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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주석 | [생명의 삶] 20160128 지혜롭고 순결하며 주님만 두려워하십시오 (마태복음 10:16~33) 빠른 답변

[생명의 삶] 20160128 지혜롭고 순결하며 주님만 두려워하십시오 (마태복음 10: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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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주석

마태복음 제 10장 =====10:1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 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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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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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1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새번역,10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우리말성경,10 여행 가방도 여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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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9/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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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0장

10:1 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태복음 10:1-4)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 혹은 전권대사로 임명하셨던 자는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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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9/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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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해석

이런 천국적 품위와 영적 측면의 원리들은 그분께서 밝히 알게 하신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열 두 제자란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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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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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마태복음 10장 흐름정리>.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전도 사역자로 파송하기 직전에 베푸신 주님의 교훈으로서, 시간상 제3차 갈릴리 사역 초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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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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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제자의 고난, 제자의 영광 – Godmade

강해설교/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0장: 제자의 고난, 제자의 영광. mts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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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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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주석 (1장-10장) – 네이버 블로그

마태복음 제 1장.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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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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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을 도와주는 마태복음 – LAB 주석 시리즈 – 갓피플몰

마태복음 10장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다(10:1-16) 예수께서 핍박에 대해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다(10:17-42) 마태복음 11장 예수께서 요한의 의심을 덜어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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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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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설교 – 밤중소리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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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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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 옛신앙

물론, 그의 구주 되심은 전제되어 있다. (6) 본서에는 6개의 설교들 혹은 교훈들이 있다: 5-7장, 산상설교. 10장, 전도자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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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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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복음 10장 주석

  • Author: 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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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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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주석

마태복음 제 10장

=====10:1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

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

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

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

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

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

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

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

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

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

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

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사(* ,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

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

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

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

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

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

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

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

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

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

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

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

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

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적인 충만의 도구

로 사용되었던 사도들의 단회적(單回的)이고도 제한적(制限的)이며 유일무이(有一無

二)한 특수 권능이었다.

=====10:2

사도(* ,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

(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

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

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

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

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

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

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

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

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

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

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

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

(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 )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벱새

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

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

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

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

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

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

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

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

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

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안드레(* )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

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야고보, 요한(* )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

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

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

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

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

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

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

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

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

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

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10:3

빌립(* ,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

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

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

(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

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바돌로매(* )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

다고 전한다.

도마(* )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

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

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

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

였다고 전한다.

세리 마태(* , 맡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

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

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

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

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

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

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

는 없는 내용들이다.

다대오(* ,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

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 )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

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

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

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

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

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10:4

가나안인 시몬(* ,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 )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

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

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

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 ,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

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

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

(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

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

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

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

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

(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

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

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10:5

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

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

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

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

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

(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

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

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

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

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 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

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

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

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

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

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10:6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

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

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

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10:7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

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

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케뤼쏘’

(*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

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

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

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

(Quesnel).

=====10:8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

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

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

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

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

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

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

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

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

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

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

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

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

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

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10:9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

이다.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

현들이다.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

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

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

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

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

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10:10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

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

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

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

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

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

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

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

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

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

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

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

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

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

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10:11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

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 코메)은 자연 발생

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

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

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

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

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

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

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

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

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

다.

=====10:12

평안하기를 빌라(* ,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

하면 단순히 ‘인사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

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

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10:13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

(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

킨다.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

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

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

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

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

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

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10:14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

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

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

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

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

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10:15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

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

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

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10:16

보라(* ,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

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

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

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

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

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

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

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 )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 )

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

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

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

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

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

하셨다.

=====10:17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떨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

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

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

(Bruce)를 가리킨다(33절).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 )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

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

리킨 것 같다.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

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

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

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

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

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

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

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

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

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

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

(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

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

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10:18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

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

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

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

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

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

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

다.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

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

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

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

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

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10:19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

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

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

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

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

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

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

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

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

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

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

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10:20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

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

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

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

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

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

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

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

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

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

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

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

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

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

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

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

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

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

의 신(사 11:2) 등이 있다.

=====10:21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

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

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

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

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

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

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 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

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10:22

내 이름을 인하여(* ,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

(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

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

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

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

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

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

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

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

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

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

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

스'(* )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

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

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

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

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10:23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

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

(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

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

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

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에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

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

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

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

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

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

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

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

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

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

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

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

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

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

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

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

를 맞게 되었다(5:17-48).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

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

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

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

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

이다.

=====10:25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

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

도 만족할 것이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

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

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 )과 동일한 것

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

이코데스포테스'(* )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

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

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

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

=====10:26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

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

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

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

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

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

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

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

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

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

토'(* )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

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

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

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

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

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

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

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

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0:27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과

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

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

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

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

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

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

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

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

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

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

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

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

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

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

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

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

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에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

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 이는 유한한 능력, 그것도 현세에

서만 발휘할 수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

로 육(肉)과 영혼(靈魂)을 제시하셨는데(전 12:7; 롬 8:10; 고전 5:5; 히 12:9) 그중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요 불멸의 것이므로 영혼을 해(害)할 권세를 가진 자는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에 비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몸이

란 영혼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

라서 일시적인 육의 죽음은 영원한 영혼의 멸망과 비교했을 때 역시 그 가치가 극히

약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

을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 메 포베데테 아포) – 이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단 한 순간의 공포마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는 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실로 영.육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지니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Bengel). 일찍이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은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가질것을 당부한 바

가 있다(벧전 3:14, 15). 인간이란 고난이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그 만을 두려워할 때,

또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할 때, 이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 몸이 물질적이요 현재적이라면 영혼은 비물질

적이요 영원적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동시적 멸망은, 곧 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파

멸을 뜻하며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동시적 멸절(滅絶)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은 전

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관할하고 계신다. 인간으로

인한 두려움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능히 극복된다(Cramer).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옥'(* , 게엔나)이란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의 전인격

이 사후(死後)에 거하면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5:22, 29, 30;

18:9; 23:15; 약 3:6). 이에 대해서는 막 9:43-50 강해 ‘지옥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멸하시는’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레사이'(* )는 완벽

하고도 철저한 멸망을 뜻하기보다 영벌(永罰)의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

해해야 할 것이다(25:46; 막 9:47, 49; 살후 1:9). 바로 그런 점에서 누가는 ‘지옥에

던져 넣다 –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보게 할 의사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 12:5).

두려워하라(* , 포베이스데) – 이는 앞의 ‘두려움’과는 달리 습

관적으로 항상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자에게 세

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예비하는 참지혜가 아니겠는가? (잠 9:10)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약간의 푼돈에 두 개의 생

명이 팔릴만큼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

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앗사리온’이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를 가진 적은 돈이다.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에도

이 앗사리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 아이사르), 이때 이 금액의

가치는 네 개의 은(銀) 알맹이에 해당되며, 최저의 금액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Clarke).

참새(* , 스트루디아) – 새의 종류를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아주 작고 또 매우 흔해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새로, 가난한 유대인들의 식량이 되기도 하였고 또 슬픔과 고독의 상

징(symbol)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값싼 것

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참새와 같은 몇몇 조류들이 예

루살렘과 욥바 등지의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 이는 매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표현이다. 즉 예수는 우주

만물(宇宙萬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자들에

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6:26).

허락지 아니하시면(* , 아뉴) – 이는 적극적으로 참새를 죽지 않게 했다

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존과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숙히 관여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참새가 붙잡히고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나님이 지정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문제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

나님의 보살핌과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가

장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창조주로서 그들을 지키시는 것이다.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는 사냥군의 화살이나 돌팔매에 의해

땅바닥으로 추락(墜落)하는 돌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F.R. Fay). 혹자는

(Chrysostom, Origen) 이를 사냥군의 올무에 걸리는 상황으로 이해하나 적절한 해석이

라 볼 수 없다. 한편 누가는 이 상황을 새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잊어버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찮은 생명체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자상한 배

려를 더욱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눅 12:6).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예수께서는 앞의 ‘참새’와 대조적으

로 ‘너희’를 강조하심으로 그 보살핌의 강도(强度)를 더욱 깊게 하셨다. 한편 ‘세신

바 되었나니'(* , 에리드 메메나이 에이신)란 분

사형태의 완료 수동형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이미 옛날부터 셈을 하신바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관심의 시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으로 그때부터

우리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머리털은 너무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사

람들에게 있어서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한

일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시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들

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공중에 나는 보잘것없는 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

어나는 극히 사소한 문제와 보이지 않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

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10:31

두려워하지 말라 – 이 말씀은 이곳에서 세번째 언급되고 있다. 첫번째는 모든 진

리가 드러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두번째는 박해자들

이 아무리 성도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

니며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이

었다. 그러나 세번째로 언급된 이 말씀은 앞의 두개의 내용보다 더 고무(鼓舞)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

음부터 긔까지 다 세시고 간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불필요성을 언급하신 것이

다.

많은 참새보다 – 한 앗사리온에 둘씩 팔리는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감찰하시거늘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

게 내버려두시겠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고 구속하신 한 심령의 가치

를 감히 어느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고통이

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

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며 설령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

것은 복음과 의(義)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므로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10:32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 ,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으로 예수와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시인하면’이란 말은 오히려(신앙을) ‘고백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갈 2:20) 이룬 존재로서 예수 그분이 바로 자신의(主)이

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는 것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시 66:16). 이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마음으로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

의 영(靈)을 받고 또 그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활로 표현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는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7:21)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니지 않으

면 안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 먼저 ‘하늘에 계시 내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의 초

월적 권위와 무궁한 사랑을 암시한 표현인 동시에 성자 예수와의 지극한 친밀감을 나

타내준다. 그리고 ‘아버지앞’이란 모든 인간으 종말적 귀결(conclusion)지점, 곧 심

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으며(요 5:22),

바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

고 예언 하였다(고후 5:10).

저를 시인할 것이요 –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是認)

하면 주께서는 심판날에 우리를 그와 똑같이 시인해 주실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의 충성을 기쁘게 여기고

(25:34-36, 40; 계 2:10), 또한 그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中保)의 간구를 아끼지 않으

신다는 의미인 것이다(히 7:25).

=====10:33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 사람앞에서 주를 부인한다는 말씀은, 곧 자신과 그리

스도와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치 않고, 그분을 주(主)로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

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결과 하나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며 하늘의 신령한 것 보다는

지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영교(靈交)를 단절한 채 세속적

인간 관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한편 이것은 베드로와 같은 순간적인 부인(否認)이

아니라(26:69-75) 전생애와 전인격을 통해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차

이를 명확히 판가름하실 것이다(Homer A. Kent, Jr.).

저를 부인하리라 –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메시야로 인정치 않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심판장이시며 대속자이신 만유의 주로부터 부인당하고 버림받게 된다

(7:23; 딤후 2:12). 왜냐하면 예수를 부인하는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과 사

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들은 자신의 열매(입술과 행위)를 자

신이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실로 현세에서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

리의 영원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

=====10:34

내가…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예수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사야가 와서 정치적 해방

과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야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 같은 그릇된

기대들을 일거(一擧)에 거부하시면서 당신이 이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피력(披瀝)하셨

다.

