 헬라어 ‘에스테파노사스'(*

)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

(Hewitt).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

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

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

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

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

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

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저에게'(* , 아우토)

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ruce, Lan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

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

문이다(6절).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

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Hewitt).

‘아직’의 헬라어 ‘우포'(* )는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Michel, Lane).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

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

지 못한다 할지라도(마4:8,9; 엡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2:9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

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

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

에서는 ‘잠깐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퀴 티'(* )를 7절과 다

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한편 ‘인하여’의 헬라어 ‘디아'(* )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

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빌 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

추고 있다(Morris, Lane).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

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심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

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판토스'(*

)에서 ‘판토스’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

Morris, Bruce, Robins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

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

혜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카리티 데우'(* )는 몇몇 사본에 ‘코

리스 데우'(* , ‘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

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

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

27:46; 막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

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

Jerome, Ambrose).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

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

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

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

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Lane, Morris).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의 헬라어 ‘디 혼 타

판타'(* )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

‘만물이 말미암은’의 헬라어 ‘디 후 타 판타'(* )는 ‘만

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

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Morris).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

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

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한편 ‘영광’은 그

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곤'(* )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된 ‘주'(* , 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

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또한 ‘온전케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털레이오사

이'(* )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

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29:9,33: 레8:33; 16:32; 21:10;

민3:3).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

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

미이다(Bruce).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 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

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Bruce, Morris,

Procksch).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

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

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

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

테스'(* )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 )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Phillips).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

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Hering).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

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Lane, Hewitt,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

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

성한다(Kogel, Sqicq, Michel).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

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

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

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

게 용기를 준다(11:16).

=====2:12,13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

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막 15:34;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ruce).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

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

한다(Morris).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

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 )는 사

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

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

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

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

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

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락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

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

으로 해석하고 있다(Hewitt, Morris).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

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Lane).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

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Hewitt).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 )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

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

‘메테스켄'(* )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

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

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

Lane, Morris).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 )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

음을 시사한다(Hewitt).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

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Robertson).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

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

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 )

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

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

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 )

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

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

장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Hewitt, Lane, NIV). 한

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

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Bengel, Moffatt, Westcott, Bruce, RSV, NIV). (2) 혹자

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Ambrose, Beza, KJV).

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2:17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

렌'(* )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

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

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

제사장'(* , 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

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잇음

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

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

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

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

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

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

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

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

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Lane).

헬라어 히브리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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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 투토 데이 페리쏘테로스 프로세케인 헤마스 토이스 아쿠스데이신 메포테 파라뤼오멘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새번역,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들었던 모든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을 더욱더 명심하여, 빗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어NIV,1 We must pay more careful attention, therefore,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영어NASB,1 For this reason we must pay much closer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so not drift away from it.

영어MSG,1 It’s crucial that we keep a firm grip on what we’ve heard so that we don’t drift off.

영어NRSV,1 Therefore we must pay greater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from it.

헬라어신약Stephanos,1 δια τουτο δει περισσοτερως ημας προσε&;ειν τοις ακουσθεισιν μηποτε παραρρυωμεν

라틴어Vulgate,1 propterea abundantius oportet observare nos ea quae audivimus ne forte pereffluamus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נחנו חיבים ביותר להכין לבבנו אל אשר שמענו פן ילוז ויאבד ממנו׃

성 경: [히2: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앞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따라서 이것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 보다 우월한 존재이므로’라는 의미이다.

󰃨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들은 것’의 헬라어 ‘아쿠스데이신'(*)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 즉 ‘복음’ 혹은 ‘케리그마’를 의미한다(Bruce, Lane, Morris). 옛 계시는 모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임한 것으로서 옛 계시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다(Bruce).한편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페릿소테로스 프로세케인'(*)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의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며, 전해주신 복음이 온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상고해야 함을 강조한다(Hewitt).

󰃨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 ‘흘러 떠내려갈까’의 헬라어 ‘파라뤼오멘'(*)은 ‘흘러가다’ 혹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의 의미로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린는 것을 시사한다(Lane). 이것은 성도가 복음의 진리라는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위험하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Westcott).

에이 가르 호 디 앙겔론 랄레데이스 로고스 에게네토 베바이오스 카이 파사 파라바시스 카이 파라코에 엘라벤 엔디콘 미스다포도시안

개역개정,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새번역,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효력을 내어, 모든 범행과 불순종하는 행위가 공정한 갚음을 받았거든,

우리말성경,2 천사들을 통해 하신 말씀도 효력이 있어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마땅한 징벌을 받았는데

가톨릭성경,2 천사들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유효하고, 그것을 어기거나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정당한 벌을 받았는데,

영어NIV,2 For if the message spoken by angels was binding, and every violation and disobedience received its just punishment,

영어NASB,2 For if the word spoken through angels proved unalterable, and every transgression and disobedience received a just recompense,

영어MSG,2 If the old message delivered by the angels was valid and nobody got away with anything,

영어NRSV,2 For if the message declared through angels was valid, and every transgression or disobedience received a just penalty,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 γαρ ο δι αγγελων λαληθεις λογος εγενετο βεβαιος και πασα παραβασις και παρακοη ελαβεν ενδικον μισθαποδοσιαν

라틴어Vulgate,2 si enim qui per angelos dictus est sermo factus est firmus et omnis praevaricatio et inoboedientia accepit iustam mercedis retributionem

히브리어Modern,2 כי אם הדבר הנאמר על ידי המלאכים היה קים וכל פשע ומרי נשא את ענשו כמשפט׃

성 경: [히2:2]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 이것은 모세가 시내(Sinai)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암시하고 있다(갈 3:19).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의 오른편에 함께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1세기의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율법을 전해준 천사에 대해 설명했으며(Antiq XV. 36), 랍비들도 율법과 관련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사들이 율법을 전해주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Lane,Bruce).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과 바람을 계시해 주었고 율법 안에 제시된 모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Robinson).

󰃨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 ‘순종치 아니함’의 헬라어 ‘파라코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것으로(TDNT) ‘범죄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도적(意圖的)인 거절을 내포한다(Lane). ‘공변된’의 헬라어 ‘엔디콘'(*)은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과 법정 용어인 ‘공의’를 의미하는 ‘디케'(*)의 합성어로서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보응’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으로 율법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리대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행위를 시사한다(롬 2:2-12). 하나님께서 옛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에 대한 범죄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는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포스 헤메이스 에크픀소메다 텔리카우테스 아멜레산테스 소테리아스 헤티스 아르켄 라부사 랄레이스다이 디아 투 퀴리우 휘포 톤 아쿠산톤 에이스 헤마스 에베바이오데

개역개정,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새번역,3 하물며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야, 어떻게 그 갚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 우리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 하물며 우리가 이렇듯 고귀한 구원을 소홀히 하면 어떻게 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처음에 주님께서 선포하신 것으로, 그것을 들은 이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영어NIV,3 how shall we escape if we ignore such a great salvation? This salvation, which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영어NASB,3 how shall we escape if we neglect so great a salvation? After it was at the first spoken through the Lord, it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영어MSG,3 do you think we can risk neglecting this latest message, this magnificent salvation? First of all, it was delivered in person by the Master, then accurately passed on to us by those who heard it from him.

영어NRSV,3 how can we escape if we neglect so great a salvation? It was declared at first through the Lord, and it was attest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 πως ημεις εκφευξομεθα τηλικαυτης αμελησαντες σωτηριας ητις αρ&;ην λαβουσα λαλεισθαι δια του κυριου υπο των ακουσαντων εις ημας εβεβαιωθη

라틴어Vulgate,3 quomodo nos effugiemus si tantam neglexerimus salutem quae cum initium accepisset enarrari per Dominum ab eis qui audierunt in nos confirmata est

히브리어Modern,3 איך נמלט אנחנו אם לא נשים לב לתשועה גדולה אשר כזאת הנאמרה מתחלה בפי האדון ותקים לנו על ידי שמעיה׃

성 경: [히2: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 ‘큰 구원’이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의 구원 사역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시사한다(Bruce, Morris, Hewitt). 한편 ‘어찌 피하리요’로 번역된 헬라어 ‘포스 에크퓨크소메다'(*)는 수사적 의문문으로서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은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는데 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무시하게 되면 율법을 통해 시행되었던 공의의 심판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주로’에서 ‘로’의 헬라어 ‘디아'(*)는 ‘…을 통하여’의 뜻을 갖는 전치사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낸다(Morris).

󰃨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들은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서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증거해줄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Lane). 한편 ‘확증한 바니’의 헬라어 ‘에베바이오데'(*)는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쉬네피마르튀룬토스 투 데우 세메이오이스 테 카이 테라신 카이 포이킬라이스 뒤나메신 카이 프뉴마토스 하기우 메리스모이스 카타 텐 아우투 델레신

개역개정,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새번역,4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징과 기이한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주심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4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놀라운 일들과 여러 가지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눠 주신 성령의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뜻에 따라, 표징과 이적과 갖가지 기적을 통하여, 또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어 당신의 증언을 보태어 주셨습니다.

영어NIV,4 God also testified to it by signs, wonders and variou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 distributed according to his will.

영어NASB,4 God also bearing witness with them, both by signs and wonders and by various miracles and by gifts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His own will.

영어MSG,4 All the while God was validating it with gifts through the Holy Spirit, all sorts of signs and miracles, as he saw fit.

영어NRSV,4 while God added his testimony by signs and wonders and various miracles, and by gifts of the Holy Spirit, distributed according to his will.

헬라어신약Stephanos,4 συνεπιμαρτυρουντος του θεου σημειοις τε και τερασιν και ποικιλαις δυναμεσιν και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μερισμοις κατα την αυτου θελησιν

라틴어Vulgate,4 contestante Deo signis et portentis et variis virtutibus et Spiritus Sancti distributionibus secundum suam voluntatem

히브리어Modern,4 וגם אלהים העיד עליה באתות ובמופתים ובגבורות שנות ובהאציל מרוח קדשו כרצונו׃

성 경: [히2:4]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하나님도…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본절은 ‘큰 구원'(3절)과 상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에 대해 함께 증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함께 증거하셨느니라’의 헬라어 ‘쉬네피마르튀룬토스'(*)는 ‘쉰'(*, ‘…함께’)과 ‘마르튀레오'(*, ‘증거하다’)가 결합된 이중합성어이다. 예수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 표적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오이스'(*)는 ‘표시’,’증거’, ‘표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 곧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Morris, Lane, Hewitt).

󰃨 기사들 – 이로 번역된 헬라어 ‘테라신'(*)은 가시적(可視的)으로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표적’과 함께 나타난다(마24:24; 막13:25; 요4:48; 행2:19,22,43; 4:30; 5:12; 6:8; 7:36; 14:3; 롬15:18; 고후12:12). 이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로서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Lane).

󰃨 여러 가지 능력 –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메신'(*)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 성령의 나눠 주신 것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소유격으로된 ‘성령의’를 목적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갈3:5). (2)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아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주신 은사를 의미한다는 해석(고전12:11).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Morris,Hewitt).

우 가르 앙겔로이스 휘페탘센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 페리 헤스 랄루멘

개역개정,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새번역,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영어NIV,5 It is not to angels that he has subjected the world to come, about which we are speaking.

영어NASB,5 For He did not subject to angels the world to come, concerning which we are speaking.

영어MSG,5 God didn’t put angels in charge of this business of salvation that we’re dealing with here.

영어NRSV,5 Now God did not subject the coming world, about which we are speaking, to angels.

헬라어신약Stephanos,5 ου γαρ αγγελοις υπεταξεν την οικουμενην την μελλουσαν περι ης λαλουμεν

라틴어Vulgate,5 non enim angelis subiecit orbem terrae futurum de quo loquimur

히브리어Modern,5 כי לא תחת יד המלאכים שת את העולם הבא אשר אנחנו מדברים עליו׃

성 경: [히2: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Lane, Bruce,Hewitt).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디에마르튀라토 데 푸 티스 레곤 티 에스틴 안드로포스 호티 밈네스케 아우투 에 휘오스 안드로푸 호티 에피스켚테 아우톤

개역개정,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새번역,6 어떤 이가 성경 어딘가에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 ㉠시 8:4-6(칠십인역), ‘사람’과 ‘사람의 아들’은 인류를 일컫는 것임

우리말성경,6 그러나 누군가가 어디에 증언하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해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십니까?

가톨릭성경,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영어NIV,6 But there is a place where someone has testified: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영어NASB,6 But one has testified somewhere, saying, “WHAT IS MAN, THAT YOU REMEMBER HIM? OR THE SON OF MAN, THAT YOU ARE CONCERNED ABOUT HIM?

영어MSG,6 It says in Scripture, What is man and woman that you bother with them; why take a second look their way?

영어NRSV,6 But someone has testified somewhere,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are mindful of them, or mortals, that you care for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6 διεμαρτυρατο δε που τις λεγων τι εστιν ανθρωπος οτι μιμνησκη αυτου η υιος ανθρωπου οτι επισκεπτη αυτον

라틴어Vulgate,6 testatus est autem in quodam loco quis dicens quid est homo quod memor es eius aut filius hominis quoniam visitas eum

히브리어Modern,6 כי אם כאשר העיד האמר במקום אחד מה אנוש כי תזכרנו ובן אדם כי תפקדנו׃

성 경: [히2:6,7,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Hewitt, Robertson, Morris).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 ‘사람’과 ‘인자’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Morris, Hewitt).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휘오스 안드로푸)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Lane, bruce, Hewitt). 한편 ‘생각하시며’의 헬라어 ‘밈네스케'(*)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하시나이까’의 헬라어 ‘에피스케프테'(*)는 ‘조사하다’혹은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 저를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힘'(*)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사들'(*, 파르 앙겔루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Westcott)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빌 2:7,Morris).

󰃨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의 헬라어 ‘에스테파노사스'(*)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Hewitt).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저에게'(*, 아우토)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ruce, Lan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6절).

󰃨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Hewitt).’아직’의 헬라어 ‘우포'(*)는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Michel, Lane).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마4:8,9; 엡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엘랕토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돜세 카이 티메 에스테파노사스 아우톤

개역개정,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새번역,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으며,㉢ / ㉡또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또한 그를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 위에 세우시며’가 더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7 주께서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게 하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셨습니다.