화평이 아니요 – 이 어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순전히 불화

(不和)와 반목(反目)을 일으키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평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 )인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 )로 번역된다. 유대인들은 영적 문제이든 세속적 문제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복을 기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이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꽃피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문에서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를 유대인들

이 고대하던 바로서의 화평, 즉 현상적(정치, 경제 등)이고 외적인 평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는 본질적(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요일 4:10)이고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검을 주러 왔노라 – 이사야는 메시야의 탄생을 ‘평강의 왕’이라 예언하였으며(사

9:6), 에수 탄생시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그의 탄생을 두고 “땅에서는 기뻐하심

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사실 예수는 평화의 실체

이자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다(눅 1:79; 요 14:27; 롬 10:15; 골 1:20). 따라

서 이곳에서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sword)을 주러왔다고 하신 것은 메시야의

임하심으로 야기되는 그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일 것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다’는 뜻의 원어 ‘바

레인'(* )은 ‘던지다’는 뜻으로 긴박하고도 급작스런 전투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문구로서 본문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高潮)시켜준다. 여하튼 검이라고 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며, 무기로서 검을 준다는 것은 적대감을 유발시

켜 투쟁과 분열과 전쟁을 발발케 한다는 것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

에 평화의 신국(神國)을 건설키 위해 오셨는데(5:9), 이 신국은 곧 땅 위의 죄악된 질

서를 척결(剔抉)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메시야와 그의

통치를 완강히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생 결단의 치열한 혈전

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요 14:27; 16:33). 한편 그 전투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10:35

내가 온 것은 – ‘내가 왔다'(* , 엘돈)는 표현은 예수의 기독론적이

며, 종말론적인 자의식(自意識)을 반영해 준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 본문은 미 7:6의 인용으로써, 미가는 아하스 왕

시대의 죄악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예수는 복음이 빚어낼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

다. 즉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모 자식 간의 가족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자신이 오신 목적이 있다고 천명(闡明)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분명 에수의 참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즉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지금 게속해서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러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오셨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즉 제자들의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될 때 수많은 박해가 예상되지만 그들을 가

장 많이 핍박할 자는 이방인이 아닌,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13:53-58; 요 7:3-5), 자

기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가장 핍박한

자들은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성

도들은 여기서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

다. 적대감을 갖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본

문에서 특이한 것은 젊은 세대(결혼한 아들 – ‘사람’, 미혼의 ‘딸’, ‘며느리’)가 그리

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늙은 세대에 항거할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는 점이다. 이는 결국 (1) 복음의 생동감 넘치는 침투력과, (2) 고답적(高踏的) 사상

에 물들지 않은 여린 신앙인들의 복음에의 열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불화하게'(* , 다카사이)란 ‘둘로 나누

다’는 뜻으로 신앙 문제에 관한한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연합(聯合)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어떤 불신자들은 이 구절을 보고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비난하고 또 일부 신자들은 가족까지도 무시하거나 원수 취

급을 해서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앞장 서서 가족의

불화와 반목을 야기시키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본문의 말씀을

그릇되게 이해한 데서 나온 엄청난 파행(跛行)적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말

씀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는, 당신을 신앙하며 헌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많은 사

람들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招來)하는 일임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주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케 한다. 그 까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접한 각인(各人)의 부패한 심성(心性)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

이다.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 이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연적인 성품에서 나온

혈연적, 인본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장면이다. 즉 예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

문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

은 그리스도의 제자된자의 제일의 의무요 본분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

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definition)해 둘 필요가 있다. 즉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자연적인 애정의 표시, 즉 혈육간의 사랑에

는 흔히 ‘필레오'(* )란 말을 쓰고, 차원 높은 신(神)적이고 윤리적인 사

랑을 나타낼 때는 ‘아가파오'(* )란 말을 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남녀간의 육적인 사랑이나 가족간의 애정을 넘어선 절대적 신뢰와 모든것을 초월한 종

교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주로 이 용어가 쓰인다.

그리스도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차선(次善)이나 여분으로서가

아닌 최고(最高)의 우선적 사랑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뜻이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란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이다.

=====10: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刑場)에까지 가야 했다(27:32),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

대 반란군들이 대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건이 이전에 여러번 있었다. 특

히 갈릴리를 중심한 유다의 반란(행 5:37)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 형틀의 이

슬로 사라져 간 적이 있었다(Jos, Antiq. XVII, 10:10).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제자

들은 이 십자가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십자가란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러한 시련까지도 감내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否定)에 대

한 실제적인 요구였다. 한편 예수는 그때까지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발설(發說)하

신 적이 없으셨지만, 적어도 당신께서는 곧 지게 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Bengel).

나를 좇지 않는 자도 –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어려움

과 고통, 즉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또 억울해 보이는 시련과, 또 죽음의 아픔까지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라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

자가는 질적으로나(인류 대속 – 헌신과 충성), 시간적으로(영원 효력을 지닌 단회적

사역 – 계속적 사역) 큰 차이가 있다. 여하튼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받은 희생과 죽음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하는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

다.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 목숨에 해당한는 원어 ‘프쉬케'(* )는 혼

(soul)이나 생명(life)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프쉬케’는 또한 본문처럼 일시

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모두 함축한 단어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한부(時限附)적인 생명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영원

한 참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내동댕이 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

리고 박해와 관련된 이 문맥에서 우리는 이 구절의 내용을 처참하고도 굴욕적인 순교

(殉敎)까지도 각오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의 참 신앙을 버리면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목숨을 잃는 자는 –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

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되 생명까지 희생하는 자는 다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바치는것은 그 어떤 것이라

도 조금도 상실(loss)되지 않는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칠 때 그것은 죽는것이 아니

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즉 생명은 주 안에서 거듭 태어날 것

이고 재물과 시간은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 – 보냄을 받은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

다는 의미이다(눅 10:16; 요 12:44, 45; 13:20; 행 9:4; Mishna, Berach, V.5). 예수

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자기를 보낸 자를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자는 자기를 보

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44, 45). 따라서 제자들은 단순 대리인

(代理人)으로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 지체(肢體)로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

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아가

자기들의 생각과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 먼저 ‘선지자'(* , 프로페테스)란 히브리

어 ‘나비'(* )를 번역한 말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그 말씀을 전파하

는 사역자를 가리킨다(삼상 10:10; 렘 1:9). 그리고 ‘이름으로’란 ‘뤠쉠’이라는 랍비

적 아람어의 전치사로 보아 ‘…때문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Moffatt). 즉

본문은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로 번역한다. 문맥상 이러한 번역도 가능하며, 이름

과 그 인격의 본체 및 지위와 결부시켜(6:9) 해석해도 무방하다. 여하튼 선지자의 이

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선지자를 단순히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의

차원에서 떠나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곧 선지자로서의 지위에 합당하게 대우한

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의 상급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

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선지자의 상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자들인만큼, 모든 사람

들이 다 선지자의 일을 할 수는 없다. 한편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것은 결코 작은 영예(榮譽)가 아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은 선지자

를 우대함으로써 그의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여 그가 받는 은혜와 보상을 다소나마 받

을 수 있는 것이다(왕하 4:8 ff).

의인의 이름으로 –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13:17; 23:29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이전(주로 마카비 시대)의 인물이나 구약 시대의 의인을 지칭함인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의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

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행 22:14; 약 5:6). 한편 다니엘은 의인들의 최후 승

리를 예언하면서 구원을 얻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의롭다고 묘사한 바 있다

(단 12:1-4). 여하튼 이 말을 제자 파송(派送)사건을 계속 다루고 있는 본문에 적용

하면 이 ‘의인’은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훈도(薰陶)를 따르며, 그들이 제시

한 예수를 온전한 믿음으로 수용(受容)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5:20), 이

러한 해석이 적절한 듯이 보인다.

=====10:42

제자의 이름으로 – 40-42절은 제자들을 격려, 위로하는 강화의 결말부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병렬(竝列)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동일한

대상 즉, 12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으며(Allen, Manson), 다른

이들은 이들 모두가 각기 신분과 직책이 다른 구별된 특수 계층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Hill). 아마도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뒤이

어 나오는 ‘소자’란 말과 연결시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

자들을 더욱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소자’라 부르셨던 것이다(25:40).

소자 – 소자는 흔히 배우는 자(사 60:22; 슥 13:7; A. T. Robertson)나 미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18:6, 10; 막 9:42) 본문에서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모두

포함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나 사도들 그리고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작은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가치관에서는 섬기는 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

선지자나 의인, 사도들은 모두 이 소자의 신분에 있다고 본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 실로 찬물 한 사발의 제공은 선행의 가장 초보(初

步)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하

에서 한그릇의 냉수란 곧 생명력 넘치는 환대(歡待)를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정성어린 대접은 제공하는 편에서는 별것(a

rarity) 아닐지라도 제공받는자와 그를 그곳에 보낸 자의 편에서는 귀중한 선물로 받

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에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사역자들과 그들

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자들의 봉사를 단순한 도덕적 선행 이상의 가치

로 평가하신다(25:35-40)

헬라어 마태복음 1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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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투스 도데카 마데타스 아우투 에도켄 아우토이스 엨수시안 프뉴마톤 아카다르톤 호스테 에크발레인 아우타 카이 데라퓨에인 파산 노손 카이 파산 말라키안

개역개정,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새번역,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 ㉠그, ‘그가’ ㉡또는 ‘악한 귀신’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영어NIV,1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 him and gave them authority to drive out evil spirits and to heal every disease and sickness.

영어NASB,1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cast them out, and to heal every kind of disease and every kind of sickness.

영어MSG,1 The prayer was no sooner prayed than it was answered. Jesus called twelve of his followers and sent them into the ripe fields. He gave them power to kick out the evil spirits and to tenderly care for the bruised and hurt lives.

영어NRSV,1 Then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cast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sic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τους δωδεκα μαθητας αυτου εδωκεν αυτοις ε&;ουσιαν πνευματων ακαθαρτων ωστε εκβαλλειν αυτα και θεραπευειν πασαν νοσον και πασαν μαλακιαν

라틴어Vulgate,1 et convocatis duodecim discipulis suis dedit illis potestatem spirituum inmundorum ut eicerent eos et curarent omnem languorem et omnem infirmitatem

히브리어Modern,1 ויקרא אליו את שנים עשר תלמידיו ויתן להם שלטן על רוחות הטמאה לגרשם ולרפוא כל חלי וכל מדוה׃

성 경: [마10: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의 직위와 권능을 부여하심]

󰃨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 부르사(*,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적인 충만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도들의 단회적(單回的)이고도 제한적(制限的)이며 유일무이(有一無二)한 특수 권능이었다.