가톨릭성경,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영어NIV,7 You made him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you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영어NASB,7 “YOU HAVE MADE HIM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YOU HAVE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AND HAVE APPOINTED HIM OVER THE WORKS OF YOUR HANDS;

영어MSG,7 You made them not quite as high as angels, bright with Eden’s dawn light;

영어NRSV,7 You have made them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you have crowned them with glory and honor,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λαττωσας αυτον βρα&;υ τι παρ αγγελους δοξη και τιμη εστεφανωσας αυτον και κατεστησας αυτον επι τα εργα των &;ειρων σου

라틴어Vulgate,7 minuisti eum paulo minus ab angelis gloria et honore coronasti eum et constituisti eum super opera manuum tuarum

히브리어Modern,7 ותחסרהו מעט מאלהים וכבוד והדר תעטרהו ותמשילהו במעשי ידיך׃

판타 휘페탘사스 휘포카토 톤 포돈 아우투 엔 토 가르 휘포탘사이 아우토 타 판타 우덴 아페켄 아우토 아뉘포탘톤 뉜 데 우포 호로멘 아우토 타 판타 휘포테타그메나

개역개정,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새번역,8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성경,8 주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으로 그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시110:1

가톨릭성경,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영어NIV,8 and put everything under his feet.” In putting everything under him, God left nothing that is not subject to him. Yet at present we do not see everything subject to him.

영어NASB,8 YOU HAVE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S FEET. “For in subjecting all things to him, He left nothing that is not subject to him. But now we do not yet see all things subjected to him.

영어MSG,8 Then you put them in charge of your entire handcrafted world. When God put them in charge of everything, nothing was excluded. But we don’t see it yet, don’t see everything under human jurisdiction.

영어NRSV,8 subjecting all things under their feet.” Now in subjecting all things to them, God left nothing outside their control. As it is, we do not yet see everything in subjection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8 παντα υπεταξας υποκατω των ποδων αυτου εν γαρ τω υποταξαι αυτω τα παντα ουδεν αφηκεν αυτω ανυποτακτον νυν δε ουπω ορωμεν αυτω τα παντα υποτεταγμενα

라틴어Vulgate,8 omnia subiecisti sub pedibus eius in eo enim quod ei omnia subiecit nihil dimisit non subiectum ei nunc autem necdum videmus omnia subiecta ei

히브리어Modern,8 כל שתה תחת רגליו הנה באשר שת כל תחתיו לא השאיר דבר שלא שת תחתיו ועתה זה לא ראינו עדין כי כל הושת תחתיו׃

톤 데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랕토메논 블레포멘 예순 디아 토 파데마 투 다나투 돜세 카이 티메 에스테파노메논 호포스 카리티 데우 휘페르 판토스 규세타이 다나투

개역개정,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새번역,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우리말성경,9 다만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시 낮아지신 분, 곧 죽음의 고난을 통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바라봅니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려 하심입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영어NIV,9 But we see Jesus, who was made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now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because he suffered death, so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영어NASB,9 But we do see Him who has been made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namely, Jesus, because of the suffering of death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영어MSG,9 What we do see is Jesus, made “not quite as high as angels,” and then, through the experience of death, crowned so much higher than any angel, with a glory “bright with Eden’s dawn light.” In that death, by God’s grace, he fully experienced death in every person’s place.

영어NRSV,9 but we do see Jesus, who for a little while was made lower than the angels, now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because of the suffering of death, so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헬라어신약Stephanos,9 τον δε βρα&;υ τι παρ αγγελους ηλαττωμενον βλεπομεν ιησουν δια το παθημα του θανατου δοξη και τιμη εστεφανωμενον οπως &;αριτι θεου υπερ παντος γευσηται θανατου

라틴어Vulgate,9 eum autem qui modico quam angeli minoratus est videmus Iesum propter passionem mortis gloria et honore coronatum ut gratia Dei pro omnibus gustaret mortem

히브리어Modern,9 אבל ישוע המחסר מעט ממלאכים אותו ראינו מעטר בכבוד והדר מפני ענותו עד מות למען אשר יטעם בחסד אלהים את המות בעד כלם׃

성 경: [히2:9]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잠깐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퀴 티'(*)를 7절과 다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한편 ‘인하여’의 헬라어 ‘디아'(*)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빌 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Morris, Lane).

󰃨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신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판토스'(*)에서 ‘판토스’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Morris, Bruce, Robins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카리티 데우'(*)는 몇몇 사본에 ‘코리스 데우'(*, ‘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27:46; 막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Jerome, Ambrose).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Lane, Morris).

에프레펜 가르 아우토 디 혼 타 판타 카이 디 후 타 판타 폴루스 휘우스 에이스 돜산 아가곤타 톤 아르케곤 테스 소테리아스 아우톤 디아 파데마톤 텔레이오사이

개역개정,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새번역,10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그, ‘아들들’

우리말성경,10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들의 구원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케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톨릭성경,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영어NIV,10 In bringing many sons to glory, it was fitting that God, for whom and through whom everything exists, should make the autho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

영어NASB,10 For it was fitting for Him, for whom are all things, and through whom are all things, in bringing many sons to glory, to perfect the author of their salvation through sufferings.

영어MSG,10 It makes good sense that the God who got everything started and keeps everything going now completes the work by making the Salvation Pioneer perfect through suffering as he leads all these people to glory.

영어NRSV,10 It was fitting that God, for whom and through whom all things exist, in bringing many children to glory, should make the pionee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πρεπεν γαρ αυτω δι ον τα παντα και δι ου τα παντα πολλους υιους εις δοξαν αγαγοντα τον αρ&;ηγον της σωτηριας αυτων δια παθηματων τελειωσαι

라틴어Vulgate,10 decebat enim eum propter quem omnia et per quem omnia qui multos filios in gloriam adduxerat auctorem salutis eorum per passiones consummare

히브리어Modern,10 כי נאה היה לו אשר הכל למענו והכל על ידו בהנחתו בנים רבים לכבוד להשלים בענוים את שר ישועתם׃

성 경: [히2:10]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의 헬라어 ‘디 혼 타판타'(*)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만물이 말미암은’의 헬라어 ‘디 후 타 판타'(*)는 ‘만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한편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곤'(*)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 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또한 ‘온전케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털레이오사이'(*)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29:9,33: 레8:33; 16:32; 21:10;민3:3).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미이다(Bruce).

호 테 가르 하기아존 카이 호이 하기아조메노이 엨스 헤노스 판테스 디 헨 아이티안 우크 에파이스퀴네타이 아델푸스 아우투스 칼레인

개역개정,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새번역,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영어NIV,11 Both the one who makes men holy and those who are made holy are of the same family. So Jesus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others.

영어NASB,11 For both He who sanctifies and those who are sanctified are all from one Father; for which reason He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ethren,

영어MSG,11 Since the One who saves and those who are saved have a common origin, Jesus doesn’t hesitate to treat them as family,

영어NRSV,11 For the one who sanctifies and those who are sanctified all have one Father. For this reason Jesus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others and sister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 τε γαρ αγιαζων και οι αγιαζομενοι εξ ενος παντες δι ην αιτιαν ουκ επαισ&;υνεται αδελφους αυτους καλειν

라틴어Vulgate,11 qui enim sanctificat et qui sanctificantur ex uno omnes propter quam causam non confunditur fratres eos vocare dicens

히브리어Modern,11 כי גם המקדש גם המקדשים כלם מאחד המה ועל כן לא בוש מקרא להם אחים׃

성 경: [히2:1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Bruce, Morris, Procksch).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테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Phillips).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Hering).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Lane, Hewitt,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Kogel, Sqicq, Michel).

󰃨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준다(11:16).

레곤 아팡겔로 토 오노마 수 토이스 아델포이스 무 엔 메소 엨클레시아스 휨네소 세

개역개정,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새번역,12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 ㉥시 22:22(칠십인역)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2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교회 가운데서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시22:22

가톨릭성경,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영어NIV,12 He says, “I will declare your name to my brothers; in the presence of the congregation I will sing your praises.”

영어NASB,12 saying, “I WILL PROCLAIM YOUR NAME TO MY BRETHREN, IN THE MIDST OF THE CONGREGATION I WILL SING YOUR PRAISE.”

영어MSG,12 saying, I’ll tell my good friends, my brothers and sisters, all I know about you; I’ll join them in worship and praise to you.

영어NRSV,12 saying, “I will proclaim your name to my brothers and sisters, in the midst of the congregation I will prais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λεγων απαγγελω το ονομα σου τοις αδελφοις μου εν μεσω εκκλησιας υμνησω σε

라틴어Vulgate,12 nuntiabo nomen tuum fratribus meis in medio ecclesiae laudabo te

히브리어Modern,12 באמרו אספרה שמך לאחי בתוך קהל אהללך׃

성 경: [히2:12,1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막 15:34;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ruce).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다(Hewitt, Morris).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Lane).

카이 팔린 에고 에소마이 페포이도스 엪 아우토 카이 팔린 이두 에고 카이 타 파이디아 하 모이 에도켄 호 데오스

개역개정,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새번역,13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 8:17(칠십인역) ㉨사 8:18(칠십인역)

우리말성경,13 하시고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하시고 또다시 보라.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8:17;사8:18

가톨릭성경,13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어NIV,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he says, “Here am I, and the children God has given me.”

영어NASB,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BEHOLD, I AND THE CHILDREN WHOM GOD HAS GIVEN ME.”

영어MSG,13 Again, he puts himself in the same family circle when he says, Even I live by placing my trust in God. And yet again, I’m here with the children God gave me.

영어NRSV,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Here am I and the children whom God has given m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παλιν εγω εσομαι πεποιθως επ αυτω και παλιν ιδου εγω και τα παιδια α μοι εδωκεν ο θεος

라틴어Vulgate,13 et iterum ego ero fidens in eum et iterum ecce ego et pueri mei quos mihi dedit Deus

히브리어Modern,13 ועוד וקויתי לו ועוד הנה אנכי והילדים אשר נתן לי יהוה׃

에페이 운 타 파이디아 케코이노네켄 하이마토스 카이 사르코스 카이 아우토스 파라플레시오스 메테스켄 톤 아우톤 히나 디아 투 다나투 카타르게세 톤 토 트라토스 에콘타 투 다나투 퉅 에스틴 톤 디아볼론

개역개정,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새번역,14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우리말성경,14 이와 같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므로 그 자신도 이와 같이 그들과 함께 속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며

가톨릭성경,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영어NIV,14 Since the children have flesh and blood, he too shared in their humanity so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who holds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

영어NASB,14 Since then the children share in flesh and blood, He Himself likewise also partook of the same, that through death He might render powerless him who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영어MSG,14 Since the children are made of flesh and blood, it’s logical that the Savior took on flesh and blood in order to rescue them by his death. By embracing death, taking it into himself, he destroyed the Devil’s hold on death

영어NRSV,14 Since, therefore, the children share flesh and blood, he himself likewise shared the same things, so that through death he might destroy the one who has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πει ουν τα παιδια κεκοινωνηκεν σαρκος και αιματος και αυτος παραπλησιως μετεσ&;εν των αυτων ινα δια του θανατου καταργηση τον το κρατος ε&;οντα του θανατου τουτεστιν τον διαβολον

라틴어Vulgate,14 quia ergo pueri communicaverunt sanguini et carni et ipse similiter participavit hisdem ut per mortem destrueret eum qui habebat mortis imperium id est diabolum

히브리어Modern,14 ויען כי הילדים כלם יחדו בשר ודם אף הוא לבש בשר ודם כמוהם למען אשר יבטל על ידי המות את אשר לו ממשלת המות הוא השטן׃

성 경: [히2:14,1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두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메테스켄'(*)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Lane, Morris).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한다(Hewitt).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Robertson).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카이 아팔랔세 투투스 호소이 포보 다나투 디아 판토스 투 젠 에노코이 에산 둘레이아스

개역개정,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새번역,15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5 또한 죽음이 두려워 평생 노예로 매여 사는 사람들을 풀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5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영어NASB,15 and might deliver those who through fear of death were subject to slavery all their lives.

영어MSG,15 and freed all who cower through life, scared to death of death.

영어NRSV,15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 fear of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απαλλαξη τουτους οσοι φοβω θανατου δια παντος του ζην ενο&;οι ησαν δουλειας

라틴어Vulgate,15 et liberaret eos qui timore mortis per totam vitam obnoxii erant servituti

히브리어Modern,15 ולהתיר את אלה אשר מאימת המות היו נתנים לעבדות כל ימי חייהם׃

우 가르 데푸 앙겔론 에필람바네타이 알라 스페르마토스 아브라암 에필람바네타이

개역개정,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새번역,16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 ㉩그, ‘씨’

우리말성경,16 물론 그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붙들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영어NIV,16 For surely it is not angels he helps, but Abraham’s descendants.

영어NASB,16 For assuredly He does not give help to angels, but He gives help to the descendant of Abraham.

영어MSG,16 It’s obvious, of course, that he didn’t go to all this trouble for angels. It was for people like us, children of Abraham.

영어NRSV,16 For it is clear that he did not come to help angels, but the descendants of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 γαρ δηπου αγγελων επιλαμβανεται αλλα σπερματος αβρααμ επιλαμβανεται

라틴어Vulgate,16 nusquam enim angelos adprehendit sed semen Abrahae adprehendit

히브리어Modern,16 כי אמנם לא במלאכים החזיק כי אם בזרע אברהם החזיק׃

성 경: [히2:16]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Hewitt, Lane, NIV).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Bengel, Moffatt, Westcott, Bruce, RSV, NIV). (2) 혹자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Ambrose, Beza, KJV).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호덴 오페일렌 카타 판타 토이스 아델포이스 호모이오데나이 히나 엘레에몬 게네타이 카이 피스토스 아르키에루스 타 프로스 톤 데온 에이스 토 힐라스케스다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투 라우

개역개정,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7 이러므로 그는 모든 것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7 For this reason he had to be made like his brothers in every way,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service to God, and that he might make atonement for the sins of the people.

영어NASB,17 Therefore, He had to be made like His brethren in all things, that He might becom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things pertaining to God, to make propitiation for the sins of the people.

영어MSG,17 That’s why he had to enter into every detail of human life. Then, when he came before God as high priest to get rid of the people’s sins,

영어NRSV,17 Therefore he had to become like his brothers and sisters in every respect, so that he might b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the service of God, to make a sacrifice of atonement for the sins of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θεν ωφειλεν κατα παντα τοις αδελφοις ομοιωθηναι ινα ελεημων γενηται και πιστος αρ&;ιερευς τα προς τον θεον εις το ιλασκεσθαι τας αμαρτιας του λαου

라틴어Vulgate,17 unde debuit per omnia fratribus similare ut misericors fieret et fidelis pontifex ad Deum ut repropitiaret delicta populi

히브리어Modern,17 על כן היה עליו להדמות לאחיו בכל דבר למען אשר יהיה כהן גדול רחמן ונאמן בעניני אלהים לכפר על חטאת העם׃

성 경: [히2:17]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제사장'(*, 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엔 호 가르 페폰덴 아우토스 페이라스데이스 뒤나타이 토이스 페이라조메노이스 보에데사이

개역개정,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새번역,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당하셨기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영어NIV,18 Because he himself suffered when he was tempt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mpted.