톤 데 도데카 아포스톨론 타 오노마타 에스틴 타우타 프로토스 시몬 호 레고메노스 페트로스 카이 안드레아스 호 아델포스 아우투 카이 야코보스 호 투 제베다이우 카이 요안네스 호 아델포스 아우투

개역개정,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새번역,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첫째로 베드로라고 부르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 ㉣그, ‘형제’

우리말성경,2 열두 사도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먼저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

가톨릭성경,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영어NIV,2 These a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first, Simon (who is called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영어NASB,2 Now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are these: The first, Simon, who is called Peter, and Andrew his brother; and James the son of Zebedee, and John his brother;

영어MSG,2 This is the list of the twelve he sent: Simon (they called him Peter, or “Rock”), Andrew, his brother, James, Zebedee’s son, John, his brother,

영어NRSV,2 These a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first, Simon, also known as Peter, and his brother Andre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헬라어신약Stephanos,2 των δε δωδεκα αποστολων τα ονοματα εστιν ταυτα πρωτος σιμων ο λεγομενος πετρος και ανδρεας ο αδελφος αυτου ιακωβος ο του ζεβεδαιου και ιωαννης ο αδελφ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duodecim autem apostolorum nomina sunt haec primus Simon qui dicitur Petrus et Andreas frater eius

히브리어Modern,2 ואלה שמות שנים עשר השליחים הראשון שמעון הנקרא פטרוס ואנדרי אחיו יעקב בן זבדי ויוחנן אחיו׃

성 경: [마10: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사도(*,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벳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 안드레(*)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 야고보, 요한(*)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필맆포스 카이 바르돌로마이오스 도마스 카이 맏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야코보스 호 투 알파이우 카이 닫다이오스

개역개정,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새번역,3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레배오’ 또는 ‘다대오라고 부르는 레배오’

우리말성경,3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톨릭성경,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영어NIV,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영어NASB,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the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영어MSG,3 Philip, Bartholomew, Thomas, Matthew, the tax man, James, son of Alphaeus, Thaddaeus,

영어NRSV,3 Philip and Bartholomew; Thomas and Matthew the tax collector; James son of Alphaeus, and Thaddaeus;

헬라어신약Stephanos,3 φιλιππος και βαρθολομαιος θωμας και ματθαιος ο τελωνης ιακωβος ο του αλφαιου και λεββαιος ο επικληθεις θαδδαιος

라틴어Vulgate,3 Iacobus Zebedaei et Iohannes frater eius Philippus et Bartholomeus Thomas et Mattheus publicanus et Iacobus Alphei et Thaddeus

히브리어Modern,3 פילפוס ובר תלמי תומא ומתי המוכס יעקב בן חלפי ולבי המכנה תדי׃

성 경: [마10: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빌립(*,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바돌로매(*)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도마(*)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세리 마태(*, 말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라.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 다대오(*,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카이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호 카이 파라두스 아우톤

개역개정,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새번역,4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사람 유다이다. / ㉦또는 ‘가나안 사람’, 그, 카나나이오스’

우리말성경,4 열심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가룟 사람 유다입니다.

가톨릭성경,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영어NIV,4 Simon the Zealot and Judas Iscariot, who betrayed him.

영어NASB,4 Simon the Zealot, and Judas Iscariot, the one who betrayed Him.

영어MSG,4 Simon, the Canaanite, Judas Iscariot (who later turned on him).

영어NRSV,4 Simon the Cananaean, and Judas Iscariot, the one who betray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 σιμων ο κανανιτης και ιουδας ισκαριωτης ο και παραδου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4 Simon Cananeus et Iudas Scariotes qui et tradidit eum

히브리어Modern,4 שמעון הקני ויהודה איש קריות אשר גם מסר אתו׃

성 경: [마10: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가나안인 시몬(*,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 가룟 유다(*,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투투스 투스 도데카 아페스테일렌 호 예수스 파랑게일라스 아우토이스 레곤 에이스 호돈 에드논 메 아펠데테 카이 에이스 폴린 사마리톤 메 에이셀데테

개역개정,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새번역,5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우리말성경,5 예수께서 이 12명을 보내시며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이 사는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가톨릭성경,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영어NIV,5 These twelve Jesus sent out with the following instructions: “Do not go among the Gentiles or enter any town of the Samaritans.

영어NASB,5 These twelve Jesus sent out after instructing them: “Do not go in the way of the Gentiles, and do not enter any city of the Samaritans;

영어MSG,5 Jesus sent his twelve harvest hands out with this charge: “Don’t begin by traveling to some far-off place to convert unbelievers. And don’t try to be dramatic by tackling some public enemy.

영어NRSV,5 These twelve Jesus sent out with the following instructions: “Go nowhere among the Gentiles, and enter no town of the Samaritans,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ουτους τους δωδεκα απεστειλεν ο ιησους παραγγειλας αυτοις λεγων εις οδον εθνων μη απελθητε και εις πολιν σαμαρειτων μη εισελθητε

라틴어Vulgate,5 hos duodecim misit Iesus praecipiens eis et dicens in viam gentium ne abieritis et in civitates Samaritanorum ne intraveritis

히브리어Modern,5 את שנים העשר האלה שלח ישוע ויצו אתם לאמר אל דרך הגוים אל תלכו ואל עיר השמרונים אל תבאו׃

성 경: [마10: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포류에스데 데 말론 프로스 타 프로바타 타 아폴롤로타 오이쿠 이스라엘

개역개정,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새번역,6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 ㉧그, ‘이스라엘 집의 길 잃은 양 떼에게로’

우리말성경,6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

가톨릭성경,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영어NIV,6 Go rather to the lost sheep of Israel.

영어NASB,6 but rather go to the lost sheep of the house of Israel.

영어MSG,6 Go to the lost, confused people right here in the neighborhood.

영어NRSV,6 but go rather to the lost sheep of the house of Israel.

헬라어신약Stephanos,6 πορευεσθε δε μαλλον προς τα προβατα τα απολωλοτα οικου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6 sed potius ite ad oves quae perierunt domus Israhel

히브리어Modern,6 כי אם לכו אל הצאן האבדות לבית ישראל׃

성 경: [마10: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포류오메노이 데 케뤼쎄테 레곤테스 호티 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새번역,7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우리말성경,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

가톨릭성경,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영어NIV,7 As you go, preach this message: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영어NASB,7 “And as you go, preach, saying, ‘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영어MSG,7 Tell them that the kingdom is here.

영어NRSV,7 As you go, proclaim the good news, ‘The kingdom of heaven has come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7 πορευομενοι δε κηρυσσετε λεγοντες οτι ηγγικε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7 euntes autem praedicate dicentes quia adpropinquavi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7 ובלכתכם קראו לאמר למכות השמים קרבה לבוא׃

성 경: [마10: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쏘’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아스데눈타스 데라퓨에테 네크루스 에게이레테 레프루스 카다리제테 다이모니아 에크발레테 도레안 엘라베테 도레안 도테

개역개정,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새번역,8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나병을 포함한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을 말함

우리말성경,8 아픈 사람들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가톨릭성경,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어NIV,8 Heal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ose who have leprosy, drive out demons.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영어NASB,8 “Heal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cast out demons. Freely you received, freely give.

영어MSG,8 Bring health to the sick. Raise the dead. Touch the untouchables. Kick out the demons. You have been treated generously, so live generously.

영어NRSV,8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cast out demons. You received without payment; give without payment.

헬라어신약Stephanos,8 ασθενουντας θεραπευετε λεπρους καθαριζετε νεκρους εγειρετε δαιμονια εκβαλλετε δωρεαν ελαβετε δωρεαν δοτε

라틴어Vulgate,8 infirmos curate mortuos suscitate leprosos mundate daemones eicite gratis accepistis gratis date

히브리어Modern,8 רפאו את החולים טהרו את המצרעים הקימו את המתים ואת השדים גרשו חנם לקחתם חנם תתנו׃

성 경: [마10: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메 크테세스데 크뤼손 메데 아르귀론 메데 칼콘 에이스 타스 조나스 휘몬

개역개정,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새번역,9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우리말성경,9 너희는 주머니에 금도 은도 동도 지니지 말라.

가톨릭성경,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영어NIV,9 Do not take along any gold or silver or copper in your belts;

영어NASB,9 “Do not acquire gold, or silver, or copper for your money belts,

영어MSG,9 “Don’t think you have to put on a fund-raising campaign before you start.

영어NRSV,9 Take no gold, or silver, or copper in your belts,

헬라어신약Stephanos,9 μη κτησησθε χρυσον μηδε αργυρον μηδε χαλκον εις τας ζωνας υμων

라틴어Vulgate,9 nolite possidere aurum neque argentum neque pecuniam in zonis vestris

히브리어Modern,9 לא תקחו זהב ולא כסף ולא נחשת בחגוריכם׃

성 경: [마10: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메 페란 에이스 호돈 메데 뒤오 키토나스 메데 휘포데마타 메데 랍돈 앜시오스 가르 호 에르가테스 테스 트로페스 아우투

개역개정,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새번역,10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우리말성경,10 여행 가방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 일꾼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받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톨릭성경,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영어NIV,10 take no bag for the journey, or extra tunic, or sandals or a staff; for the worker is worth his keep.

영어NASB,10 or a bag for your journey, or even two coats, or sandals, or a staff; for the worker is worthy of his support.

영어MSG,10 You don’t need a lot of equipment. You are the equipment, and all you need to keep that going is three meals a day. Travel light.

영어NRSV,10 no bag for your journey, or two tunics, or sandals, or a staff; for laborers deserve their foo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μη πηραν εις οδον μηδε δυο χιτωνας μηδε υποδηματα μηδε ραβδον α&;ιος γαρ ο εργατης της τροφης αυτ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10 non peram in via neque duas tunicas neque calciamenta neque virgam dignus enim est operarius cibo suo

히브리어Modern,10 ולא תרמיל לדרך ולא שתי כתנות ולא נעלים ולא מטה כי שוה הפעל די מחיתו׃

성 경: [마10:1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 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에이스 헨 드 안 폴린 에 코멘 에이셀데테 엨세타사테 티스 엔 아우테 앜시오스 에스틴 카케이 메이나테 헤오스 안 엨셀데테

개역개정,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새번역,11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우리말성경,11 어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

가톨릭성경,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영어NIV,11 “Whatever town or village you enter, search for some worthy person there and stay at his house until you leave.

영어NASB,11 “And whatever city or village you enter, inquire who is worthy in it, and stay at his house until you leave that city.

영어MSG,11 “When you enter a town or village, don’t insist on staying in a luxury inn. Get a modest place with some modest people, and be content there until you leave.

영어NRSV,11 Whatever town or village you enter, find out who in it is worthy, and stay there until you leav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ις ην δ αν πολιν η κωμην εισελθητε ε&;ετασατε τις εν αυτη α&;ιος εστιν κακει μεινατε εως αν ε&;ελθητε

라틴어Vulgate,11 in quamcumque civitatem aut castellum intraveritis interrogate quis in ea dignus sit et ibi manete donec exeatis

히브리어Modern,11 וכל עיר וכפר אשר תבאו שמה דרשו מי הוא הראוי לזה בתוכה ושם שבו עד כי תצאו׃

성 경: [마10:1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에이세르코메노이 데 에이스 텐 오이키안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개역개정,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새번역,12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우리말성경,12 그 집에 들어갈 때는 평안을 빌라.

가톨릭성경,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영어NIV,12 As you enter the home, give it your greeting.

영어NASB,12 “As you enter the house, give it your greeting.

영어MSG,12 “When you knock on a door, be courteous in your greeting.

영어NRSV,12 As you enter the house, greet i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εισερχομενοι δε εις την οικιαν ασπασασθε αυτην

라틴어Vulgate,12 intrantes autem in domum salutate eam

히브리어Modern,12 ובבואכם אל הבית שאלו לו לשלום׃

성 경: [마10:1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평안하기를 빌라(*,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카이 에안 멘 에 헤 오이키아 앜시아 엘다토 헤 에이레네 휘몬 엪 아우텐 에안 데 메 에 앜시아 헤 에이레네 휘몬 프로스 휘마스 에피스트라페토

개역개정,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새번역,13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우리말성경,13 그 집이 평안을 받을 만하면 그 평안이 거기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가톨릭성경,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영어NIV,13 If the home is deserving, let your peace rest on it; if it is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영어NASB,13 “If the house is worthy, give it your blessing of peace. But if it is not worthy, take back your blessing of peace.