영어NASB,18 For since He Himself was tempted in that which He has suffered, He is able to come to the aid of those who are tempted.

영어MSG,18 he would have already experienced it all himself–all the pain, all the testing–and would be able to help where help was needed.

영어NRSV,18 Because he himself was tested by what he suffer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ste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ν ω γαρ πεπονθεν αυτος πειρασθεις δυναται τοις πειραζομενοις βοηθησαι

라틴어Vulgate,18 in eo enim in quo passus est ipse temptatus potens est eis qui temptantur auxiliari

히브리어Modern,18 כי באשר הוא בעצמו ענה ונתנסה יכל לעזר את המנסים׃

성 경: [히2:1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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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02장

2:1 구원의 확증(히브리서 2:1-4)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하여 아주 논리적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즉 교리를 전제하고 그것의 근거를 밝히고 다음 그 용도를 설명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가 앞서서 주장하고 증명한 진리가 적용되어 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사용되고 있다. 본장은 바로 이 접속자로 시작되는데 이 접속사는 본장이 전 장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내 보여준다. 전 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제정한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복음의 섭리가 율법의 섭리보다 더 뛰어남을 주장하였었다. 이제 바울은 위의 교리를 권면과 주장의 두 가지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현실에 적용하였다. Ⅰ. 바울은 권면을 통해 전 장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본문에서 그는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삼갈지니”(1절)라고 하였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첫 번째 방법을 들은 바를 굳게 간직하는 것임을 나타내 보여 준다. 복음 시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진지하게 복음의 기준으로 삼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열심히 복음대로 행하며 그것을 늘 일고 묵상하며 신앙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며 기억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복음에 의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 Ⅱ. 바울이 한 주장의 방법. 바울은 논증을 통해 전 장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는 논증을 통해 그가 준 권면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1. 우리가 들은 복음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지 아니할 경우에 우리는 큰 손해를 입을 것임을 바울은 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복음을 굳게 간직하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달아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태만함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1)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따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과 기억은 구멍이 많은 뚫린 배와 같다. 따라서 상당히 주의하지 않으면 한번 들어왔던 것도 쉽게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오래 간직할 수 없음의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되었고 또 사탄이 간교를 부리고 우리를 대적하며(사탄은 우리에게서 말씀을 훔쳐간다) 세속의 유혹과 혼란 즉 좋은 씨앗을 질식케 하는 가시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2) 한 번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를 상실해 버리는 자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수천량의 금은보다 더 좋은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종자(파종한 씨)도 잃어버리고 듣는데 소요된 시간과 고통도 잃어버리며, 추수할 희망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3) 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주의하게 듣는 자들은 들은 것을 곧 잃어버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

2. 만약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율법에 복종치 않고 율법을 무시한 자들이 파멸한 것 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논하였다(2,3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기 기록되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공고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팔을 불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말씀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또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천사들에게 두 번째로 나팔을 불게 하셔서, 모든 심판 받을 자를 모으시고, 그들이 율법대로 행하였는지 아니 행하였는지에 따라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또 “율법은 공고한 것이라”했다. 율법은 불변의 약속이다. 그것은 진리이고 신실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복종 여부에 따라 그 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은 공변된 보증을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볼지라도 율법은 인간을 결코 가벼이 다루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과거에 죄인들을 모두 심판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들을 재판할 것이다. 공의로우신 주이시며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율법을 공포하시면서, 율법을 무시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지는 않으시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율법을 범하는 자들과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복종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응분의 벌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죄인들에게 가하였던 가장 무서운 벌일지라도 그것은 그 죄의 대가로 정당한 것이었고 죄보다 무겁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 벌은 “공정한 응분의 대가”이다. 벌은 공정한 것이어서 죄에 상응하는 정도로 주어졌다. 복종에 대한 보상도 마찬가지로 공정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상급은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에 비하여 넘치게 주어질 것이다.

(2) 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이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한 구원이므로 어느 구원도 이것과 비교될 수 없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하여 그 누구도 그것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으며 또 그 위대성은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위대한 구원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위대하신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는 바로 인간의 본성과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큰 죄와 비참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돌아갈 있는가를 보여 준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한 위대한 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우리로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며 우리로 구세주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은혜의 섭리 즉 새 계약을 보여 준다. 복음을 통해 구원의 대헌장이 선포되었고 이 헌장은 계약에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해 준다.

(3) 복음에 대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를 바울은 기록하였다. 이 죄는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경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경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구원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복음의 은총의 가치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또는 자신들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음과 그것이 없음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지도 않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거나 수궁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복음의 유익함을 깨닫고 복음에 접근하고 또 자기에게 복음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태도들이 보여질 때 그 자는 곧 구원을 경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복음의 은총을 멸시한 악하고 비참한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복음을 무시한 죄인들이 당할 비참성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이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찌 피하리요(3절)”라고 하였다.

[1] 위의 말씀은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을 이미 정죄 아래 있음을 뜻한다. 즉 이미 체포되어 심판의 손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의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의 범죄를 여기에 더하므로 더욱 무거운 저주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였다.

[2] 이 저주를 받고 나면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큰 구원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빠져 나올 길이 없음을 위의 말씀은 암시해 준다. 복음의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저주로부터 구제될 수 없다.

[3]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더욱 격렬한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이고 그들은 이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판날에 그들은 숨을 수도 없고, 자기가 행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감옥을 부수고 나올 수도 없다. 그들에게 열려질 자비의 문은 다시는 없다. 또한 그들은 죄를 대속해 줄 어떠한 희생 제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버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비참한 처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어찌 피하리요?”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은 매우 타당성을 띤 말씀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양심에 대한 호소인 것이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모든 힘과 계략과 결속과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서 달아날 길을 찾아 낼 수 있겠느냐는 도전인 것이다. 위대한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는 무력할 뿐 아니라 탄원이나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심판에 대하여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할 때 유구무언일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찔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비참함은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 사람들이나 또는 율법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 즉 죄를 지은 이방인들에게 그 주어지는 비참보다 정도가 심할 것이다.

3. 복음을 최초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분의 위엄과 그의 뛰어남은 논하므로 바울은 자기의 권면의 근거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구원의 소식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전해 주신것이요”라고 하였다(3절). 즉 이 말은 구원의 소식은 그가 곧 여호와 이시며, 생명과 영광의 주인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무오의 지혜와 선함과 의심할 수 없는 영원한 진실함과 충실함, 절대적인 위엄과 권위, 강력한 권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소식을 맨 처음으로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였다. 그가 오시기 전에 주어진 말씀들은 유형에 불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고 또 인간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결코 말씀하지 않는 주님에 의해 말씀되어지기 시작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리라고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한 자들의 인격의 놀라움을 들어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논하였다(3,4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 하였노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지고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 이 복음의 증거자들은 이같이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어떤 세속적인 생각이나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은 결코 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증거의 목적은 오직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 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들 중 수다한 사람들은 이 중거를 하다가 죽기까지 하였다.

(2)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의 보증을 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들로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라고 그들에게 위임하사 파손하셨음을 증거 하셨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보증이 되셨는가? 즉 그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평안을 주시고, 모든 고난을 견딜 인내를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용기와 즐거움을(이런 사실은 그 증거자들 자신에게 증거가 되는 것들이었다)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다. 또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시고 또한 당신의 뜻을 따라 성령을 선물로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던 것이다.

[1] “표징”이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표징과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표징을 말하는 것이다.

[2] “놀라운 일”이란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초월하여 역사되어지는 말씀의 역사 즉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차게 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또 설교 내용을 열심히 탐구하도록 만드는 역사인 것이다.

[3] “여러 가지 기적” 또는 능력 있는 역사란 초월적으로 강력하게 역사되어지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4] “성령의 은사”란 복음 증거자들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성령께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 또한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를 믿음 위에 확고히 서게하며 우리의 소망을 확고하게 하시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도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율법의 권위와 우수성을 입증하시었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실 때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복음의 섭리가 더욱 뛰어나고 놀라운 것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큰 이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셨다.

우리가 들은 복음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지 아니할 경우에 우리는 큰 손해를 입을 것임을 바울은 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복음을 굳게 간직하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달아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태만함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따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과 기억은 구멍이 많은 뚫린 배와 같다. 따라서 상당히 주의하지 않으면 한번 들어왔던 것도 쉽게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오래 간직할 수 없음의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되었고 또 사탄이 간교를 부리고 우리를 대적하며(사탄은 우리에게서 말씀을 훔쳐간다) 세속의 유혹과 혼란 즉 좋은 씨앗을 질식케 하는 가시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한 번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를 상실해 버리는 자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수천량의 금은보다 더 좋은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종자(파종한 씨)도 잃어버리고 듣는데 소요된 시간과 고통도 잃어버리며, 추수할 희망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주의하게 듣는 자들은 들은 것을 곧 잃어버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만약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율법에 복종치 않고 율법을 무시한 자들이 파멸한 것 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논하였다(2,3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기 기록되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공고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팔을 불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말씀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또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천사들에게 두 번째로 나팔을 불게 하셔서, 모든 심판 받을 자를 모으시고, 그들이 율법대로 행하였는지 아니 행하였는지에 따라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또 “율법은 공고한 것이라”했다. 율법은 불변의 약속이다. 그것은 진리이고 신실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복종 여부에 따라 그 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은 공변된 보증을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볼지라도 율법은 인간을 결코 가벼이 다루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과거에 죄인들을 모두 심판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들을 재판할 것이다. 공의로우신 주이시며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율법을 공포하시면서, 율법을 무시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지는 않으시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율법을 범하는 자들과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복종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응분의 벌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죄인들에게 가하였던 가장 무서운 벌일지라도 그것은 그 죄의 대가로 정당한 것이었고 죄보다 무겁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 벌은 “공정한 응분의 대가”이다. 벌은 공정한 것이어서 죄에 상응하는 정도로 주어졌다. 복종에 대한 보상도 마찬가지로 공정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상급은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에 비하여 넘치게 주어질 것이다.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이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한 구원이므로 어느 구원도 이것과 비교될 수 없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하여 그 누구도 그것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으며 또 그 위대성은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위대한 구원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위대하신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는 바로 인간의 본성과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큰 죄와 비참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돌아갈 있는가를 보여 준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한 위대한 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우리로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며 우리로 구세주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은혜의 섭리 즉 새 계약을 보여 준다. 복음을 통해 구원의 대헌장이 선포되었고 이 헌장은 계약에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해 준다.복음에 대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를 바울은 기록하였다. 이 죄는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경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경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구원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복음의 은총의 가치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또는 자신들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음과 그것이 없음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지도 않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거나 수궁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복음의 유익함을 깨닫고 복음에 접근하고 또 자기에게 복음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태도들이 보여질 때 그 자는 곧 구원을 경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복음의 은총을 멸시한 악하고 비참한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복음을 무시한 죄인들이 당할 비참성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이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찌 피하리요(3절)”라고 하였다.위의 말씀은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을 이미 정죄 아래 있음을 뜻한다. 즉 이미 체포되어 심판의 손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의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의 범죄를 여기에 더하므로 더욱 무거운 저주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였다.이 저주를 받고 나면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큰 구원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빠져 나올 길이 없음을 위의 말씀은 암시해 준다. 복음의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저주로부터 구제될 수 없다.위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더욱 격렬한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이고 그들은 이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판날에 그들은 숨을 수도 없고, 자기가 행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감옥을 부수고 나올 수도 없다. 그들에게 열려질 자비의 문은 다시는 없다. 또한 그들은 죄를 대속해 줄 어떠한 희생 제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버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비참한 처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어찌 피하리요?”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은 매우 타당성을 띤 말씀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양심에 대한 호소인 것이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모든 힘과 계략과 결속과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서 달아날 길을 찾아 낼 수 있겠느냐는 도전인 것이다. 위대한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는 무력할 뿐 아니라 탄원이나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심판에 대하여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할 때 유구무언일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찔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비참함은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 사람들이나 또는 율법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 즉 죄를 지은 이방인들에게 그 주어지는 비참보다 정도가 심할 것이다.복음을 최초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분의 위엄과 그의 뛰어남은 논하므로 바울은 자기의 권면의 근거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구원의 소식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전해 주신것이요”라고 하였다(3절). 즉 이 말은 구원의 소식은 그가 곧 여호와 이시며, 생명과 영광의 주인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무오의 지혜와 선함과 의심할 수 없는 영원한 진실함과 충실함, 절대적인 위엄과 권위, 강력한 권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소식을 맨 처음으로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였다. 그가 오시기 전에 주어진 말씀들은 유형에 불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고 또 인간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결코 말씀하지 않는 주님에 의해 말씀되어지기 시작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리라고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한 자들의 인격의 놀라움을 들어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논하였다(3,4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 하였노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지고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 이 복음의 증거자들은 이같이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어떤 세속적인 생각이나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은 결코 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증거의 목적은 오직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 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들 중 수다한 사람들은 이 중거를 하다가 죽기까지 하였다.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의 보증을 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들로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라고 그들에게 위임하사 파손하셨음을 증거 하셨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보증이 되셨는가? 즉 그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평안을 주시고, 모든 고난을 견딜 인내를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용기와 즐거움을(이런 사실은 그 증거자들 자신에게 증거가 되는 것들이었다)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다. 또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시고 또한 당신의 뜻을 따라 성령을 선물로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던 것이다.”표징”이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표징과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표징을 말하는 것이다.”놀라운 일”이란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초월하여 역사되어지는 말씀의 역사 즉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차게 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또 설교 내용을 열심히 탐구하도록 만드는 역사인 것이다.”여러 가지 기적” 또는 능력 있는 역사란 초월적으로 강력하게 역사되어지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성령의 은사”란 복음 증거자들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성령께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 또한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를 믿음 위에 확고히 서게하며 우리의 소망을 확고하게 하시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도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율법의 권위와 우수성을 입증하시었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실 때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복음의 섭리가 더욱 뛰어나고 놀라운 것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큰 이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셨다.