영어MSG,13 If they welcome you, be gentle in your conversation.

영어NRSV,13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but if it is not worthy,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εαν μεν η η οικια α&;ια ελθετω η ειρηνη υμων επ αυτην εαν δε μη η α&;ια η ειρηνη υμων προς υμας επιστραφητω

라틴어Vulgate,13 et siquidem fuerit domus digna veniat pax vestra super eam si autem non fuerit digna pax vestra ad vos revertatur

히브리어Modern,13 והיה אם ראוי הבית יבוא עליו שלומכם ואם איננו ראוי שלומכם אליכם ישוב׃

성 경: [마10:1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카이 호스 안 메 엨세타이 휘마스 메데 아쿠세 투스 로구스 휘몬 엨세르코메노이 엨소 테스 오이키아스 에 테스 폴레오스 에케이네스 엨티낰사테 톤 코니오르톤 톤 포돈 휘몬

개역개정,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새번역,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우리말성경,14 누구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집이든 그 마을이든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

가톨릭성경,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영어NIV,14 If anyone will not welcome you or listen to your words,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when you leave that home or town.

영어NASB,14 “Whoever does not receive you, nor heed your words, as you go out of that house or that city,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영어MSG,14 If they don’t welcome you, quietly withdraw. Don’t make a scene. Shrug your shoulders and be on your way.

영어NRSV,14 If anyone will not welcome you or listen to your words, shake off the dust from your feet as you leave that house or town.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ος εαν μη δε&;ηται υμας μηδε ακουση τους λογους υμων ε&;ερχομενοι της οικιας η της πολεως εκεινης εκτινα&;ατε τον κονιορτον των ποδων υμων

라틴어Vulgate,14 et quicumque non receperit vos neque audierit sermones vestros exeuntes foras de domo vel de civitate excutite pulverem de pedibus vestris

히브리어Modern,14 וכל אשר לא יקבל אתכם ולא ישמע לדבריכם צאו לכם מן הבית ההוא ומן העיר ההיא ונערו את עפר רגליכם׃

성 경: [마10:1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아멘 레고 휘민 아넼토테론 에스타이 게 소도몬 카이 고모르론 엔 헤메라 크리세오스 에 테 폴레이 에케이네

개역개정,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새번역,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우리말성경,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차라리 견딜 만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영어NIV,15 I tell you the truth,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Sodom and Gomorrah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that town.

영어NASB,15 “Truly I say to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he land of Sodom and Gomorrah i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that city.

영어MSG,15 You can be sure that on Judgment Day they’ll be mighty sorry–but it’s no concern of yours now.

영어NRSV,15 Truly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he land of Sodom and Gomorrah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that tow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μην λεγω υμιν ανεκτοτερον εσται γη σοδομων και γομορρων εν ημερα κρισεως η τη πολει εκεινη

라틴어Vulgate,15 amen dico vobis tolerabilius erit terrae Sodomorum et Gomorraeorum in die iudicii quam illi civitati

히브리어Modern,15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יקל לארץ סדום ועמרה ביום הדין מן העיר ההיא׃

성 경: [마10:1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휘마스 호스 포로바타 엔 메소 뤼콘 기네소데 운 프로니모이 호스 호이 오페이스 카이 아케라이오이 호스 하이 페리스테라이

개역개정,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새번역,16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우리말성경,16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늑대 소굴로 보내는 것 같구나.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가톨릭성경,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영어NIV,16 I am sending you out like sheep among wolves. 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영어NASB,16 “Behold, I send you out as sheep in the midst of wolves; so be shrewd as serpents and innocent as doves.

영어MSG,16 “Stay alert. This is hazardous work I’m assigning you. You’re going to be like sheep running through a wolf pack, so don’t call attention to yourselves. Be as cunning as a snake, inoffensive as a dove.

영어NRSV,16 “See, I am sending you out like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so be wise as serpents and innocent as dove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ιδου εγω αποστελλω υμας ως προβατα εν μεσω λυκων γινεσθε ουν φρονιμοι ως οι οφεις και ακεραιοι ως αι περιστεραι

라틴어Vulgate,16 ecce ego mitto vos sicut oves in medio luporum estote ergo prudentes sicut serpentes et simplices sicut columbae

히브리어Modern,16 הנני שלח אתכם ככבשים בין הזאבים לכן היו ערומים כנחשים ותמימים כיונים׃

성 경: [마10:1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보라(*,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프로세케테 데 아포 톤 안드로폰 파라도수신 가르 휘마스 에이스 쉬네드리아 카이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마스티고수신 휘마스

개역개정,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새번역,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7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영어NIV,17 “Be on your guard against men; they will hand you over to the local councils and flog you in their synagogues.

영어NASB,17 “But beware of men, for they will hand you over to the courts and scourge you in their synagogues;

영어MSG,17 “Don’t be naive. Some people will impugn your motives, others will smear your reputation–just because you believe in me.

영어NRSV,17 Beware of them, for they will hand you over to councils and flog you in their synagogues;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ροσεχετε δε απο των ανθρωπων παραδωσουσιν γαρ υμας εις συνεδρια και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αυτων μαστιγωσουσιν υμας

라틴어Vulgate,17 cavete autem ab hominibus tradent enim vos in conciliis et in synagogis suis flagellabunt vos

히브리어Modern,17 והשמרו לכם מבני האדם כי ימסרו אתכם לסנהדריות ויכו אתכם בשוטים בבתי כנסיותיהם׃

성 경: [마10:1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떨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 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카이 에피 헤게모나스 데 카이 바실레이스 아크데세스데 헤네켄 에무 에이스 마르튀리온 아우토이스 카이 토이스 에드네신

개역개정,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8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또 이방 사람들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영어NIV,18 On my account you will be brought before governors and kings as witnesses to them and to the Gentiles.

영어NASB,18 and you will even be brought before governors and kings for My sake, as a testimony to them and to the Gentiles.

영어MSG,18 Don’t be upset when they haul you before the civil authorities. Without knowing it, they’ve done you–and me–a favor, given you a platform for preaching the kingdom news!

영어NRSV,18 and you will be dragged before governors and kings because of me, as a testimony to them and the Gentile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πι ηγεμονας δε και βασιλεις αχθησεσθε ενεκεν εμου εις μαρτυριον αυτοις και τοις εθνεσιν

라틴어Vulgate,18 et ad praesides et ad reges ducemini propter me in testimonium illis et gentibus

히브리어Modern,18 ולפני משלים ומלכים תובאו למעני לעדות להם ולגוים׃

성 경: [마10:1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호탄 데 파라도신 휘마스 메 메림네세테 포스 에 티 랄레세테 도데세타이 가르 휘민 엔 에케이네 테 호라 티 랄레세테

개역개정,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새번역,19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우리말성경,19 그러나 그들에게 잡혀 가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가 말할 것을 일러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영어NIV,19 But when they arrest you, do not worry about what to say or how to say it. At that time you will be given what to say,

영어NASB,19 “But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or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be given you in that hour what you are to say.

영어MSG,19 And don’t worry about what you’ll say or how you’ll say it. The right words will be there;

영어NRSV,19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you are to speak or what you are to say; for what you are to say will be given to you at that tim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ταν δε παραδιδωσιν υμας μη μεριμνησητε πως η τι λαλησητε δοθησεται γαρ υμιν εν εκεινη τη ωρα τι λαλησετε

라틴어Vulgate,19 cum autem tradent vos nolite cogitare quomodo aut quid loquamini dabitur enim vobis in illa hora quid loquamini

히브리어Modern,19 וכי ימסרו אתכם אל תדאגו איך ומה תדברו כי ינתן לכם בשעה ההיא את אשר תדברו׃

성 경: [마10:1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우 가르 위메이스 에스테 호이 랄룬테스 알라 토 프뉴마 투 파트로스 휘몬 토 랄룬 엔 휘민

개역개정,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새번역,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우리말성경,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가톨릭성경,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영어NIV,20 for it will not be you speaking,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영어NASB,20 “For it is not you who speak, but it is the Spirit of your Father who speaks in you.

영어MSG,20 the Spirit of your Father will supply the words.

영어NRSV,20 for it is not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υ γαρ υμεις εστε οι λαλουντες αλλα το πνευμα του πατρος υμων το λαλουν εν υμιν

라틴어Vulgate,20 non enim vos estis qui loquimini sed Spiritus Patris vestri qui loquitur in vobis

히브리어Modern,20 כי לא אתם הם המדברים כי רוח אביכם הוא המדבר בפיכם׃

성 경: [마10:2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 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파라도세이 데 아델포스 아델폰 에이스 다나톤 카이 파테르 테크논 카이 에파나스테손타이 테크나 에피 고네이스 카이 다나토수신 아우투스

개역개정,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새번역,21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우리말성경,21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배신해 죽게 만들고 자식이 부모를 거역해 죽게 만들 것이다.

가톨릭성경,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영어NIV,21 “Brother will betray brother to death, and a father his child; children will rebel against their parents and have them put to death.

영어NASB,21 “Brother will betray brother to death, and a father his child; and children will rise up against parents and cause them to be put to death.

영어MSG,21 “When people realize it is the living God you are presenting and not some idol that makes them feel good, they are going to turn on you, even people in your own family.

영어NRSV,21 Brother will betray brother to death, and a father his child, and children will rise against parents and have them put to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21 παραδωσει δε αδελφος αδελφον εις θανατον και πατηρ τεκνον και επαναστησονται τεκνα επι γονεις και θανατωσουσι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21 tradet autem frater fratrem in mortem et pater filium et insurgent filii in parentes et morte eos adficient

히브리어Modern,21 והיה אח ימסר את אחיו למות ואב ימסר את בנו וקמו בנים באבותם וימיתו אותם׃

성 경: [마10:2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카이 에세스데 미수메노이 휘포 판톤 디아 토 오노마 무 호 데 휘포메이나스 에이스 텔로스 후토스 소데세타이

개역개정,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새번역,22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2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22 All men will hate you because of me, but he who stands firm to the end will be saved.

영어NASB,22 “You will be hated by all because of My name, but it is the one who has endured to the end who will be saved.

영어MSG,22 There is a great irony here: proclaiming so much love, experiencing so much hate! But don’t quit. Don’t cave in. It is all well worth it in the end.

영어NRSV,22 and you will be hated by all because of my name. But the one who endures to the end wi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εσεσθε μισουμενοι υπο παντων δια το ονομα μου ο δε υπομεινας εις τελος ουτος σω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2 et eritis odio omnibus propter nomen meum qui autem perseveraverit in finem hic salvus erit

히브리어Modern,22 והייתם שנואים לכל אדם למען שמי והמחכה עד עת קץ הוא יושע׃

성 경: [마10:2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내 이름을 인하여(*,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호탄 데 디오코신 휘마스 엔 테 폴레이 타우테 퓨게테 에이스 텐 헤테란 아멘 가르 레고 휘민 우 메 텔레세테 타스 폴레이스 투 이스라엘 헤오스 안 엘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개역개정,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새번역,23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

우리말성경,23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저 도시로 피신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

가톨릭성경,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영어NIV,23 When you are persecuted in one place, flee to another.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finish going through the cities of Israel before the Son of Man comes.

영어NASB,23 “But whenever they persecute you in one city, flee to the next; for truly I say to you, you will not finish going through the cities of Israel until the Son of Man comes.

영어MSG,23 It is not success you are after in such times but survival. Be survivors! Before you’ve run out of options, the Son of Man will have arrived.

영어NRSV,23 When they persecute you in one town, flee to the next; for truly I tell you, you will not have gone through all the towns of Israel before the Son of Man come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ταν δε διωκωσιν υμας εν τη πολει ταυτη φευγετε εις την αλλην αμην γαρ λεγω υμιν ου μη τελεσητε τας πολεις του ισραηλ εως αν ελθη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라틴어Vulgate,23 cum autem persequentur vos in civitate ista fugite in aliam amen enim dico vobis non consummabitis civitates Israhel donec veniat Filius hominis

히브리어Modern,23 ואם ירדפו אתכם בעיר אחת נוסו לעיר אחרת כי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לא תכלו לעבר ערי ישראל עד כי יבוא בן האדם׃

성 경: [마10:2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예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5:17-48).

우크 에스틴 마데테스 휘페르 톤 디다스칼론 우데 둘로스 휘페르 톤 퀴리온 아우투

개역개정,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새번역,24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우리말성경,24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 위에 있을 수 없다.

가톨릭성경,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영어NIV,24 “A student is not above his teacher, nor a servant above his master.

영어NASB,24 “A disciple is not above his teacher, nor a slave above his master.

영어MSG,24 “A student doesn’t get a better desk than her teacher. A laborer doesn’t make more money than his boss.

영어NRSV,24 “A disciple is not above the teacher, nor a slave above the master;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υκ εστιν μαθητης υπερ τον διδασκαλον ουδε δουλος υπερ τον κυρι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4 non est discipulus super magistrum nec servus super dominum suum

히브리어Modern,24 אין תלמיד עלה על רבו ועבד על אדניו׃

성 경: [마10:2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아르케톤 토 마데테 히나 게네타이 호스 호 디다스칼로스 아우투 카이 호 둘로스 호스 호 퀴리오스 아우투 에이 톤 오이코데스포텐 베엘제불 에페칼레산 포소 말론 투스 오이키아쿠스 아우투

개역개정,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새번역,25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우리말성경,25 제자가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불렀으니 하물며 그 집안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가톨릭성경,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영어NIV,25 It is enough for the student to be like his teacher, and the servant like his master. If the head of the house has been called Beelzebub, how much more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영어NASB,25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 and the slave like his master. If they have called the head of the house Beelzebul, how much more will they malign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영어MSG,25 Be content–pleased, even–when you, my students, my harvest hands, get the same treatment I get. If they call me, the Master, ‘Dungface,’ what can the workers expect?

영어NRSV,25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o be like the teacher, and the slave like the master. If they have called the master of the house Beelzebul, how much more will they malign those of his household!

헬라어신약Stephanos,25 αρκετον τω μαθητη ινα γενηται ως ο διδασκαλος αυτου και ο δουλος ως ο κυριος αυτου ει τον οικοδεσποτην βεελζεβουλ εκαλεσαν ποσω μαλλον τους οικιακ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25 sufficit discipulo ut sit sicut magister eius et servus sicut dominus eius si patrem familias Beelzebub vocaverunt quanto magis domesticos eius

히브리어Modern,25 דיו לתלמיד להיות כרבו ולעבד להיות כאדניו אם לבעל הבית קראו בעל זבוב אף לאנשי ביתו׃

성 경: [마10:2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

메 운 포베데테 아우투스 우덴 가르 에스틴 케칼륌메논 호 우크 아포칼뤼프데세타이 카이 크륖톤 호 우 그노스데세타이

개역개정,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새번역,26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우리말성경,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가톨릭성경,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영어NIV,26 “So do not be afraid of them. There is nothing concealed that will not be disclosed, or hidden that will not be made known.

영어NASB,26 “Therefore do not fear them, for there is nothing concealed that will not be revealed, or hidden that will not be known.

영어MSG,26 “Don’t be intimidated. Eventually everything is going to be out in the open, and everyone will know how things really are.

영어NRSV,26 “So have no fear of them; for nothing is covered up that will not be uncovered, and nothing secret that will not become known.

헬라어신약Stephanos,26 μη ουν φοβηθητε αυτους ουδεν γαρ εστιν κεκαλυμμενον ο ουκ αποκαλυφθησεται και κρυπτον ο ου γνωσ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6 ne ergo timueritis eos nihil enim opertum quod non revelabitur et occultum quod non scietur

히브리어Modern,26 על כן לא תיראום כי אין דבר מכסה אשר לא יגלה ואין נעלם אשר לא יודע׃

성 경: [마10:2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 레고 휘민 엔 테 스코티아 에이파테 엔 토 포티 카이 호 에이스 토 우스 아쿠에테 케륔사테 에피 톤 도마톤

개역개정,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새번역,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우리말성경,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내가 너희 귀에 속삭인 것을 너희는 지붕 위에서 외치라!

가톨릭성경,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영어NIV,27 What I tell you in the dark, speak in the daylight; what is whispered in your ear, proclaim from the roofs.

영어NASB,27 “What I tell you in the darkness, speak in the light; and what you hear whispered in your ear, proclaim upon the housetops.

영어MSG,27 So don’t hesitate to go public now.

영어NRSV,27 What I say to you in the dark, tell in the light; and what you hear whispered, proclaim from the housetops.

헬라어신약Stephanos,27 ο λεγω υμιν εν τη σκοτια ειπατε εν τω φωτι και ο εις το ους ακουετε κηρυ&;ατε επι των δωματων

라틴어Vulgate,27 quod dico vobis in tenebris dicite in lumine et quod in aure auditis praedicate super tecta

히브리어Modern,27 את אשר אני אמר לכם בחשך דברו באור ואשר ילחש לאזניכם השמיעו על הגגות׃

성 경: [마10:2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 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카이 메 포베이스데 아포 톤 아포크텐논톤 토 소마 텐 데 프쉬켄 메 뒤나메논 아포크테이나이 포베이스데 데 말론 톤 뒤나메논 카이 프쉬켄 카이 소마 아폴레사이 엔 게엔네

개역개정,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새번역,28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28 육체는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영혼과 육체를 한꺼번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가톨릭성경,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영어NIV,28 Do not be afraid of those who kill the body but cannot kill the soul. Rather, be afraid of the One who can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영어NASB,28 “Do not fear those who kill the body but are unable to kill the soul; but rather fear Him who is able to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영어MSG,28 “Don’t be bluffed into silence by the threats of bullies. There’s nothing they can do to your soul, your core being. Save your fear for God, who holds your entire life–body and soul–in his hands.

영어NRSV,28 Do not fear those who kill the body but cannot kill the soul; rather fear him who can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μη φοβηθητε απο των αποκτεινοντων το σωμα την δε ψυχην μη δυναμενων αποκτειναι φοβηθητε δε μαλλον τον δυναμενον και ψυχην και σωμα απολεσαι εν γεεννη

라틴어Vulgate,28 et nolite timere eos qui occidunt corpus animam autem non possunt occidere sed potius eum timete qui potest et animam et corpus perdere in gehennam

히브리어Modern,28 ואל תיראי מן ההרגים את הגוף ואת הנפש לא יוכלו להרג אך תיראו את אשר יוכל לאבד גם את הנפש גם את הגוף בגיהנם׃

성 경: [마10:2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 이는 유한한 능력, 그것도 현세에서만 발휘할 수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로 육(肉)과 영혼(靈魂)을 제시하셨는데(전 12:7; 롬 8:10; 고전 5:5; 히 12:9) 그중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요 불멸의 것이므로 영혼을 해(害)할 권세를 가진 자는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에 비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몸이란 영혼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시적인 육의 죽음은 영원한 영혼의 멸망과 비교했을 때 역시 그 가치가 극히 약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 두려워하지 말고(*, 메 포베데테 아포) – 이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단 한 순간의 공포마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실로 영.육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지니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Bengel). 일찍이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은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가질것을 당부한 바가 있다(벧전 3:14, 15). 인간이란 고난이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그 만을 두려워할 때, 또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할 때, 이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 몸이 물질적이요 현재적이라면 영혼은 비물질적이요 영원적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동시적 멸망은, 곧 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파멸을 뜻하며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동시적 멸절(滅絶)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은 전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관할하고 계신다. 인간으로 인한 두려움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능히 극복된다(Cramer).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옥'(*, 게엔나)이란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의 전인격이 사후(死後)에 거하면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5:22, 29, 30; 18:9; 23:15; 약 3:6). 이에 대해서는 막 9:43-50 강해 ‘지옥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멸하시는’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레사이'(*)는 완벽하고도 철저한 멸망을 뜻하기보다 영벌(永罰)의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5:46; 막 9:47, 49; 살후 1:9). 바로 그런 점에서 누가는 ‘지옥에 던져 넣다 –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보게 할 의사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 12:5).

󰃨 두려워하라(*, 포베이스데) – 이는 앞의 ‘두려움’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항상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예비하는 참지혜가 아니겠는가? (잠 9:10)

우키 뒤오 스트루디아 아싸리우 폴레이타이 카이 헨 엨스 아우톤 우 페세이타이 에피 텐 겐 아뉴 투 파트로스 휘몬

개역개정,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새번역,29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 ㉪그, ‘앗시리온’

우리말성경,29 참새 두 마리가 앗사리온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가톨릭성경,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영어NIV,29 Are not two sparrows sold for a penny? Yet not one of them will fall to the ground apart from the will of your Father.

영어NASB,29 “Are not two sparrows sold for a cent? And yet not one of them will fall to the ground apart from your Father.

영어MSG,29 “What’s the price of a pet canary? Some loose change, right? And God cares what happens to it even more than you do.

영어NRSV,29 Are not two sparrows sold for a penny? Yet not one of them will fall to the ground apart from your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9 ουχι δυο στρουθια ασσαριου πωλειται και εν ε&; αυτων ου πεσειται επι την γην ανευ του πατρος υμων

라틴어Vulgate,29 nonne duo passeres asse veneunt et unus ex illis non cadet super terram sine Patre vestro

히브리어Modern,29 הלא תמכרנה שתי צפרים באסר ואחת מהנה לא תפול ארצה מבלעדי אביכם׃

성 경: [마10:2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약간의 푼돈에 두 개의 생명이 팔릴만큼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앗사리온’이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를 가진 적은 돈이다.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에도 이 앗사리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사르), 이때 이 금액의 가치는 네 개의 은(銀) 알맹이에 해당되며, 최저의 금액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Clarke).

󰃨 참새(*, 스트루디아) – 새의 종류를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아주 작고 또 매우 흔해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새로, 가난한 유대인들의 식량이 되기도 하였고 또 슬픔과 고독의 상징(symbol)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값싼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참새와 같은 몇몇 조류들이 예루살렘과 욥바 등지의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 너희 아버지께서 – 이는 매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표현이다. 즉 예수는 우주만물(宇宙萬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6:26).