2:5 그리스도의 수난의 목적(히브리서 2:5-9) 사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교리를 실제적인 생활과 연관시켜 권면한 후 다시 먼저 번의 교리 즉 그리스도의 인격이 천사들 보다 뛰어나시다는 교리로 돌아가 그 교리를 더욱 규명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지는 않습니다”(5절)라고 하였다. Ⅰ. 본문에서 바울은 부정적인 어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인격의 뛰어나심을 주장한다. 즉 복음에 의해 주어지는 나라, 본문대로 한다면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구속자 자신의 특별한 보호와 지휘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현재 교회가 존재하는 이 세상 국가나 또는 장차 올 완성된 세상(이 세상은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나고 이 세상 왕국들이 그리스도와 왕국이 될 때 임하는 세상이다)이 천사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큰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주실 때 율법을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율법의 시대는 옛 시대요 지나간 시대인데) 천사들을 심부름꾼으로 삼으시지 않으셨다. 이제 새로운 세계는 그리스도께 위임된 것이며 오직 그에게만 모든 영원하고 영적인 것에 관한 절대적인 권능이 부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신다. 그가 이같은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에게는 영광이 되며 그의 교회에게는 축복과 안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초의 창설과 포교, 치리 또는 교회의 마지막 심판과 완성은 어는 것도 천사에게 위임된 것이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에 위임된 것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천사들에게는 그런 큰 권세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의 천사들은 그런 무거운 책임을 맡기에는 너무나 약했던 것이다. Ⅱ. 우리는 본문에서 복음의 세계가 축복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약 성경을 통해 설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시편 8편 4-6절 즉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에게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는 말씀이 인용된 것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본문의 경우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전체 인간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겸손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된다.

(1)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사랑의 섭리에 의하여 인간들을 기억하시고 다음에 두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의 계획과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바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 그가 인간을 찾아 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을 찾아오시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거하고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 속에 우리가 처해 있으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셔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매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자.

(3) 하나님이 인간을 이 낮은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심에 대하여 또 그가 인간을 건물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으뜸 되는 존재가 되게 하시며, 육신으로 있는 이 세상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낮게 하셨으나, 의로운 자의 부활시에는 천사와 동등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눅 20:36).

(4)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심에 대하여 즉 그가 영혼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또 신체에는 신체대로 우수한 지체를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배려로 인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세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영과 육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5) 인간에게 만물을 통치할 권리와 지배권을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충실하며 의무를 다하는 한, 다른 동물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다.

2. 이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특별히 8,9절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 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주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도대체 쓸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어떤 직책을 부여 하셨는지가 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여기 증언되고 있는데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권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가 대 희생물로써 이 세상에 오시기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선약이 이루어져 있었다.

[3]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지으심으로 그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게 하심으로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셨다는 사실이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그에게 주시고, 삼위의 제 이위로써 거룩함을 주셔서, 신격이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충만하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또한 모든 인간이 가지는 죽음을 맛보심으로 즉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저주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쓰디쓴 순간을 맛보심으로 인간의 속죄를 이루어 주셨고 그같이 하시므로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시었다.

[5] 죽음을 맛보시기까지 낮아지신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에게 주시고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권을 주시었다. 이같이 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이같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예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인간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전체 인간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겸손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된다.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사랑의 섭리에 의하여 인간들을 기억하시고 다음에 두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의 계획과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바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그가 인간을 찾아 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을 찾아오시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거하고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 속에 우리가 처해 있으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셔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매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자.하나님이 인간을 이 낮은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심에 대하여 또 그가 인간을 건물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으뜸 되는 존재가 되게 하시며, 육신으로 있는 이 세상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낮게 하셨으나, 의로운 자의 부활시에는 천사와 동등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눅 20:36).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심에 대하여 즉 그가 영혼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또 신체에는 신체대로 우수한 지체를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배려로 인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세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영과 육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인간에게 만물을 통치할 권리와 지배권을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충실하며 의무를 다하는 한, 다른 동물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다.이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특별히 8,9절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 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주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도대체 쓸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어떤 직책을 부여 하셨는지가 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여기 증언되고 있는데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권고 하셨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가 대 희생물로써 이 세상에 오시기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선약이 이루어져 있었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지으심으로 그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게 하심으로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셨다는 사실이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그에게 주시고, 삼위의 제 이위로써 거룩함을 주셔서, 신격이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충만하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또한 모든 인간이 가지는 죽음을 맛보심으로 즉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저주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쓰디쓴 순간을 맛보심으로 인간의 속죄를 이루어 주셨고 그같이 하시므로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시었다.죽음을 맛보시기까지 낮아지신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에게 주시고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권을 주시었다. 이같이 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이같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예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인간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2:10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히브리서 2:10-13) 그리스도의 죽음을 서술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의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무슨 이유로 고난을 받게 했는가를 밝힘으로 또한 그의 이러한 고난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받게 되었는가를 보임으로 위의 작업을 진행하셨다. Ⅰ.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그리스도로 고난을 겪게 하셨는가를 본문은 말해 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10절). 1. 여기서 하나님이 만물의 최종 목적이요 또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즉 그가 지은 모든 것이 그에게 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그가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2. 본문은 인간 구원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 방법을 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1) 인간 구원을 작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즉 복음의 영광된 특권을 누리게 하며 또한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영광까지 누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었다.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우리가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중생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 하늘나라는 유산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자녀들만이 이 상속을 받을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구셨으니(요 1:12)”라고 하였다.

[3] 비록 때와 장소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과 몇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이면 그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이시다.

[4]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한 아무리 흩트려져 있고 파가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함께 영광에로 이르게 될 것이다.

(2) 인간 구원의 방법을 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1] 구원의 대장이 되는 사람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었다. 구원받을 자들은 남을 구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대장과 인도자의 지도하에서 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대장의 깃발 아래 모여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인내하여야 한다. 그들은 대장을 좇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자들만이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인도되어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받게 하심으로 그를 완전케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도록 하셨다(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직책에 임명하셨고 그 일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의 성령에 힘입어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어야 온전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셨다. 즉 그리스도는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완성하셨고, 또한 그의 이러한 피흘림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에 아무 결격이 없는 분임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셨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 또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웬(Owen)박사는 고난을 통하여 봉헌되고 또 완전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시었다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들이 존귀해지고 유익을 얻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만물의 최종 목적이요 또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즉 그가 지은 모든 것이 그에게 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그가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본문은 인간 구원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 방법을 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인간 구원을 작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즉 복음의 영광된 특권을 누리게 하며 또한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영광까지 누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었다.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우리가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중생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 하늘나라는 유산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자녀들만이 이 상속을 받을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구셨으니(요 1:12)”라고 하였다.비록 때와 장소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과 몇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이면 그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이시다.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한 아무리 흩트려져 있고 파가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함께 영광에로 이르게 될 것이다.인간 구원의 방법을 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구원의 대장이 되는 사람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었다. 구원받을 자들은 남을 구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대장과 인도자의 지도하에서 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대장의 깃발 아래 모여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인내하여야 한다. 그들은 대장을 좇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자들만이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인도되어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받게 하심으로 그를 완전케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도록 하셨다(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직책에 임명하셨고 그 일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의 성령에 힘입어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어야 온전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셨다. 즉 그리스도는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완성하셨고, 또한 그의 이러한 피흘림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에 아무 결격이 없는 분임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셨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 또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웬(Owen)박사는 고난을 통하여 봉헌되고 또 완전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시었다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들이 존귀해지고 유익을 얻게 된다. Ⅱ.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얼마나 큰 혜택을 입게 되는가를 보여 주신다는 사실을 본문은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위에서 고찰되었다. 여기서는 이 고난이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 됨이 말씀되고 있다. 이 고난을 통해 주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1.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와 연합하게 된다.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11절)”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 거룩케 하는 성령을 인간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는 일의 으뜸이 되신다. 우리를 믿는 자는 거룩하게 하는 성령도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참되게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 원리들과 능력을 부여받고 추악함과 못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하고 높은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영광으로 이르기 전에 먼저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는 일을 주제하시는 그리스도와 이를 받아들여서 따르는 신자들은 모두 하나에서 난 것이다.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

(1)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한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심은 영원 전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정해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되심은 양자 선택과 중생의 방법을 통하여서인 것이다.

(2) 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세상의 아버지인 아담의 자손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다.

(3) 이 양자는 다같이 영적인 존재이다. 즉 다같이 거룩하고 또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같은 영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마음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이다. 같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은 깨닫게 하고 일하게 하신다.

2.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간의 사랑은 그들의 연합의 필연적 결과이다. 저자는 처음에 이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선포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고 증명하게 위해 구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한다.

(1) 저자는 이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선언한다. 위에서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들은 다 하나에서 낳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와 믿는 자는 형태이다.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형제이다. 또한 혈통으로 볼 때도 서로 형제이다. 지상에서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하듯이 하늘 나라에서 관계에서 볼 때도 그러한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런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본래적인 비열함과 죄에 의해 악해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신 사실은 그의 놀라운 선하심과 겸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는 누구나 결코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2)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세 구절을 예로 들어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

[1] 저자는 먼저 시편 22장 22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 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뛰어난 예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편 22장은 또한 십자가상에 성의 그리스도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된다. 첫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교회 또는 회중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를 기꺼이 따르는 추종자들은 지니실 것이 예언된다. 둘째, 이들 추종자들은 서로서로 형제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형제가 될 것이 예언된다. 셋째,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즉 그의 품성과 속성과 의지와 마음을 형제들에게 선포할 것이 예언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몸소 전하시었고 그리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들로 세상 끝날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오직 이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이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와 함께 참여하도록 하시었다.

[2] 저자는 둘째로 시편 18장 2절의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시 18:2)”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유형인 다윗이 당한 역경을 설명하고 어떻게 다윗이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니신 이외에 또다른 본성 즉(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성을 지니셨음을 보여 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주는 우리의 머리요 지휘자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제들도 역시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

[3] 저자는 셋째로 이사야 8장 18절의 “볼지어다.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사 8:18)”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양친과 그의 자녀들은 같은 천성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평화의 계약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 그들이 그의 약속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지배하시며 그들을 미쁘게 여기시며 그들의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며, 거기서 하나님께 그들은 대면시키신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신다.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와 연합하게 된다.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11절)”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 거룩케 하는 성령을 인간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는 일의 으뜸이 되신다. 우리를 믿는 자는 거룩하게 하는 성령도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참되게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 원리들과 능력을 부여받고 추악함과 못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하고 높은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영광으로 이르기 전에 먼저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는 일을 주제하시는 그리스도와 이를 받아들여서 따르는 신자들은 모두 하나에서 난 것이다.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한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심은 영원 전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정해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되심은 양자 선택과 중생의 방법을 통하여서인 것이다.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세상의 아버지인 아담의 자손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다.이 양자는 다같이 영적인 존재이다. 즉 다같이 거룩하고 또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같은 영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마음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이다. 같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은 깨닫게 하고 일하게 하신다.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간의 사랑은 그들의 연합의 필연적 결과이다. 저자는 처음에 이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선포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고 증명하게 위해 구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한다.저자는 이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선언한다. 위에서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들은 다 하나에서 낳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와 믿는 자는 형태이다.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형제이다. 또한 혈통으로 볼 때도 서로 형제이다. 지상에서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하듯이 하늘 나라에서 관계에서 볼 때도 그러한 것이다.그리스도는 이런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본래적인 비열함과 죄에 의해 악해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신 사실은 그의 놀라운 선하심과 겸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는 누구나 결코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세 구절을 예로 들어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저자는 먼저 시편 22장 22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 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뛰어난 예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편 22장은 또한 십자가상에 성의 그리스도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된다. 첫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교회 또는 회중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를 기꺼이 따르는 추종자들은 지니실 것이 예언된다. 둘째, 이들 추종자들은 서로서로 형제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형제가 될 것이 예언된다. 셋째,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즉 그의 품성과 속성과 의지와 마음을 형제들에게 선포할 것이 예언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몸소 전하시었고 그리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들로 세상 끝날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오직 이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이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와 함께 참여하도록 하시었다.저자는 둘째로 시편 18장 2절의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시 18:2)”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유형인 다윗이 당한 역경을 설명하고 어떻게 다윗이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니신 이외에 또다른 본성 즉(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성을 지니셨음을 보여 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주는 우리의 머리요 지휘자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제들도 역시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저자는 셋째로 이사야 8장 18절의 “볼지어다.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사 8:18)”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양친과 그의 자녀들은 같은 천성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평화의 계약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 그들이 그의 약속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지배하시며 그들을 미쁘게 여기시며 그들의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며, 거기서 하나님께 그들은 대면시키신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신다.

2:14 그리스도의 성육(히브리서 2:14-18)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을 계속 주장한다. 즉 그가 천사의 속성을 지니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의 이유와 목표를 제시한다. Ⅰ. 그리스도의 성육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하였다(16절)(역주: 한글 개혁과 다소 틀림). 그리스도는 혈과 육을 지니셨다. 그가 하나님으로서는 영원부터 선재 하셨으나 때가 이르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므로 참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붙들려 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려고 오셨다. 천사들이 타락했을 때 그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셨고 희망이나 도움도 없이 죄의 지배와 수치와 버림받은 상태를 그대로 지니게 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결코 타락한 천사들의 구세주가 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계보가 타락되자 그대로 내버려 두시되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본성을 지니셔서는 천사들이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회복하고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인 한 사람으로 나심으로 인성을 입으셨고 또한 죄를 범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가 이렇게 하심은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 주시고 또 그들 모두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많은 죄인들에게 희망과 도움이 있게 되었다. 여기서 모든 인간에 대한 충분하고 적절한 대가가 치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게 보여 주신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보여 주신 특별한 자비를 활용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성육의 이유와 계획이 선포되고 있다. 1. 본문에서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하시어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였다(14,15절). 그가 그렇게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도 없었고 또 인간들을 희망이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며 또한 믿는 자들을 하나님에게는 자녀로 또 그리스도에게는 형제로 끌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성을 입으므로 당할 고난을 아셨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알았음에도 자진하여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제사와 제물로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태어나셨고 그랬기에 그리스도에 “주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 그는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었다”(14절). 마귀는 최초의 죄인이며, 죄의 최초의 유혹자였다. 그리고 죄는 죽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인간을 죄로 이끌고 또 그 길을 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때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이며 또 인간의 인체에서 그들의 영혼을 끌어내어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의 재판 자리까지 데려가 거기서 저주를 받게 하며 또한 인간의 유혹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그를 멸하사 다시는 그로 하여금 아무도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고, 또한 아무것도(죽음의 치명적 요인인) 죄에도 끌어들이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사람들의 영혼을 주장치도 못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자진하여 마귀에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대적을 고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셨다.