󰃨 허락지 아니하시면(*, 아뉴) – 이는 적극적으로 참새를 죽지 않게 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존과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숙히 관여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참새가 붙잡히고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나님이 지정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문제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보살핌과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창조주로서 그들을 지키시는 것이다.

󰃨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는 사냥군의 화살이나 돌팔매에 의해 땅바닥으로 추락(墜落)하는 돌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F.R. Fay). 혹자는(Chrysostom, Origen) 이를 사냥군의 올무에 걸리는 상황으로 이해하나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없다. 한편 누가는 이 상황을 새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잊어버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찮은 생명체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자상한 배려를 더욱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눅 12:6).

휘몬 데 카이 하이 트리케스 테스 케팔레스 파사이 에리드메메나이 에이신

개역개정,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새번역,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우리말성경,30 또한 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 수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가톨릭성경,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영어NIV,30 And even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영어NASB,30 “But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영어MSG,30 He pays even greater attention to you, down to the last detail–even numbering the hairs on your head!

영어NRSV,30 And even the hairs of your head are all counted.

헬라어신약Stephanos,30 υμων δε και αι τριχες της κεφαλης πασαι ηριθμημεναι εισιν

라틴어Vulgate,30 vestri autem et capilli capitis omnes numerati sunt

히브리어Modern,30 ואתם גם שערות ראשכם נמנות כלן׃

성 경: [마10:3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예수께서는 앞의 ‘참새’와 대조적으로 ‘너희’를 강조하심으로 그 보살핌의 강도(强度)를 더욱 깊게 하셨다. 한편 ‘세신 바 되었나니'(*, 에리드 메메나이 에이신)란 분사형태의 완료 수동형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이미 옛날부터 셈을 하신바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관심의 시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으로 그때부터 우리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머리털은 너무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한 일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시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들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공중에 나는 보잘것없는 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문제와 보이지 않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메 운 포베이스데 폴론 스트루디온 디아페레테 휘메이스

개역개정,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새번역,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말성경,31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도 더 귀하다.

가톨릭성경,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영어NIV,31 So don’t be afraid; you are worth more than many sparrows.

영어NASB,31 “So do not fear; you are more valuable than many sparrows.

영어MSG,31 So don’t be intimidated by all this bully talk. You’re worth more than a million canaries.

영어NRSV,31 So do not be afraid; you are of more value than many sparrows.

헬라어신약Stephanos,31 μη ουν φοβηθητε πολλων στρουθιων διαφερετε υμεις

라틴어Vulgate,31 nolite ergo timere multis passeribus meliores estis vos

히브리어Modern,31 לכן אל תיראו הנכם יקרים מצפרים רבות׃

성 경: [마10:3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두려워하지 말라 – 이 말씀은 이곳에서 세번째 언급되고 있다. 첫번째는 모든 진리가 드러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두번째는 박해자들이 아무리 성도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번째로 언급된 이 말씀은 앞의 두개의 내용보다 더 고무(鼓舞)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긔까지 다 세시고 간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불필요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 많은 참새보다 – 한 앗사리온에 둘씩 팔리는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감찰하시거늘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시겠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고 구속하신 한 심령의 가치를 감히 어느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고통이 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며 설령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과 의(義)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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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새번역,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가톨릭성경,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영어NIV,32 “Whoever acknowledges me before men, I will also acknowledge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영어NASB,32 “Therefore everyone who confesses Me before men, I will also confess him before My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32 “Stand up for me against world opinion and I’ll stand up for you before my Father in heaven.

영어NRSV,32 “Everyone therefore who acknowledges me before others, I also will acknowledge before my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2 πας ουν οστις ομολογησει εν εμοι εμπροσθεν των ανθρωπων ομολογησω καγω εν αυτω εμπροσθεν του πατρος μου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32 omnis ergo qui confitebitur me coram hominibus confitebor et ego eum coram Patre meo qui est in caelis

히브리어Modern,32 הן כל אשר יודה בי לפני האדם אודה בו גם אני לפני אבי שבשמים׃

성 경: [마10:3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으로 예수와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시인하면’이란 말은 오히려(신앙을) ‘고백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갈 2:20) 이룬 존재로서 예수 그분이 바로 자신의(主)이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는 것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시 66:16). 이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마음으로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고 또 그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활로 표현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는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7:21)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 먼저 ‘하늘에 계시 내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와 무궁한 사랑을 암시한 표현인 동시에 성자 예수와의 지극한 친밀감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아버지앞’이란 모든 인간으 종말적 귀결(conclusion)지점, 곧 심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으며(요 5:22), 바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 하였다(고후 5:10).

󰃨 저를 시인할 것이요 –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是認)하면 주께서는 심판날에 우리를 그와 똑같이 시인해 주실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의 충성을 기쁘게 여기고(25:34-36, 40; 계 2:10), 또한 그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中保)의 간구를 아끼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히 7:25).

호스티스 드 안 아르네세타이 메 엠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아르네소마이 카고 아우톤 엠프로스덴 투 파트로스 무 투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개역개정,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새번역,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

가톨릭성경,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어NIV,33 But whoever disowns me before men, I will disown him before my Father in heaven.

영어NASB,33 “But whoever denies Me before men, I will also deny him before My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33 If you turn tail and run, do you think I’ll cover for you?

영어NRSV,33 but whoever denies me before others, I also will deny before my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3 οστις δ αν αρνησηται με εμπροσθεν των ανθρωπων αρνησομαι αυτον καγω εμπροσθεν του πατρος μου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33 qui autem negaverit me coram hominibus negabo et ego eum coram Patre meo qui est in caelis

히브리어Modern,33 ואשר יכחש בי לפני האדם אכחש בו גם אני לפני אבי שבשמים׃

성 경: [마10:3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 사람앞에서 주를 부인한다는 말씀은, 곧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치 않고, 그분을 주(主)로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결과 하나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며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는 지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영교(靈交)를 단절한 채 세속적 인간 관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한편 이것은 베드로와 같은 순간적인 부인(否認)이 아니라(26:69-75) 전생애와 전인격을 통해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판가름하실 것이다(Homer A. Kent, Jr.).

󰃨 저를 부인하리라 –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메시야로 인정치 않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심판장이시며 대속자이신 만유의 주로부터 부인당하고 버림받게 된다(7:23; 딤후 2:12). 왜냐하면 예수를 부인하는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들은 자신의 열매(입술과 행위)를 자신이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실로 현세에서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

메 노미세테 호티 엔돈 발레인 에이레넨 에피 텐 겐 우크 엘돈 발레인 에이레넨 알라 마카이란

개역개정,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새번역,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우리말성경,34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가톨릭성경,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영어NIV,34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영어NASB,34 “Do not think that I came to bring peace on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영어MSG,34 “Don’t think I’ve come to make life cozy. I’ve come to cut–

영어NRSV,34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have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헬라어신약Stephanos,34 μη νομισητε οτι ηλθον βαλειν ειρηνην επι την γην ουκ ηλθον βαλειν ειρηνην αλλα μαχαιραν

라틴어Vulgate,34 nolite arbitrari quia venerim mittere pacem in terram non veni pacem mittere sed gladium

히브리어Modern,34 אל תחשבו כי באתי להטיל שלום בארץ לא באתי להטיל שלום כי אם חרב׃

성 경: [마10:3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예수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사야가 와서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야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 같은 그릇된 기대들을 일거(一擧)에 거부하시면서 당신이 이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피력(披瀝)하셨다.

󰃨 화평이 아니요 – 이 어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순전히 불화(不和)와 반목(反目)을 일으키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평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인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로 번역된다. 유대인들은 영적 문제이든 세속적 문제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복을 기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이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꽃피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문에서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바로서의 화평, 즉 현상적(정치, 경제 등)이고 외적인 평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는 본질적(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요일 4:10)이고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검을 주러 왔노라 – 이사야는 메시야의 탄생을 ‘평강의 왕’이라 예언하였으며(사 9:6), 예수 탄생시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그의 탄생을 두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사실 예수는 평화의 실체이자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다(눅 1:79; 요 14:27; 롬 10:15; 골 1:20). 따라서 이곳에서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sword)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 메시야의 임하심으로 야기되는 그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일 것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다’는 뜻의 원어 ‘바레인'(*)은 ‘던지다’는 뜻으로 긴박하고도 급작스런 전투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문구로서 본문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高潮)시켜준다. 여하튼 검이라고 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며, 무기로서 검을 준다는 것은 적대감을 유발시켜 투쟁과 분열과 전쟁을 발발케 한다는 것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신국(神國)을 건설키 위해 오셨는데(5:9), 이 신국은 곧 땅 위의 죄악된 질서를 척결(剔抉)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메시야와 그의 통치를 완강히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생 결단의 치열한 혈전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요 14:27; 16:33). 한편 그 전투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엘돈 가르 디카사이 안드로폰 카타 투 파트로스 아우투 카이 뒤가테라 카타 테스 메트로스 아우테스 카이 뉨펜 카타 테스 펜데라스 아우테스

개역개정,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새번역,35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 ㉫미 7:6

우리말성경,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

가톨릭성경,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영어NIV,35 For I have come to turn “‘a man against his father,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영어NASB,35 “For I came to SET A MAN AGAINST HIS FATHER, AND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ND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영어MSG,35 make a sharp knife-cut between son and father, daughter and mother, bride and mother-in-law–cut through these cozy domestic arrangements and free you for God.

영어NRSV,35 For I have come to set a man against his father, and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nd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헬라어신약Stephanos,35 ηλθον γαρ διχασαι ανθρωπον κατα του πατρος αυτου και θυγατερα κατα της μητρος αυτης και νυμφην κατα της πενθερας αυτης

라틴어Vulgate,35 veni enim separare hominem adversus patrem suum et filiam adversus matrem suam et nurum adversus socrum suam

히브리어Modern,35 כי באתי להפריד איש מאביו ובת מאמה וכלה מחמותה׃

성 경: [마10:3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 온 것은 – ‘내가 왔다'(*, 엘돈)는 표현은 예수의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자의식(自意識)을 반영해 준다.

󰃨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 본문은 미 7:6의 인용으로써, 미가는 아하스 왕 시대의 죄악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예수는 복음이 빚어낼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모 자식 간의 가족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자신이 오신 목적이 있다고 천명(闡明)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분명 예수의 참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즉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지금 게속해서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러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오셨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즉 제자들의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될 때 수많은 박해가 예상되지만 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할 자는 이방인이 아닌,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13:53-58; 요 7:3-5), 자기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가장 핍박한 자들은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여기서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적대감을 갖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젊은 세대(결혼한 아들 – ‘사람’, 미혼의 ‘딸’, ‘며느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늙은 세대에 항거할 것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1) 복음의 생동감 넘치는 침투력과, (2) 고답적(高踏的) 사상에 물들지 않은 여린 신앙인들의 복음에의 열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불화하게'(*, 다카사이)란 ‘둘로 나누다’는 뜻으로 신앙 문제에 관한한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연합(聯合)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어떤 불신자들은 이 구절을 보고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비난하고 또 일부 신자들은 가족까지도 무시하거나 원수 취급을 해서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앞장 서서 가족의 불화와 반목을 야기시키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본문의 말씀을 그릇되게 이해한 데서 나온 엄청난 파행(跛行)적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는, 당신을 신앙하며 헌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많은 사람들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招來)하는 일임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카이 에크드로이 투 안드로푸 호이 오이키아코이 아우투

개역개정,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새번역,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 ㉬미 7:6

우리말성경,36 그러므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다. 미7:6

가톨릭성경,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

영어NIV,36 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own household.’