4.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자주 경험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셨다. 여기서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이란 특별히 예속의 영 아래 있었던 구약의 성도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 불멸에 대한 지식이 복음에 의해 제시된 것처럼 그들에게 밝히 제시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본문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혹은 그것이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를 막론하고 자주 죽음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동을 느끼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고 죽으신 것은 인간들로 죽음은 이미 정복된 적일 뿐만 아니라 두려울 것이 없는 친구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고 또한 죽음이란 영혼에게 해를 입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버리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슬픔과 불만을 종식시키고 영생과 축복의 길로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혼의 불안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사탄의 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이에게는 죽음은 사탄의 손길을 따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되었다.

5. 그리스도는 형제들과 닮게 지어지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공의와 영예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지지하시고 위로하시는 두 가지 일을 다 감당하는 자비롭고도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충실하시고 인간에게는 자비로우셔야만 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셔야만 했던 일.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됨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그의 인격을 손상시킴이 없이 인간을 원상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인간을 온전히 화해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편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였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와 투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고, 죽음으로써 그 갈등을 중단시키고 훨씬 더 관계를 아름답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은혜와 우정으로써 받아들이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가 감당하셔야 했던 일. 그것은 곧 그의 백성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자기가 시험을 봤어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의 수난. 본문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자비.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자들의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친히 아셨다. 또한 그는 부드러웁고 기술이 좋고 동정심 많은 의사이셨다. 그리스도는 유혹 아래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러한 같은 병을 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과 영혼의 고민을 통해 인간의 아픔을 체험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겪은 슬픔과 유혹에 대한 기억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련에 모두 관심을 지니게 하셨고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첫째,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많은 유혹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일랑 품지 말도록 하자. 둘째, 유혹 때문에 우리 영혼은 고민과 위험 속에 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유혹 속에 서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따르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이었고 유혹을 받았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로 훨씬 잘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하시어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였다(14,15절). 그가 그렇게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도 없었고 또 인간들을 희망이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며 또한 믿는 자들을 하나님에게는 자녀로 또 그리스도에게는 형제로 끌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성을 입으므로 당할 고난을 아셨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알았음에도 자진하여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제사와 제물로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태어나셨고 그랬기에 그리스도에 “주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었다”(14절). 마귀는 최초의 죄인이며, 죄의 최초의 유혹자였다. 그리고 죄는 죽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인간을 죄로 이끌고 또 그 길을 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때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이며 또 인간의 인체에서 그들의 영혼을 끌어내어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의 재판 자리까지 데려가 거기서 저주를 받게 하며 또한 인간의 유혹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그를 멸하사 다시는 그로 하여금 아무도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고, 또한 아무것도(죽음의 치명적 요인인) 죄에도 끌어들이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사람들의 영혼을 주장치도 못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자진하여 마귀에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대적을 고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셨다.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자주 경험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셨다. 여기서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이란 특별히 예속의 영 아래 있었던 구약의 성도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 불멸에 대한 지식이 복음에 의해 제시된 것처럼 그들에게 밝히 제시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본문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혹은 그것이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를 막론하고 자주 죽음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동을 느끼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고 죽으신 것은 인간들로 죽음은 이미 정복된 적일 뿐만 아니라 두려울 것이 없는 친구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고 또한 죽음이란 영혼에게 해를 입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버리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슬픔과 불만을 종식시키고 영생과 축복의 길로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혼의 불안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사탄의 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이에게는 죽음은 사탄의 손길을 따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되었다.그리스도는 형제들과 닮게 지어지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공의와 영예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지지하시고 위로하시는 두 가지 일을 다 감당하는 자비롭고도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충실하시고 인간에게는 자비로우셔야만 했다.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셔야만 했던 일.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됨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그의 인격을 손상시킴이 없이 인간을 원상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인간을 온전히 화해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편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였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와 투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고, 죽음으로써 그 갈등을 중단시키고 훨씬 더 관계를 아름답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은혜와 우정으로써 받아들이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자.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가 감당하셔야 했던 일. 그것은 곧 그의 백성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자기가 시험을 봤어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그리스도의 수난. 본문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하였다.그리스도의 자비.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자들의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친히 아셨다. 또한 그는 부드러웁고 기술이 좋고 동정심 많은 의사이셨다. 그리스도는 유혹 아래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러한 같은 병을 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과 영혼의 고민을 통해 인간의 아픔을 체험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겪은 슬픔과 유혹에 대한 기억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련에 모두 관심을 지니게 하셨고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첫째,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많은 유혹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일랑 품지 말도록 하자. 둘째, 유혹 때문에 우리 영혼은 고민과 위험 속에 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유혹 속에 서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따르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이었고 유혹을 받았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로 훨씬 잘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히브리서 서론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4장: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6장: 확실한 소망 7장: 더 좋은 소망 8장: 더 나은 직분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장: 믿음의 선조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서론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본서는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 46 )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고( 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들(목회서신 전에) 중에 포함시켰고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4 (빌 2:9), 2:2 (갈 3:19), 2:10 (롬 11:36), 7:18 (롬 8:3), 7:27 (엡 5:2), 10:33 (고전 4:9), 11:13 (엡 2:19), 12:22 (갈 4:25-26), 13:5 (딤전 3:3; 6: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지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이었고, 저작 연대 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4, 13; 9:4-5, 9; 10:1, 8, 11; 13: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서 8:13,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4; 6:9; 7:7, 19, 22; 8:6, 6; 9:23; 10:34; 11:16, 35, 40; 12: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린도후서 3:9, 1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구약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말한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 어떤 내용의 추가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교훈과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신약 계시의 내용이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상징(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약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난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에서는 상징적으로 또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이 신약 계시에서는 실체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계시하기를 원하신 만큼, 또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였다. [2-3절] . .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 1)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은 신약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 . .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보인다. [4-5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프로토토콘 ) 2) 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3)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 KJV, NIV ).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선한 천사는 죄가 없고 거룩하므로 죄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4)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들과 달리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신다.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 특히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자들의 구원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을 들으셨고,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내용과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는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신약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분히 다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신약성경을 넘어서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고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는 것은 극히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로, 우리는 신약계시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의 신적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죄 없는 새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것이 그가 하신 가장 큰 일이었다. 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의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은 바람 같고 불꽃같이 사용되지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소망하며 찬송하자.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3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 프로세코 )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요 3:36). 이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면으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휘페르 판토스 )[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의 내용인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5)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이라는 원어( 브라퀴 )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과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10절] 만물이 인하고( 디 호 타 판타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말은 인간 예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온전한 구주가 되셨음을 말한다. [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6) 예수께서 성도들과 같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은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함이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로,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로, 그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셨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증거되어 있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 힐라스코마이 )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로, 그것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주가 되셨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로,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도’로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요 4:34)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빌 2:8).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가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리셨다(계 1:5; 3:14). [3-4절]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가운데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쓴 자이었다. 그는 선지자들 중에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시다. 본문은 모세와 주 예수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을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음을 알듯이, 우주 만물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 놀라운 우주를 물질이 우연히 발전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다. 집은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 데라폰 )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 에피 )는 ‘위에서’라는 단어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본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담대함’이라는 원어( 파르레시아 )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나 선지서들뿐 아니라, 시가서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는 것을 증거한다(딤후 3:16).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7)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 페이라조 )이나 ‘증험한다’는 말( 도키마조 )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들이나 두려운 징계들이나 긍휼의 구원들이나,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생활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아서 몸 속에 놔두면 해롭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는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모든 성도는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격노케 하였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던 것이다. [17-19절]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었다.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과 안식을 가리켰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천국의 예표이었다.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를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존숭하며 그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자이시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며 충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존숭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굳게 믿고 순종하며 또 피차 권면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신음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출되었으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하고 또 피차 권면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눅 23:43). 또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에 낙오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절]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며 누린다(마 11:28; 요 14:27). [4-6절]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부르실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9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영원한 안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수고로운 삶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눅 16:22, 25; 23:43)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과 성화(聖化)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13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행 1:9-11).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 쉼파데사이 )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또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과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또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그의 신성(神性)의 도우심과 보호 속에서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 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는 ‘때를 따라 적절한(timely)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 메타 팔레시아스 )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거울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믿고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그를 더욱 알고 믿고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를 더욱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얻기 위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 일을 한다. 대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택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릴 때 무지하고 미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4-6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대제사장은 스스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아론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대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높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관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이 메시아 예언들은 각각 시편 2:7과 시편 110:4에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구절에서 ‘반차’라는 원어( 탁시스 tavxi” )는 ‘반열, 특질’이라는 의미이며,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 디브라 )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을 가진 혹은 그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1-44).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8-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그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함이 증거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해졌고 그의 속죄사역은 다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과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구약성경 시편 110:4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19). 그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창 14:20).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말씀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그러나 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12절] [이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되었음이라]. 본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들이 되어야 했었다. 신자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복음 진리를 듣고 거듭나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성경말씀으로 양육되어 그의 지식이 자라고 견고해지고 점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우유나 마시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다. 하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이다. 전자는 엄마의 젖이나 우유만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고, 후자는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성장한 자들과 같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 즉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교인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교리와 모든 생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교인들이다. 세례 대상자들을 위한 학습반 공부의 내용들은 전자를 위한 것이지만, 신구약성경의 자세한 강해나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 지식과 윤리적 문제들이나 여러 이단적 신학 사조들에 대한 강론은 후자를 위한 것이다. [13-14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계속 실천함으로 인해 지각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본 서신을 받는 자들은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의 내용과 목적은 의(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그것이 의이다. 성경의 목표는 의이다. 그것은, 의가 없었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복음과 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할 교훈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했다. 영적 성장은 단지 이론적 지식으로 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우리의 지각과 감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성장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또 선악을 분별하는 지각과 감각이 자람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우리를 위한 영원하신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많은 고난을,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우리의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고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자.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를 믿고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만 이해하고 어려운 말씀들을 감당치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을 가르치거나 돌볼 힘이 없고 진리를 위해 싸울 힘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감당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의 실천을 통해 지각이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 안에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에 머물지 말고 성경의 어려운 말씀도 읽고 연구하며 배워야 한다. 또 모든 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주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실천함으로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6장: 확실한 소망을 가지자 [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넘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내용으로 몇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로 죽은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숭배, 돈 사랑,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죄를 회개함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기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것은 경건의 기본적 요소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다(행 20:21). 셋째는, 세례들이다. ‘세례들’은 죄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물세례는 그것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또 성도는 실수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다. 넷째는, 안수이다. 세례식의 안수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그 직분의 구별을 나타내고, 병자에게 안수함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구하는 뜻이 있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막 9:43).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거나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성숙을 말한다.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구원적 신앙의 시작이나 그 신앙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배반한 자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 즉 소위 ‘성도의 견인(堅忍)’을 밝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10:28; 빌 1:6),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과 중보 사역의 완전함,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은 잠시 연약할 수 있으나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KJV, NASB, NIV) .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13-15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처음 주신 것은 하란에서이었다고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이었다(창 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고,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18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심으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다(창 22:16-18).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9-20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 카타페타스마 )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 7장: 더 좋은 소망 [1-2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평화, 평안]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살렘 왕으로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가서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한 신비한 인물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는 공의로 다스리실 평안의 왕이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9:6-7). [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이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신비한 베일에 감추신 것은 그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기 위하심이었던 것 같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자로서 역사상 잠시 언급된 후 언급이 없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메시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4-7절]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변론할 것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았지만, 레위 족보에 들지도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 [8-10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죽을 자들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멜기세덱은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났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은 부족하였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이 부족함이 없었다면 아론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말한 온전함은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흠과 점이 많았고 종종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부패되었고 육신적으로도 죽을 자들이었다. 또 그들의 제물들도 죄인들에게 참으로 사죄(赦罪)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실상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의 상징과 예표(豫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은 제사장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는 폐지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율법은 그의 대속 사역에 대한 상징과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즉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마 5:17). 그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롬 3:21-22; 10:4). [12-13절] [이는]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변역할 것임이니] [이는]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것임이니라].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율법 제도의 변화를 보인다. 율법에 의하면, 제단 일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맡겨진 일이고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을 메시아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여기에 신약시대의 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었다. [14-15절] [이는]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분명함이라].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를 영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지 않으시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16-17절]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구주가 되셨다. ‘무궁한 생명’이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 육신의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18-19절] [이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페하였음이라.]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못함이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보내신 이유는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여지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였다. 사람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롬 3:20).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참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나 율법 제도는 그 자체로는 연약하고 무익했다. 그것은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오셨으므로 율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義)가 되셨기 때문이다. [20-21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율법 제도 아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메시아를 제사장으로 세우셨다(시 110:4).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원어( 카타 토수톤 )는 ‘이렇게 큰 것에 의해’[이만큼]라는 뜻이다. 여기에 ‘큰 것’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더 좋은 언약’이란, 구약이 예표적 성격의 언약이었으나 신약은 실체적 성격의 언약임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23-24절] 저희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신다는 점에서도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갈리지 않는다’는 원어( 아파라바토스 )는 ‘임시적이지 않다, 변하지 않다, 영속적이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시다.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라는 말( 디 아우투 )은 ‘그를 통하여’라는 뜻이고, ‘온전히’라는 말( 에이스 토 판텔레스 )은 ‘끝까지, 영원히 (Vg, Syr, NASB) , 완전히 (Thayer, NIV) ’라는 뜻이다. ‘간구한다’는 원어( 엔튕카노 )는 ‘중재한다, 중보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26-27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고,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한 속죄사역을 이루셨고 의(義)를 이루셨다. ‘단번에’라는 말( 에파팍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의(義)는 완전한 의이다. [28절] [이는]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세우셨음이라].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속죄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였다.