영어NASB,36 and 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HOUSEHOLD.

영어MSG,36 Well-meaning family members can be your worst enemies.

영어NRSV,36 and one’s foes will be members of one’s own household.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εχθροι του ανθρωπου οι οικιακο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36 et inimici hominis domestici eius

히브리어Modern,36 ואיבי איש אנשי ביתו׃

성 경: [마10:3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주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케 한다. 그 까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접한 각인(各人)의 부패한 심성(心性)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호 필론 파테라 에 메테라 휘페르 에메 우크 에스틴 무 앜시오스 카이 호 필론 휘온 에 뒤가테라 휘페르 에메 우크 에스틴 무 앜시오스

개역개정,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새번역,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우리말성경,37 누구든지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 나보다 자기 아들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가톨릭성경,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영어NIV,37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영어NASB,37 “He who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he who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영어MSG,37 If you prefer father or mother over me, you don’t deserve me. If you prefer son or daughter over me, you don’t deserve me.

영어NRSV,37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ο φιλων πατερα η μητερα υπερ εμε ουκ εστιν μου α&;ιος και ο φιλων υιον η θυγατερα υπερ εμε ουκ εστιν μου α&;ιος

라틴어Vulgate,37 qui amat patrem aut matrem plus quam me non est me dignus et qui amat filium aut filiam super me non est me dignus

히브리어Modern,37 האהב את אביו ואת אמו יותר ממני איננו כדי לי והאהב את בנו ובתו יותר ממני איננו כדי לי׃

성 경: [마10:3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 이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연적인 성품에서 나온 혈연적, 인본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장면이다. 즉 예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된자의 제일의 의무요 본분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definition)해 둘 필요가 있다. 즉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자연적인 애정의 표시, 즉 혈육간의 사랑에는 흔히 ‘필레오'(*)란 말을 쓰고, 차원 높은 신(神)적이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는 ‘아가파오'(*)란 말을 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남녀간의 육적인 사랑이나 가족간의 애정을 넘어선 절대적 신뢰와 모든것을 초월한 종교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주로 이 용어가 쓰인다. 그리스도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차선(次善)이나 여분으로서가 아닌 최고(最高)의 우선적 사랑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뜻이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란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이다.

카이 호스 우 람바네이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콜루데이 오피소 무 우크 에스틴 무 앜시오스

개역개정,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새번역,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우리말성경,38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가톨릭성경,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영어NIV,38 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영어NASB,38 “And h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영어MSG,38 “If you don’t go all the way with me, through thick and thin, you don’t deserve me.

영어NRSV,38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the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ος ου λαμβανει τον σταυρον αυτου και ακολουθει οπισω μου ουκ εστιν μου α&;ιος

라틴어Vulgate,38 et qui non accipit crucem suam et sequitur me non est me dignus

히브리어Modern,38 ואשר לא יקח את צלבו והלך אחרי איננו כדי לי׃

성 경: [마10:3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刑場)에까지 가야 했다(27:32),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 반란군들이 대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건이 이전에 여러번 있었다. 특히 갈릴리를 중심한 유다의 반란(행 5:37)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 형틀의 이슬로 사라져 간 적이 있었다(Jos, Antiq. XVII, 10:10).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이 십자가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십자가란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러한 시련까지도 감내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否定)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였다. 한편 예수는 그때까지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발설(發說)하신 적이 없으셨지만, 적어도 당신께서는 곧 지게 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Bengel).

󰃨 나를 좇지 않는 자도 –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즉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또 억울해 보이는 시련과, 또 죽음의 아픔까지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라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는 질적으로나(인류 대속 – 헌신과 충성), 시간적으로(영원 효력을 지닌 단회적 사역 – 계속적 사역) 큰 차이가 있다. 여하튼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받은 희생과 죽음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하는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호 휴론 텐 프쉬켄 아우투 아폴레세이 아우텐 카이 호 아폴레사스 텐 프쉬켄 아우투 헤네켄 에무 휴레세이 아우텐

개역개정,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새번역,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우리말성경,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얻을 것이다.

가톨릭성경,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영어NIV,39 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영어NASB,39 “He who has found his life will lose it, and he who has lost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영어MSG,39 If your first concern is to look after yourself, you’ll never find yourself. But if you forget about yourself and look to me, you’ll find both yourself and me.

영어NRSV,39 Those who find their life will lose it, and those who lose their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헬라어신약Stephanos,39 ο ευρων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απολεσει αυτην και ο απολεσας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ενεκεν εμου ευρησε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39 qui invenit animam suam perdet illam et qui perdiderit animam suam propter me inveniet eam

히브리어Modern,39 המצא את נפשו יאבדנה והמאבד את נפשו למעני הוא ימצאנה׃

성 경: [마10:3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 목숨에 해당한는 원어 ‘프쉬케'(*)는 혼(soul)이나 생명(life)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프쉬케’는 또한 본문처럼 일시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모두 함축한 단어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한부(時限附)적인 생명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영원한 참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내동댕이 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해와 관련된 이 문맥에서 우리는 이 구절의 내용을 처참하고도 굴욕적인 순교(殉敎)까지도 각오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의 참 신앙을 버리면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목숨을 잃는 자는 –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되 생명까지 희생하는 자는 다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조금도 상실(loss)되지 않는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칠 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즉 생명은 주 안에서 거듭 태어날 것이고 재물과 시간은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호 데코메노스 휘마스 에메 데케타이 카이 호 에메 데코메노스 데케타이 톤 아포스테일란타 메

개역개정,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새번역,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말성경,40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가톨릭성경,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영어NIV,40 “He who receives you receives me, and he who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영어NASB,40 “He who receives you receives Me, and he who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영어MSG,40 “We are intimately linked in this harvest work. Anyone who accepts what you do, accepts me, the One who sent you. Anyone who accepts what I do accepts my Father, who sent me.

영어NRSV,40 “Whoever welcomes you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the one who sent me.

헬라어신약Stephanos,40 ο δεχομενος υμας εμε δεχεται και ο εμε δεχομενος δεχεται τον αποστειλαντα με

라틴어Vulgate,40 qui recipit vos me recipit et qui me recipit recipit eum qui me misit

히브리어Modern,40 המקבל אתכם אותי הוא מקבל והמקבל אותי הוא מקבל את אשר שלחני׃

성 경: [마10:4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너희를 영접하는 자 – 보냄을 받은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눅 10:16; 요 12:44, 45; 13:20; 행 9:4; Mishna, Berach, V.5).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자기를 보낸 자를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자는 자기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44, 45). 따라서 제자들은 단순 대리인(代理人)으로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 지체(肢體)로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아가 자기들의 생각과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

호 데코메노스 프로페텐 에이스 오노마 프로페투 미스돈 프로페투 렘프세타이 카이 호 데코메노스 디카이온 에이스 오노마 디카이우 미스돈 디카이우 렘프세타이

개역개정,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새번역,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말성경,41 누구든지 예언자를 예언자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이고 누구든지 의인을 의인으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41 Anyone who receives a prophet because he is a prophet will receive a prophet’s reward, and anyone who receives a righteous man because he is a righteous man will receive a righteous man’s reward.

영어NASB,41 “He who receives a prophet in the name of a prophet shall receive a prophet’s reward; and he who receives a righteous man in the name of a righteous man shall receive a righteous man’s reward.

영어MSG,41 Accepting a messenger of God is as good as being God’s messenger. Accepting someone’s help is as good as giving someone help. This is a large work I’ve called you into, but don’t be overwhelmed by it. It’s best to start small.

영어NRSV,41 Whoever welcomes a prophet in the name of a prophet will receive a prophet’s reward; and whoever welcomes a righteous person in the name of a righteous person will receive the reward of the righteous;

헬라어신약Stephanos,41 ο δεχομενος προφητην εις ονομα προφητου μισθον προφητου ληψεται και ο δεχομενος δικαιον εις ονομα δικαιου μισθον δικαιου ληψεται

라틴어Vulgate,41 qui recipit prophetam in nomine prophetae mercedem prophetae accipiet et qui recipit iustum in nomine iusti mercedem iusti accipiet

히브리어Modern,41 המקבל נביא לשם נביא שכר נביא יקח והמקבל צדיק לשם צדיק שכר צדיק יקח׃

성 경: [마10:4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선지자의 이름으로 – 먼저 ‘선지자'(*, 프로페테스)란 히브리어 ‘나비'(*)를 번역한 말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그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삼상 10:10; 렘 1:9). 그리고 ‘이름으로’란 ‘뤠쉠’이라는 랍비적 아람어의 전치사로 보아 ‘…때문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Moffatt). 즉 본문은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로 번역한다. 문맥상 이러한 번역도 가능하며, 이름과 그 인격의 본체 및 지위와 결부시켜(6:9) 해석해도 무방하다. 여하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선지자를 단순히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의 차원에서 떠나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곧 선지자로서의 지위에 합당하게 대우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의 상급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선지자의 상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자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의 일을 할 수는 없다. 한편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것은 결코 작은 영예(榮譽)가 아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은 선지자를 우대함으로써 그의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여 그가 받는 은혜와 보상을 다소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이다(왕하 4:8 ff).

󰃨 의인의 이름으로 –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13:17; 23:29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이전(주로 마카비 시대)의 인물이나 구약 시대의 의인을 지칭함인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의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행 22:14; 약 5:6). 한편 다니엘은 의인들의 최후 승리를 예언하면서 구원을 얻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의롭다고 묘사한 바 있다(단 12:1-4). 여하튼 이 말을 제자 파송(派送)사건을 계속 다루고 있는 본문에 적용하면 이 ‘의인’은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훈도(薰陶)를 따르며, 그들이 제시한 예수를 온전한 믿음으로 수용(受容)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5:20), 이러한 해석이 적절한 듯이 보인다.

카이 호스 안 포티세 헤나 톤 미크론 투톤 포테리온 프쉬크루 모논 에이스 오노마 마데투 아멘 레고 휘민 우 메 아폴레세 톤 미스돈 아우투

개역개정,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새번역,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성경,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영어NIV,42 And if anyone gives even a cup of cold water to one of these little ones because he is my disciple, I tell you the truth, he will certainly not lose his reward.”

영어NASB,42 “And whoever in the name of a disciple gives to one of these little ones even a cup of cold water to drink, truly I say to you, he shall not lose his reward.”

영어MSG,42 Give a cool cup of water to someone who is thirsty, for instance. The smallest act of giving or receiving makes you a true apprentice. You won’t lose out on a thing.”

영어NRSV,42 and whoever gives even a cup of cold water to one of these little ones in the name of a disciple–truly I tell you, none of these will lose their reward.”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ος εαν ποτιση ενα των μικρων τουτων ποτηριον ψυχρου μονον εις ονομα μαθητου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υ μη απολεση τον μισθ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42 et quicumque potum dederit uni ex minimis istis calicem aquae frigidae tantum in nomine discipuli amen dico vobis non perdet mercedem suam

히브리어Modern,42 והמשקה את אחד הקטנים האלה רק כוס מים קרים לשם תלמיד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לא יאבד שכרו׃

성 경: [마10:4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제자의 이름으로 – 40-42절은 제자들을 격려, 위로하는 강화의 결말부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병렬(竝列)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동일한 대상 즉, 12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으며(Allen, Manson), 다른 이들은 이들 모두가 각기 신분과 직책이 다른 구별된 특수 계층이라고 이해하고 있다(Hill). 아마도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뒤이어 나오는 ‘소자’란 말과 연결시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더욱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소자’라 부르셨던 것이다(25:40).