히브리서 7장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때에 나타났던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며 그는 살렘 왕인데,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다 메시아의 명칭이다.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었다. 메시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으시며 족보도 없으시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인 대제사장들보다 더 높음을 보인다. 이런 모든 점들에서, 그는 메시아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인물이시다. 그는 의의 왕이시며 평안의 왕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보다, 또 율법 제도보다 더 높으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로, 구약의 율법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사람에게 도덕적 완전함 즉 의(義)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이루실 의에 대한 예표이었다. 성경이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다른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에 대해 예언한 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변경될 것을 보이며 그것은 또한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폐지되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는 실제로 속죄사역을 성취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가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이 되셨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또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사역을 하신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사역을 감사해야 한다. 8장: 더 나은 직분 [1-3절]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 레이투르고스 )[장막에서 섬기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주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셨다. 그는 땅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택자들을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4-6절] [이는]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것임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디아포로테라스 )[더 나은, 더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장막의 봉사자가 되신 까닭은 땅에서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땅에서 섬겼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 보이셨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바로 그 하늘 성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나은 직분을 얻으셨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레위 자손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도는 그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 즉 새 언약의 중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7-9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으셨던 옛 언약과 비교된다. 이 두 언약은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언약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보면(렘 31:31-34)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 예언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신 언약이다. [10-12절]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다. 옛 언약은 두 돌판에 새겨져 있고 후에 율법책에 기록되어진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 마음의 변화, 즉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새 언약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언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족속에서 택하신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다. 또 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사람이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신 6:4-7). 그러나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사 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오늘날 신약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들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다.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옛 언약에서 죄사함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대속(代贖)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 일시적이고 때가 되면 폐지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고 또 주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이제 그가 새 언약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은 옛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예언되었고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옛 언약은 폐지되고 이제 그것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본장은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서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제사장 사역을 하신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의 중보를 의미한다.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면성, 즉 중생(重生,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변화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며, 셋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며,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셋째, 옛 언약은 일시적이며 폐지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 더 나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代贖)을 굳게 믿고 담대히 그러나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5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구약시대의 성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성소(聖所, 하기아 a{gia )라고 불린다. 성소 안에는 예수님의 세상에 빛 되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상징하는 등대가 있었고, 또 예수님의 생명의 떡 되심을 상징하는 떡상과 그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은 떡(진설병 陳設餠)이 있었다. 둘째 부분은 지성소(至聖所, 하기아 하기온 )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금향로 8) 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었다.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특히,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상징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정죄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구원을 증거한다. [6-7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제사장들은 보통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0일 속죄일에 1년 1차씩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날 대제사장은 아마 3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 같다(레 16:12-15). 그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연기가 가득하게 했고, 또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상징하였다. [8-10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 하기온 )[지성소](KJV, NIV)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에이스 톤 카이론 톤 에네스테코타 )[현재의 때를 위한](원문, KJV, NASB, NIV)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 제도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 즉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구약 제도는 비유적, 예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제물들은 그 섬기는 자들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다(7:11, 19). 사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할 때까지 주신 것이었고 그 개혁의 때가 신약시대이다.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예표는 성취되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히 7:27).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장래 좋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영원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이 일을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의 속죄의 핏값은 너무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고 불린다. 또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매년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표현되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충족했고 더 이상 반복되실 필요가 없다. [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서 사람들의 몸의 부정을 깨끗케 하고 거룩케 하였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흠 없는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효력이 있겠는가? ‘영원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켰다고 본다. 무죄하신 신적 구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었다. 그 피는 효력이 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행실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섬기게 만든다. 구약 성도들도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통해 죄사함과 새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더 크고 확실하다. [15절] [그리고]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영원한 기업 곧 천국의 약속을 얻게 한다. 영원한 나라, 영생의 나라인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 [16-17절] [이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유언’이라는 원어 ( 디아데케 )는 앞절의 ‘언약’이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기업 상속을 유언했다면,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유언이 효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효력을 가지게 된다. [18-21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피를 취하여 그 책에 뿌리고 또 모든 백성에게 뿌렸고 그 책은 ‘언약서’라고 불리었고 그 피는 ‘언약의 피’라고 불리었다(7, 8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대로,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 . . [새] 언약의 피”이었다(마 26:28).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흘림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다(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성막 제도는 하늘의 원형에 대한 모형에 불과했고 짐승의 피뿌림도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성막 기구들은 짐승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성막 자체는 더 좋은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드려져야 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실제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24절]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나타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그 속죄의 피를 가지고 천국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그것은 그의 계속적 중보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 공로를 끊임없이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중보 사역을 계속하신다(롬 8:34).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드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리하면[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오셔서 자기 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그 피는 완전한 속죄의 피이다. [27-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고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재림의 주님은 죄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단번에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때까지의 예표이었다. 구약의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였다. 특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예표의 실체로 오셔서 친히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의 사역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친히 자기 몸을 드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중보 사역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효력은 크고 영속적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그가 자신에게 주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하신 자들, 성령께서 인치셔서 중생시키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연약할 때마다 아버지께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 [1-4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죄에 대한 의식, 죄책에 대한 의식]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 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 곧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는 부족했다. 율법 제도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절기 때마다 제사를 반복해 드렸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다. 여기에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 즉 구약 제도의 부족이 있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 하거나 사람들을 온전케 하지 못하였다. [5-7절]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를 원하지 않으심과 메시아를 통해 한 뜻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였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과 조금 다르다. 헬라어는 로마 시대에 공용어였다.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은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의 내용은 메시아께서 짐승의 번제물과 속죄제물로가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고(요 5:39),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였다. [8-9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오셔서 그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 제도, 제사 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 헤기아스메노이 )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되거나 진행 중인 것이 아니고 완료된 것임을 말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말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인 거룩과 의, 즉 법적인 구원인 것이다. [11-13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우데포테 oujdevpote)[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범죄자들의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제사의 행위였다. 그의 피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贖)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는 죄를 위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원수들인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때가 되면 심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 테텔레오켄 )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법적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롬 10:4). [15-18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산다. 성령의 법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물들이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하지는 못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참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인류를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고 율법이 예표한 참 형상이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법적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완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미사는 이 복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단지 순종생활에 힘써야 한다. 19-39절, 믿음의 담력과 인내가 필요함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 톤 하기온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히 9:12).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께서 성소 휘장을 찢듯이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은 구약 제도 아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 길이며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 [21-22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NASB, NIV)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크신 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죄사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 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 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우리는 소망의 고백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들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별로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는 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들 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권면해야 한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덧붙여 교훈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른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 성경말씀의 교훈을 받아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이다. 또 그것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한다. [26-27절]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 하마르타논톤 , 현재분사)는 ‘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즉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고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상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종종 경고의 말씀을 준다(마 7:21; 롬 8:13; 11:22; 히 6:4-8). [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그는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벌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이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라고 말한다. [30-31절]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앎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심히 강포했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고(창 8-10장)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셨고(창 19장) 또 모세를 거역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묻으셨다(민 16장).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32-34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갇힌 자[나의 갇힘들] 9) 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하늘에 있는] 10)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고후 4:6).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님 믿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환난을 당했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더 낫고 영구한 기업 즉 천국을 확신하였고 그 소망이 견고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동정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하였다. [35-36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확신](KJV, NASB, NIV)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함이니라].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큰 상’은 믿음의 결과인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또 성도의 믿음의 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참으로 믿는 자는 끝까지 참을 것이다. [37-39절] [이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생략) 1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음이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잠시 잠깐 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2:7, 12, 20).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막 16:15-16; 요 3:3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즉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우리 각인은 사랑과 선행을 힘쓸 뿐 아니라, 그 일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증진에 유익하다. 다섯째로, 우리는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자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거듭난 자만 이 경고를 듣고 순종할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믿음의 담력과 인내를 끝까지 가져야 한다. 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 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14) 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15) 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포르네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 16) 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13절, 믿음의 경주와 징계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17)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달리기 경주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리기에 임하듯이,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아내와 자녀들 등 가정에 대한 염려를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음란, 거짓과 탐욕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6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그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 [2절] 믿음의 주( 아르케곤 )[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텔레이오텐 )[완성자](KJV, NASB, NIV)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온전케 하실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모범을 보이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비난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고 벌거벗기어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와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그런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고 달려야 한다. [3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의 위선과 부족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지만, 그때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를 생각하며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해지거나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또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5).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엡 6:4; 딤후 3:16).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사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6-8절]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9-10절] 또( 에이타 )[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1-13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그러나 교훈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삶은 또한 ‘평안’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의 평강한 열매 즉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성도의 삶은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구원받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의 시작자와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친히 고난 중에 오래 참으신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징계를 달게 받고 잘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는 참 아들의 표이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즉 징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에 참여케 된다. 징계는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성화를 이루고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고 잘 참아야 한다. 14-29절, 화목과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또 거룩한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갈 5:20).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목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하여졌다(고전 1:30; 히 10:10, 14). 그러나 이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님을 뵈올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것인가?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뵈올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5-17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베벨로스 )[불경건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표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교회에 그런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불평, 원망을 가진 자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힌다. 셋째로, 우리는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행은 사람에게 있는 대표적 죄악이다.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자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과 바꾸려는 자가 그러하다. [18-21절]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의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시내산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 백성과 달리, 우리는 시내산 대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평안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였다. 본문은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계 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0이 말한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요 건축자이신 성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다. ‘천만’이라는 말( 뮈리아스 )은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들이 다 천국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하게 나타내신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죄성이 없는 온전케 된 영들이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다. [25-27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 랄룬타 )[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 바른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 1:4) 나라이다. [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감사하자](NASB, NIV, Thayer, BDAG).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진동치 않을 나라인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말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혹시 마음에 상한 것이 있으면 속히 풀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삶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둘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원망, 불평의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셋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떤 큰 징벌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그가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진지하게 읽고 듣고 받고 믿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 필라델피아 )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 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 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 포이킬로스 )[다양한] 다른( 크세노스 )[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 오네이디스모스 )[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는 중요한 서신이면서도 많은 성도들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의 문체가 특이하며 논리 전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1장에 나오는 많은 성경 인용들은 무엇을 말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을 몇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서 그 중심 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I.계시의 완성자 그리스도(1-3절)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절부터 3절까지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나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1절),이 부분은 분사구문으로 되어 있어서 이어서 나오는 2절 말씀을 위한 부수적 역할을 한다. 여기 1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들은 ‘계시의 도구’이며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것이다(벧후 1:21). 성경에서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인간만 보고 만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역사가가 되고 말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2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아를’()이다. 비록 ‘아들’ 이란 단어에 관사가 붙어 있지 많지만 문맥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아들’을 통한 계시는 그 이전의 선지자들을 통한 모든 계시들의 최종적 완성이다. 이런 면에서 ‘아들’을 통한 계시는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계시라 할 수 있다.

여기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란 표현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의 ‘후일에’ 또는 ‘말일에’(be’a arithhayyamim, 창49:1, 민24:14, 신4:30, 사2:2, 렘 23:20, 겔38:16, 단 10:14, 호3:5, 미 4:1 등)란 표현과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F.F.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p.3). 이 ‘말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실 때이며 메시아를 보내실 때이다(F.W.Grosheide, De brief aan de Hebreen, 1927,p.65). 그래서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의 이 표현은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을 의미한다고 한다(Bruce, 3 각주 14). 그러나 히브리서의 이 표현을 자세히 보면 구약의 ‘후일에’ 란 표현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 히브리서 1장에서는 ‘이’()라는 지시 대명사가 붙어 있어서 ‘앞에서 말한 날들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해 오시던 ‘계시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고자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소위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여태까지의 모든 계시 행위들의 최종적 완성이요 궁극적 성취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석할 때 멀리 있는 문맥보다도 가까이 있는 문맥, 특히 그 단어나 표현이 속해 있는 문장을 더 중요시해야하며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2절 하반절에서는 이 ‘아들’에 대해 총괄적으로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유의 후사’() 곧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으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여기서 ‘세계’라고 번역된 ‘아이오네스’()는 주로 ‘세대’(ages)란 의미로 쓰이지만 ‘우주, 세계’ (worlds)란 의미로도 쓰인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단지 ‘세계’란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역사’ 곧 이 세계와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를 포함한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Grosheide,66), 그러나 여기에 ‘지으셨다, 만드셨다’()는 단어가 있으므로 세상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지으셨다’는 단어뿐만 아니라 ‘주관하신다, 다스리신다’ 는 단어가 왔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아이오네스’는 11장 3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우주, 세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Bruce 4).

3절에서는 이 ‘아들’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서 ‘본체’란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아직 이후의 교의학에서 발전된 바와 같은 ‘위격’(Person)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는 그 단어의 원래의 의미를 따라 ‘존재’ (existence) 또는 ‘본질’(ess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Grosheide 67f.). 그리고 ‘형상’()이란 말은 ‘도장을 찍은 인’(印)을 뜻한다. 도장을 찍으면 그 ‘인’(印)은 ‘도장’과 동일하지만 도장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위격상으로는 ‘구별된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광채’()가 되신다(Grosheide,67).

II.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4-14절)4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심에 대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논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뛰어난 성경지식과 논증의 예리함을 볼 수 있다.

1.더 나은 이름을 얻으심(4,5절)

4절과 5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더 나은 아름’을 얻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 ‘아름다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우월한(superior)이란 뜻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으셨지만, 천사는 결코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2.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심(6,7절)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지만, 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불과하다(6,7절). 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프로토토코스’()라고 부른다. 이것은 개역판 성경에 ‘맏아들’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뜻은 ‘먼저 나신 자’이다(골1:15 참조). 그리고 6절에서 ‘경배한다’()는 단어는 ‘…에게 무릎을 꿇는다’ 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7절은 시편104편 4절의 인용인데, 우리 개역판 성경에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의 ‘바람’() 이란 단어는 경우에 따라 ‘영들’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같은 절 안의 ‘불꽃’과의 대비 관계 때문에 개역판 성경에서처럼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역자들’()이란 단어는 ‘섬기는 자들’(servants)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어했든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는 문장은 그 의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 문장은 가능한 목적어를 두 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단어를 목적어로 보고 어느 단어를 목적 보어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시편에서처럼 목적어와 목적보어를 바꾸어서 “바람을 그의 천사(天使또는使者)로 삼으시며, 불꽃을 그의 사역자(使役者 또는 섬기는 자)로 삼으시느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cf. G.W.Buchanan, To the Hebrews. 1981,p.18f.)

3.하나님 되심(8,9절)

8절과 9절에서는 시편 45편 6절과 7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부분에서 논하고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증이 왜 성립하는지는 우리 개역판 성경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 이유는 8절에서 2인칭 인칭 대명사를 ‘주’(主)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이여 너의 보좌가 영영하며 너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너’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던 여기서 ‘너’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승[勝)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의 ‘너’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통사람들은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인칭 대명사에 주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논증하는 것을 볼 때,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성경을 얼마나 자세히 읽고 연구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4.창조자 되심(10-12절)

10절부터 12절까지에서는 시편 102편 25절부터 27절까지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창조주 되심과 영존하심을 말하고 있다. 10절 초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주’()란 만물의 주재자이며 또한 우리의 주관자임을 뜻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주께서’, ‘주의’,그리고 ‘주는’은 다 원래 2인칭대명사(너, 당신)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2인칭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구절들과 시편 102편의 전체문맥을 볼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여호와’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70인역에서 ‘주’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예가 많다. 이것은 삼위일체 안에서 위격의 혼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기” 때문이다(cf. Grosheide, 79).

5.천사의 열등함(13-14절)

그러나 13절에서 천사들에게는 이러한 영광과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곧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시 110:1)는 말씀은 천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시편에 있는 이 구절의 서두(“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를 볼 때, 이 말씀은 메시아에게 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14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천사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로서, 그 섬김의 대상은 ‘장차 구원을 상속할 자들’()이다. ‘구원을 상속한다’는 것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천사들은 구원받은 성도들, 곧 종국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영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사들을 경배하거나 의지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길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뿐이시다.

Ill.이같이 큰 구원(2:1~4절)

2장에 들어와서는 앞장에서 말한 사실에서 실제적인 교훈을 도출하고 있다(1-4절). 이처럼 천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믿고 있으니, 우리가 받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위대할수록 우리가 받은 구원도 그만큼 위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조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같이 큰 구원’ 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3절과 4절에서 말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 있는 필자의 “히브리서 난제 구절 해설”을 참조하라).

IV.고난 받으신 그리스도(2:5-10절)

5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다시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말한다. 먼저 천사와의 대비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1장에서와 같다.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나아가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시편 8편 4절부터 6절까지를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히 2:6-8).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시편 8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인자(人子)의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고 하였지만, 만물이 저에게 복종한 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자 예수를 보고 있다(8-9절). 이 사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복종케 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필요함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한낱 이스라엘의 역사책이나 유대교의 경전으로 읽으면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요 5:39).물론 구약 성경의 아무데서나 억지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되지만,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구약의 어떤 구절들에서 합당한 근거가 있을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진행이 필요함을 보고 있다. 만물을 메시아의 발아래 복종시킬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즉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구약의 예언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졌겠지만, 우리 인간의 구원이 배제된 의미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무시된 그리스도 혼자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발아래 두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고난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온전케 되시는 일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10절).

위 시편 8편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직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여기 나오는 ‘인자 (人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깐 동안’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시편 8편 4절(히 2:6)의 ‘인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전 여기의 ‘인자’()는 바로 앞의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여기의 ‘인자’에 대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약에서의 ’인자‘ 란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온 것이며, 시편 8편에서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Grosheide, 91 각주 2).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2장에서 ‘인자’란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Buchanan, 27이 잘 지적하고 있다). 물론 다윗이 시편 8편을 기록할 때 과연 ‘메시아’ 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고 기록했을지는 의문스럽다. 어쩌면 다윗은 그냥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 비록 타락한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 의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저자(제 2 저자)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 역사하시는 원저자(제 1 저자)가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인간 저자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당대의 평범한 말들 가운데 심어 두시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간 저자가 당대나 지나간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이 미래의 메시아 시대의 일에 대한 예언이 되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호 11:1). 시편 2편의 ‘열국을 다스리시는 왕’(王)에 대한 말씀과 110편의 ‘원수를 발등상 아래 두게 될 주’(主)에 대한 말씀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과연 이를 기록한 다윗이 알았을까? 나아가서 이사야서의 많은 메시아 예언에 대해서도 이사야가 그 의미를 그 당시에 이미 알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확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아직 신약 시대에서와 같은 분명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 11)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성경은 인간 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이 들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 9).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을 한밭 인간의 작품으로 보게 되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1997년 6월호 [그말씀], 189-196에 실린 필자의 “선지서 예언의 해석과적용”을 참조 하라).

어쨌든 시편 8편에서 모호했던 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시편 8편에 언급된 ‘인자를’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로 보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시편 8편에 기록된 ‘인자’가 고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첫날에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편을 기록할 당시에 다윗이 이 모든 의미를 다 알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윗은 이 시를 기록할 때 자기로서는 아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시 가운데 고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실 메시아의 모습을 함께 표현하셨다. 전자의 의미는 인간 저자 다윗이 표현하고자 했던 일차적 의미이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참된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후자의 의미일 뿐 아니라 전자의 의미도 받으셨다. 그러나 다윗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나름대로 진리이지만 하나님께서 심어 두셨던 후자의 의미가 더 중요하고 심오한 진리이다. 이 심오한 메시아적 의미는 때가 차매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신약 성경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어떤 구절의 말씀은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 성경, 특히 예언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 이중적 의미 또는 다중적 의미를 배제해 버린다면 근본적으로 구약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부인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단지 인간 저자만 보고 말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인간 저자를 통해 표현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대개의 일상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를 뛰어 넘어서 그 인간 저자가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주실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인간 저자는 대개 당대의 어떤 사실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표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서 장차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것들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이 때에는 인간 저자의 이해와 신적 저자의 이해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 신적 저자의 이해는 인간 저자의 이해를 배척하지 아니하고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은 구약 성경대로 자연스럽게 읽혀지지만, 그 참 의미는 신약성경에 의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된다. 이처럼 어떤 특정 부분에서 성경의 이중적 의미의 가능성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전능하신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다음으로 7절과 9절에 있는 ‘잠깐 동안’()이란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조금(a little), 2) 잠깐 동안(for a little while). 의미상으로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하며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기서 ‘인자가 천사보다 못한 것’과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것’ 사이에 대비되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볼 때‘잠깐 동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된다(Grosheide, 92).곧 예수님께서는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상태로 낮아지셨지만 (시 22:6,빌 2:6-8 참조), 곧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되신 것이다.

V. 우리의 형제 되신 그리스도(2:11-18절)

11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형제가 되신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 앞 문단에서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좀더 발전시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우리의 형제 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救贖)하시기 위함이다(17절). 여기서도 우리는 높으신 그리스도, 모든 천사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께서 홀로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인간을 돌아보시는 사랑의 구주가 되심을 알 수 있다.

먼저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도와 그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 란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 란 하나님 아버지를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생의 근본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 전부터 나셨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를 믿으므로 거듭 태어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출생과 우리의 출생 ‘근원’이 같으므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형제’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논증하고자 하는 핵심이다(11-13절).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혈육'(血肉)에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혈육’에 속하였음을 말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 참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시다(히 4:1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은 헛된 신화에서처럼 사람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이 되신 것은 종의 형체를 가져 비천하게 되신 것이요 엄청난 자기 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신 것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무력화시킴으로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14,15절). 곧 죄에 빠져 죽어 가는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비천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14절의 “마귀를 없이하시며”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이 책에 있는 “히브리서 난제 구절 해설을 참조하라).

그래서 17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자비한’()이란 말은 ‘긍휼히 여기는’ 이란 뜻이다. 곧 죄에 빠져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충성된'()이란 것은 ‘자기의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성실히 이루셨다. 힘들고 짜증나고 고통스럽고 억울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자기의 소임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잘 나타나 있듯이 백성의 죄를 속(贖)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 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이 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새 천년, 새 세기에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며 꼬집고 욕하기를 잘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우리 예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이웃을 감동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되며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된다. 이것이 새 천년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각오와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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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히브리서 2장입니다. 1장, 우리가 지난번에 14절까지 있는 것을 봤고요. 오늘은 조금 기네요. 18절까지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이 없었어요. 나중에 학자들이 읽기 편리하기 위해서 나눈 겁니다. 나눈 게 정확하게 나눈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하긴 해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2장이에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 신학 성경, 구약도 대게 그렇습니다만 저자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개인이 쓰기도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이 아니라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시편이 보통 다윗이 기록했다고 그러지만 실제적으로 다윗이 한 건 아니고 그러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 역사 안에서 형성된 거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2장 오늘 볼 텐데요. 이 히브리서가 약간 지루한 책입니다. 세밀하게 우리가 잘 파고들지 않으면 좀 낯설어요.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고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하고, 복음서는 그래도 좀 낫긴 합니다만, 그리고 바울의 다른 서신들, 로마서라든지 이런 것들은 굉장히 구원의 문제, 의로움에 대한 문제들이 강력하게 표현이 되어 있잖아요. 그렇데 이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약간 색다른 책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같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은 간단하게 A4용지 한 장으로 공부할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문건으로 드렸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어요. 1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자, 들은 것, 들은 것은 구약입니다. 율법이에요. 초기 기독교는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 할 때요. 상당한 시간 동안 없었어요. 당연히 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고 살았습니다. 들은 것, 그런 거 율법에 열심히 좀 하고, 그리고 그거는 제가 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다음 주에 제가 좀 더,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집에서 읽고 할 때는 율법으로 생각을 했는데 다시 읽다 보니까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이, 그 교회 공동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대한 것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가리키는지 아니면 정말 율법을 가리키는지, 제가 약간 혼란이 돼서요. 그 정도로 접어 두겠습니다. 이거 다 끝마칠 때쯤 정확하게 생각이 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것을 잘 유념해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부화뇌동한다, 왔다갔다,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유지하지 못하는 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구약에서도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되지 않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일단 들은 것,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일상생활이 너무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 때문에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그 안에서 서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그런 말이 될지 모르겠어요. 이게 쉬운 게 아닌 겁니다. 이게 쉬운 거라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죠. 잘 붙들고 있어라. 이런 것들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든다고 하는 게 많이 읽어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고요, 그 말씀대로 서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어요. 그게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잖아요. 지금 뭐 다 배우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겠습니다만. 어쨌든 1학년 들어가서 공부할 때 선생님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바둑아 이리 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단어, 문장 하나하나 바로 서는 거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물의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지고 어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커지고 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거거든요. 우리가 수요일 공부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죠. 그러한 한 걸음 한 걸음 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영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기본적으로.

2절,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건 율법이 확실한 거예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그러니까 그 안에 전통이 된 거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천사가 거기 역할 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 2장에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와요. 1장에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이제 모세가 율법과 십계명, 그런 것들을 받아서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전통으로 굳건하게 서게 됐습니다. 그런데 범죄함과 순종하지 않음으로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해서 거기에 대한 벌, 책임, 그걸 당하게 되었다. 간단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드린 유인물을 보시면, 2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대가를 예로써 몇 가지 들었어요. 바벨론의 포로, 로마 식민으로 떨어진 것들, 그리고 각종 고난들, 이런 것들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난과 이런 것들이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아요, 사실은요. 사건 사고도 많고 이렇게 저렇게 인생살이가 엮여져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체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죠.

3절, 그런데 율법에 관계는 그렇고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율법을 바로 순종하지 못함으로써도 그러 한 징벌과 책임,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하물며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냐, 더 심각한 것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이라고 얘기했어요. 구원이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지는 않습니다. 중요하다 그런 뜻이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여러분들이 구원이 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자주해요. 구원 받았다, 구원 얻어야 된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구원이 잡히나요? 제가 앞에서 찬송가 부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 찬양한다고 할 때 주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 했잖습니까? 그 질문을 여러분들이 자꾸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아도, 사실 근본은 다 끝나지 않은 거예요. 종말까지 가기 때문에 여러분 질문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란 것도 그렇고 지금 구원이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구원이 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간단히 교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아니라 살아서 평화를 누린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의 기쁨을 누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관념적인 거예요. 틀렸다는 게 아니고 옳은 이야기인데 그것이 더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충 되어야 합니다. 그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보충되어질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냥 한 말씀만 거기다가 생각을 그런 쪽으로 하시라는 차원에서 도움의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게 생명에 관계된 문제에요. 과연 인간의 생명이 뭐냐, 삶이 뭐냐, 그거를 이해하는 게 깊어질수록 이 구원에 문제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인생살이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늘 구원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여기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듯이 그런 걸 머릿속에 넣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정도 수준에 떨어지게 되고 말겁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등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철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많이 얘기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질문하자, 구원이 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라 그 뜻입니다.

3절입니다. 중반부터 보겠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 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내용은 간단하죠. 예수님 말씀 하신 거고요. 그리고 들은 자들이, 이들은 누구일까요? 들은 자들은. 당연히 제자들이죠. 사도들, 초도 기독교 1세대나 2세대 그러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거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들은 자들이 전해준거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누가 기도를 많이 하고 갑자기 번쩍, 이렇게 깨달음이 있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역사에요. 그러니까 예수가 말한 내용, 바실레이아, 하나님 나라, 그분이 그 얘기를 어떻게 했느냐, 말씀하신 거와 구원이 연관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제 안계시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들, 직접 만난 사도들, 이 사람들이 뒤에 전한 거잖아요. 계속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역사죠 흘러 내려 온 것. 이것을 소상하게 따라가는 게 신앙에서 중요한 거예요. 복음서에 어떤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지 사도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그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쭉 역사를 거쳐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을 아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게, 배우는 거죠.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주로 말씀하신 거고 또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거다.

4절,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굉장히 단어들이 좀 복잡하죠. 표적, 기사, 능력, 성령이 나눠 주신 것, 이런 게 나와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라서 다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 우리가 그대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요. 다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제자들이 후세대에게 전해 준 것, 그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가 지금까지 내려오게 됐는데 그러나 그런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령의 활동이시다,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4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죠? 큰 구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조금 주제가 바뀌면서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다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들이 나와요. 몇 번 나옵니다. 2절에서도 천사가 나왔고요. 천사라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날개달린 어떤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천사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또 주의 사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이는 날아다니는 천사, 날개가 있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 그렇게 하면 약하고요. 신학적인 상상력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는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천사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 할 수 있으세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성경도 기록됐고 많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연결 되지 않는 거예요. 헬라 철학에서는 제우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을 가리켜서 헤르메스라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그 어떤, 보이지 않으나 분명한 힘을 가진 어떤 이를 가리켜서 천사라고 얘기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헷갈릴 수 있어요. 천사라고 하는 낱말이 있으니까 자꾸만 구체적으로 생긴 어떤 것을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허황된 것, 확실하지 않은 건데 말만 붙인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안 되고요. 그러한 완전히 우리하고 다른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그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는 그 사건, 그걸 가리켜서 계시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알린다고 하는 것, 거기에는 그냥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떤 시각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의 어떤 인식이 굉장히 좋아서, 지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워져서 알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거기서 있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힘, 알리심, 그걸 천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많았어요. 굉장히 그런 것에 대한 생각들이 절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사라고 생각을 한 기독교 집단들도 있었어요. 이단이라기보다도 천사는 초월적이니까, 뛰어나니까,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천사쯤으로 생각을 한 거죠. 초기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천사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하고 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도 사실은 영지주의, 신비롭게 뭔가를 안다, 영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건강 했어요 이런 면에서. 굉장히 신비스러운, 비밀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비이고 비밀이지만 그것을 조금 아까 얘기한 전문적인 용어로 영지주의, 천사론, 이런 쪽으로 가지 않고 대단히 역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꾸준하게 밀고 나갔어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만은 아니죠.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긴장을 쉽게 해소 시키지 않았어요.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5절,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천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천사 중요한 게 아니다.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고 얘기 했잖아요.

6절,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에서 증언하여 가로되 거기서부터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요. 6절부터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계속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각주에 ‘ㄴ’보면 시편 8편 4절 이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과 인자, 이건 뜻은 다르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 재밌어요. 그를, 그는 누구죠. 여기 나오는 사람과 인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그 잠시라고 하는 단어에도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기독교에서 어떤 파가 예수님을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은 굉장히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우월성, 어떤 초월성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우월하잖아요, 사람보다. 날아다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선지, 뭘 미리 내다 볼 수 있고 말이죠. 어떤 영향을 받지 않잖아요.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신적인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런 쪽에 가두어 가지고 쉽게 처리하지 않고 계속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붙든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인간과 천사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뛰어나요. 천사가 당연히 뛰어나죠. 그걸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천사보다 못하다. 외롭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 다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인간성, 그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래도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그렇게 된 거다.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동안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신 공생애 동안이죠.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예수님의 부활, 예를 들자면, 그걸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천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영광과 존귀의 그 분이 되셨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천사들에게 복종한 게 아니라고 얘기했고, 이건 여러분들 머릿속에 구도를 보고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니다 인간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이것을 교통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고 했었던 영지주의나 천사론 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이 옳은 게 아니다 그걸 말하려고 하는 거죠.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만물이 복종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참 이 히브리서 기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하네요. 그리고 어렴풋하게 얘기하지 않죠. 아주 정확하게 얘기 하는 거죠. 이게 눈에 들어오시죠. 그리고 애매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되는데 그게 실제로는 아직까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8절 후반절에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당하고 힘들고 죽고 세상에 악이 있고 계속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걸 그냥 어렴풋하게 지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9절,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난, 십자가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 이런 말들도 굉장히 관념적이죠.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광채, 이렇게 표현 많이 해요.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런 게 다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들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얼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요. 하나의 은유 방식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걸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영광과 존귀라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의 사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아주 궁극적인 생명으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서 십자가와 구원, 십자가와 영광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영광은 승리죠. 정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에요. 십자가는 실패에요. 고난이고 이건 누구라도 다 피하고 싶은 거고요. 이 세계는 아직까지도 십자가의 모습들이 많이 있는데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비약, 뭐가 좀 필요합니다. 생각의 비약,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초월적인 능력자로만 보아요. 그렇게 또 보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요소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거는 실질적으로 실패입니다. 그거는 고난이고 말이죠. 천사는 죽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하셨는데 오히려 천사들은 죽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고 그 방식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로 하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게 연결이 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그 다음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래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니까 천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없죠. 죽을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죽으셨고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의 관으로 씌우셨기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살리신다, 구원하신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러한 기독교의 기초 교리입니다. 그것을 이제 성서가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고요. 우리가 그것을 좀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라고 하는 것은 하기오스, 그러한 단어인데 구별되었다는 뜻이에요. 성서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1절은 어떤 제사 행위와 연관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구별되느냐.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11절,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라고 하는 말은 구별시켰다는 뜻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말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거기서부터 구별된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별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11절에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에요. 그 다음 12절, 12절에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형제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절에서도 계속해서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4절, 자녀들은, 형제와 비슷한 차원의 의미에요.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혈과 육, 피와 살인데요. 그냥 인간의 구체적인 형체를 가리켜요.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때동안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앞에 있는 이야기하고 좀 비슷한 반복입니다. 똑같이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받으셨다는 그러한 뜻이죠.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표현이 좀 재밌죠.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듯알듯한데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했다. 대충 그러려니 생각하면 되긴 하겠지만 과연 뭘까요?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의 공식하고 비슷한 건데 이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그건 이제 죽음의 세력한테 굴복 당하신 건데 결국 예수님도 천사처럼 초능력이 있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고도 용케 풀려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성경의 기록처럼 확실하게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의 세력에 굴복 당한 건데, 무너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전제한다면, 부활이 뭐냐 지금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걸 전제하게 된다면 앞으로 죽게 될 모든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공식은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결국 마귀를 멸한 거죠. 죽음의 세력이 무너진 거죠. 그런데 이것은 부활이 뭐냐 이런데 까지 더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그건 오늘 주제는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에요. 제가 8시 30분까지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 믿음, 그런 게 있다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당연히 자유로워 진거죠. 종노릇하는 것에서부터 풀리는 거죠. 16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천사 많이 나오죠. 그 때 당시 천사론 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얘기예요. 그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내가 뭐 신기한 거 봤다 요즘에도 많이 기독교 신앙이 그렇잖아요. 환상 봤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들이에요. 그게 아니다. 천사를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들, 혈과 육을 가진 그런 나약한 사람들이다. 그걸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되어있습니다. 17절, 그러므로, 거의 결론에 갑니다. 그가 범사에, 그는 누구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그가 범사에 모든 일에 형제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처럼 되어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만 구원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하심이라.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구약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랑 똑같이 죽었어요. 그게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를 믿음으로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고 하는, 그러니까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그 얘기죠.

마지막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우리와 똑같이 그렇게 사셨다는 이야깁니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쭉 공부하면서 봤듯이 천사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을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써, 단순히 그들에 대한 반론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쨌든 천사에 대한 호감, 이런 걸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시다.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2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 그 과정에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 길에서, 귀중한 디딤돌이 되도록, 영적인 소양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기에 죄와 죽음가운데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셨다는 그 놀라운 고백, 그리고 증언을 저희들이 듣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지금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줄로 믿습니다. 2015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년 마칠 때까지 우리의 삶을, 특별히 신앙의 삶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히브리서 2장. 하나님의 큰 구원

히브리서 2장에서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된다. 특히 구원사역과 관련된 천사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장차올 세상올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5절)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혈과 육을 가지고 온 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곧 교회를 붙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16절)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만물을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앞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한 교회인 성도들을 위한 사역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해서 천사는 하나의 도구는 될 수 있어도, 구원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을 대상도 아니고, 구원 사역을 통해서 직접적인 은혜를 입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구원 사역과 관련해서 천사들이 전면에 나올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측면에서는 교회, 곧 성도와 비교해도 우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등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가 받을 그 보응에 대한 것이다.(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큰 은혜로 베푸셨는데 이것을 알고도 그 은혜를 거절한다면(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거기에 따라서 보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장을 받고도 여러가지 말도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한 보응이 당연한 것처럼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그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그 보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은혜가 크면 클 수록, 하나님편에서의 노력과 열심이 크면 클 수록 그들의 거절은 더욱 큰 악이되며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14절)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가 고난을 통과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0절)

2.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하셔서 그 아들이신 예수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 처하심을 통해서(모든 시험을 받으심)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실제적 정서적 동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절)

3. 우리를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고,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평생에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자유하게 해 주셨다.(14,15절) 즉 우리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시려고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 위해서 행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큰(은혜를 베푸신)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소식을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3,4절)

큰 은혜를 받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전혀 다른 운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서 그 큰 은혜 아래 오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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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4 (히브리서 2장 요약, 히브리서 2장 1절~4절, 구원을 소홀히 여김, 큰 구원,하나님의 증언, 완전함에 이름, 성육신, 성화)

강해 노트 자료: www.KeepBible.com, 다운로드 자료실, 히브리서 강해노트

(다운로드 귀찮으면 아래 내용 보시면 됩니다.)

교제 :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 생명의 말씀사 총판), 히브리서 연구(M. R De Hann 지음, 김영균 옮김)

영어성경 : www.e-sword.net (성경은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야 하니 꼭 설치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강해 제4과

히브리서 2장

요점: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자들은 천사들의 중재에 의해 주어진 율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그분께서 사람이 됨으로써 여러 목적들을 이루심을 보여 준다.

I. 아들이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천사들에 의한 말씀에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은 자들도 있다(2:1-4).

II. 다가오는 세상은 천사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이 되신 아들의 지배를 받는다(2:5-9). 이것은 구약성경의 성취이다(2:9).

III. 사도는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설명한다(2:10-18).

A. 성육신을 통해 구속자와 그분의 백성이 동일시되었다(고난, 시험 등에서).

B. 백성의 모델이 되셨다.

1-4절: 큰 구원을 멸시하지 말라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대언자들과 천사들과 상대가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가 들은 것들: 주님에게서 직접 혹은 사도들에게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1. 이것을 구원의 상실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2. 이것은 구원을 소 홀 히 여기고 성도로서 섬김 과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뜻 한다 .

3. 3절이 이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준다. ‘ 우리가 구원을 소 홀 히 여기면 ’

4. ‘우리’는 기록자와 수신자들 모두를 가리키며 성도들이다.

5. 구원을 거 부 하는 것이 아니라 소 홀 히 여기는 것이다 .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이 있음을 뜻한다. 여기의 히브리 성도들은 은혜로 거저 주시는 이 큰 구원을 이미 받아 의롭게 되어 안전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구원 뒤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것은 곧 성도가 완전함으로 나가는 것이다( 히 6 : 1 – 2 ).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이다. 어린양의 피에 의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성도들의 대다수는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죽었다(심지어 모세도).

6. 그러므로 빌2:12를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야 한다.

7.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work out your salvation).” 개역처럼 ‘구원을 이루라’가 아니라 이미 가진 구원을 일로, 행위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워크아웃 기업, 이미 있는 기업, 완전함에 이르는 것

8.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있다.

9. 고후5: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10. 여기의 ‘우리’도 구원받은 자들, 구원받은 뒤 몸으로 행한 것들에 대한 심판이 있다.

11. 이 심판석에서 선한 판정을 받은 보상을 받는 자들이 있고 소홀히 여긴 자들은 손실을 당할 것이다.

12. 고전 3 :11 – 15

13. 여기서 보상의 손실을 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히2:2의 ‘피할 수 있으리요?’의 뜻이다.

14.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다.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보상의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히2:1,3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15. 구원받은 성도의 임무: 엡 4:13 – 15

16.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은 받되 부끄러움을 당한다(요일2:28).

17. 그러면 패배의 삶에서 벗어나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18. 히12:1-2, 각종 죄 처리, 예수님께 고정

19. 그리고는 히12:11-13처럼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2절: 구약의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제정되었다(신33:2; 시68:17; 행7:38; 53; 갈3:19).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1. 정당한 보응의 대가를 받았다(신32:35; 민15:30-31; 고전10:1-12).

2.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

3. 그리스도인의 죄는 사실 불신자의 죄보다 더 나쁘다(눅12:48).

3절: 이 큰 구원(great salvation)

1. 창시자가 위대하다.

2. 큰 죄들에서 구원하므로 위대하다.

3. 지옥의 큰 위험에서 구출하므로 위대하다.

4. 사람에게 위대한 것들을 주므로 위대하다: 하나님의 아들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게 함.

5.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위대하다.

6. ‘주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침례자 요한의 준비, 예수님의 선포, 이후 제자들

7. 이 말은 구약에는 구원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요1:16-17).

8. 구약의 예표와 그림자가 실체로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말이다.

9.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확증했다(행1:3). 바울은 사실 직접 계시를 받았다(갈1:16-19).

4절: 하나님의 증언

1. 표적, 이적, 기적, 성령님의 선물들(행2:4-6; 롬12:3, 6; 고전12:4-11; 고후12;12)

2. 사도들의 증언을 확증해 준다(막16:20).

3. 그분의 뜻에 따라(고전12:7, 11)

4. 영적 선물의 본질: 총 18개, 지속되는 ‘청지기 선물’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표적 선물’

a. 표적 선물(사라지는 선물)

(1) 사도, (2) 대언, (3) 기적, (4) 병 고침, (5) 타언어(방언), (6) 방언 통역, (7) 지식

b. 청지기 선물(지속되는 선물)

(1) 지혜, (2) 영 분별, (3) 주는 것, (4) 권면, (5) 섬김, (6) 긍휼을 베푸는 것, (7) 다스리는 것, (8) 믿음, (9) 가르치는 것, (10) 복음 선포자, (11) 목사 겸 교사

c. 성경이 완성되기 전인 AD 50-60년경에 어떤 사람의 대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적을 보 임 으로

(1) 예수님의 사역(요3:2; 마10:1, 7-8; 11:2-5; 요20:30-31)

(2) 바울의 사역(롬15:18; 고후12:12)

(3) 사도들의 사역(히2:4)

d. 처음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기적 선물들이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완성되어 진리와 오류를 구분해 주면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e. 성경 기록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마지막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딤 후3 : 15 – 16 ).

5. 이런 표적들은 한시적인 선물, 완전한 말씀이 AD 90년경에 주어진 이후로는 말씀을 통해 확증한다.

[히브리서 2장 설교말씀] 구원의 확증(히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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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2장 설교말씀 중에서 구원의 확증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주간의 찬송 : 221 (나가난 복지 귀한 성에)

읽을 성경 : 히 2:1-18

제목: 구원의 확증

우리가 받은 구원과 복음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구원을 등한히 여겨 무관심하게 생활한다면 구원위 귀중 성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할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도 불순종하여 공변된 보응을 받았는데 하물며 이 복음의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면 어떤 보응을 받겠는가? 이 구원의 확증은 소홀히 여긴다면 어떤 보응을 받겠는가?? 이 구원의 확증은

1. 예수님의 확증.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자”라고 하셨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으로 확증해주셨다.

2. 사도들의 확증. 그들은 다 순교로써 이 말씀을 확 중하였다. 누가 거짓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증거가 진실임을 의심 없이 믿는다.

3. 표적과 기사와 능력들의 확증.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이적과 가사와 능력은 창조 시부터 모이셨으나

특히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루셨다. 그 부활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 확인하는 사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롬 1:4).

4. 성령으로 확증.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며 그의 말하신 것을 기억나게 사시며,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하여 믿고 고백하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해 볼 때 우리는 그분에게서 인간 예수로서의 상역이라는 이중적인 면이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일치가 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이와 같은 사랑이 있었으므로 인류는 절망의 구렁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5. 인류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들도 주께 우리가 사랑이라는 용어로 표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도 주께서 우리에게 모여주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서서는 무색하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6. 성도들을 거룩케 하사 형제라 부르심. 주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주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음은 물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거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도 없다. 죄의 옷은 벗어버리고 거룩함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뿐이다.

7. 예수로 말미암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죄아래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사건임이 분명한데 주구든지 예수로 말미암으면 이 놀라운 사건의 주역이 된다. 자녀란 유업을 잇게 될 후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예수께 대한 믿음의 여부는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는 최대의 관건이라 한다.

8. 결심과 기도

1)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케 하소서!

2) 교회 제직들의 가정과 사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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