󰃨 소자 – 소자는 흔히 배우는 자(사 60:22; 슥 13:7; A. T. Robertson)나 미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18:6, 10; 막 9:42) 본문에서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모두 포함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나 사도들 그리고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작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가치관에서는 섬기는 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 선지자나 의인, 사도들은 모두 이 소자의 신분에 있다고 본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 실로 찬물 한 사발의 제공은 선행의 가장 초보(初步)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하에서 한그릇의 냉수란 곧 생명력 넘치는 환대(歡待)를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정성어린 대접은 제공하는 편에서는 별 것(a rarity) 아닐지라도 제공받는 자와 그를 그곳에 보낸 자의 편에서는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사역자들과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자들의 봉사를 단순한 도덕적 선행 이상의 가치로 평가하신다(25: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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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0장

그 수효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수나 그 지파의 족장이었던 야곱의 아들과 연관이 있는 12이었다. 복음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어야만 한다. 유대인은 먼저 복음 교회에로 초대되어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씨를 낳게 하는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육신에 의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거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 둘은 다른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임명되고 있다. 이 열 둘은 그들의 교훈에 의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였다(눅 22:30). 이 열 둘은 교회의 면류관을 만들었던 열두 별들이었다(계 12:1).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들은 아론의 흉패에 있는 열두 보석들과 떡 상에 있는 열두 떡덩이, 엘림에 있는 열두 우물에 의해 상징되었다. 이 사람은 왕의 왕(king of kings)과 인류의 몸 사이를 문의하기 위해 명부에서 뽑혔던 유명한 배심원(또한 그것을 큰 배심원을 만들기 위해 바울은 이에 첨가되었다)이었다. 또한 이 장(章)에서 그들은 “모든 심판이 위임되었던”자에 의해 주어진 책임을 가지고 있다.그들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더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상의 큰 자들의 높고 강한 이름들은 “먼지 속에 묻혀 있지만”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쓰여진 것”(눅 10:20)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이 열두 사도들 중의 어떤 사도는 우리들이 성경에서 그들 이름 이상으로 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바돌로매나 가나안인 시몬과 같은 사도들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신실한 종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사역자들은 유명한 것 같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행동은 훌륭한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그들은 둘씩 짝지어(by couples)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들은 “둘씩 짝지어” 보내어졌고, 또한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봉사적이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영혼들에 대해 봉사적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잊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은 기억할 것이며, 또한 “두 증인의 입에서부터 모든 말은 견고케 되는”것이다. 그들 중의 세 쌍(雙)은 형제였는데, 곧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다른 야고보와 레위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정과 친교는 친척들 사이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며, 종교에 대해 봉사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출생에 의한 형제가 은혜에 의한 형제가 되고 두 유대가 서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베드로가 맨 처음에 명명된 것은 그가 맨 처음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그들 가운데서 가장 앞선 사람이었거나 매사에 그 자신이 그 밖의 사도의 대변자가 되었거나 또는 그가 할례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밖의 사도들을 다스릴 힘을 주었거나, 또한 이 거룩한 대학에서 그에게 주어졌거나 그의 의해 전에 요구되었던 어떤 우선권의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는 여기에서 도마와 연결되어 있다(3절). 그러나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마가와 누가의 사건에서 비롯된 다양성이 있다(막 3:18; 눅 6:15). 여기에서 마태는 처음에 놓여지고 있다. 이 순서에 의하면 마태는 도마보다 앞서 임명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마태 자신의 목록에 의하면 도마가 먼저 두어져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다른 사람을 더욱 앞세워 존경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마가나 누가 복음에서는 그가 단지 마태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세리 마태, 즉 세관의 관리, 세무사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그는 수치스러운 직업에서부터 사도로 불리워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쪼개어진 바위를” 바라보는 것이나 또한 종종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겸손하게 되며 신적 은혜가 더욱 영화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마태는 세리 마태였다.시몬은 갈릴리의 가나에서 유래된 가나안인(人) 또는 가나인(人)으로 불리워지는데, 아마도 그는 이곳 태생이었던 것 같다. 혹은 젤롯당 시몬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열심당을 뜻한다고 본다.가롯 유다는 언제나 “배반했다”는 검은 오점과 함께 맨 나중에 명명되고 있다. 이것은 맨 처음부터 그리스도는 그가 마귀를 소유하였고 배신자가 되어 비참한 자가 될 것을 아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서 그를 뽑은 것은 그의 교회에 놀람이나 실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쨌든 사악한 추문은 가장 좋은 사회 단체에서 깨뜨려져야 한다. 우리의 은혜의 잔치에 이러한 오점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밀 속에 가라지가, 양속에 이리가 있었다. 그러나 외식가들이 탈을 벗고 옷을 베낄 때 발견과 분리의 날은 온 것이다. 사도직이나 사도들 중의 남은 자도 그의 사악이 감춰지고 일어나지 않았던 동안 열두 제자 중 하나민 유다 때문에 일찍이 나빴던 일은 없었다.

Ⅲ. 위임받았던 사람들의 수와 이름. 그들은 사도, 즉 사자(使者)로 임명받았다. 천사와 사도는 동일한 일─”임무를 가지고 보내어진”사람, 즉 대사를 의미하고 있다. 신실한 모든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파송을 받았지만, 그에 의해 최초로 또한 즉각적으로 보내어진 자는 특별히 “사도,” 즉 그의 나라에서 주요한 지위를 가진 사역자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직무의 초창기에 불과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 사도직을 주셨던” 것은 그가 “높은 곳에 올라가셨을” 때였다(엡 4:11). 그리스도 자신이 사도로 불리우신 것(히 3:1)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으셨으며” 또한 그와 같이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이었다(요 20:21).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워졌다.

그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셨다”(1절). 그는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다. 지금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고 계시며, 그들을 더욱 친근하게 끌어 들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관찰했던 거리고 그들을 유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자의”는 이와 같이 “높여질”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제사장들은 백성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말해졌다. 동일한 것이 복음 사역자에 대해 말해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그것이 영예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간” 자들에게서 거룩케 될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경외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았을 때 다 함께 한가지로 그에게로 “나아왔다”는 사실이다(마 5:1). 그러나 그들은 “임명되었으므로” 그는 “그들을 부르신”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르치는 것보다 더 배우려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찾아야만 한다.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생각하기 전에 분명한 “부르심을 기대해야”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 영예를 그 자신이 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그는 사람을 순종케 할 “능력”(xevousi,an), 즉 “권세”를 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셨다.” 또한 그 권세의 확인을 위해 마귀를 순종케 할 능력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정당한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능력은 제한 없이 그에게 주어지며, 또한 종속적인 능력도 그에게 주어진다. 모세가 그의 영예의 어떤 것을 여호수아에게 준 것처럼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채용했던 자들에게 그의 능력을 분배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셨던 똑 같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사용하셨던 능력의 완전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증거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그들에게 “불결한 영들”과 “각종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목적은 “마귀를 정복하고 세상을 치유하는”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설교자들은 칭찬할 만한 모든 외부적인 장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부귀나 학식, 영예의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매우 초라한 모습을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져야만 했다.그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능력은 마귀와 그의 나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평균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러운 귀신”인 마귀는 교리적인 오류(계 16:13)와 실제적인 훼방(벧후 2:10)으로 함께 역사 한다. 또한 교역자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에서 마귀를 내어쫓을 능력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적인 왕국”과 마귀와 모든 역사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나타내신 바 되었다.”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모든 각종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의 확증을 위해 이적을 행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유용한 이적을 행하였으며, 이로써 그것이 신실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였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목적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모세의 이적들은 대부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적을 행하는 것 같이 꾸몄던 마호멧도 그 목적이 겉치레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으며 또한 그의 사도들에게 행하도록 분부하셨던 이적들은 모두가 교훈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가 세상의 위대한 교사요 지배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구속자가 되심을 입증하고 있다. 어떤 강조점이 치료 불가능하게 여겨진 자들도 예외 없이 또한 의사의 비난 없이 “각색 병”과 “모든 질병”에 대한 그들의 능력의 범위에 두어져 있는가를 살려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은혜에는 모든 상처를 위한 고약과 질병을 위한 치료약이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악성적이고 만성적인 영적 질병이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는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소망이 없거나 그 틈이 바다같이 넓어서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라.

배척의 상태에서 지키셨다. 그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셨지만, 처음부터 그들 속에 있었던 것을 아셨지만(요 6:70), 그는 그의 교회에 본보기를 제시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취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직분)은 위대한 신뢰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맡기 전에 잠시동안 연단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도록 하라”(딤전 3:10). 그러므로 갑자기 어떤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는 안 되며(역주:안수해서는 안 되며) 먼저 그를 후보자나 수습생(시험 중인 사람), 후견생(불란서 교에서 쓰는 용어)으로 관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의 죄가 앞서면 다른 사람이 따르기 때문이다(딤전 5:22).준비의 상태에서 지키셨다. 그 동안 쭉 그는 제자들을 이 위대한 역사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도록 준비시키고 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위해 의도하시고 부르시는 자들을 그는 먼저 그것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시키시며 자격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자들을,”자신과 더불어 있게 함으로써” 준비하셨다. 교역의 일을 위한 최고의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숙이며 친교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를 섬기려”하는 자는 먼저 “그와 함께 있어야만” 한다(요 12:26).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러 가기 전에 “그에게” 뿐만 아니라 ” 그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가졌었다(갈 1:16). 신앙의 생생한 행동과 또한 기도와 명상의 빈번한 연습에 의하여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유지되고 보존되어야만 하며, 이것은 교역의 일에 필수적인 자격이기도 하다.”그들을 가르치심”으로써 준비시키셨다. 그들은 학자나 학생으로서 그와 함께 있었으며 또한 그는 그들이 공중 설교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 이외에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은밀히 가르쳤다. 그는 그들에게 성경을 펴셨으며, 그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여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것들은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줄 수 있도록 받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한다(딤후 2:2). 복음 진리는 그들이 복음 사역자로 임명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위탁되어야만 한다.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권위”를 주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련한 자편에 기별하는 것이다”(잠 26:6).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내어보내기에 앞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마 5:2). 또한 이후에 그들의 사명을 확대시켰을 때 그는 그들에게 더 충분한 교훈을 주셨다(행 1:3).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 혹은 전권대사로 임명하셨던 자는 누구였던가?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었다(1절). 그는 그들을 제자들, 즉 그의 즉각적인 추종자나 영속적인 수행자로 부르셨다. 그 때에 그는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대개 점차적으로 영예와 은혜를 수여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와 은혜의 빛은 아침의 빛과 같이 “더욱 더 빛난다.” 그 동안 쭉 그리스도는 이 열두 제자들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맹렬할 것이며, 그들 자신에 대한 그들의 반성은 더욱 통렬할 것이다. “아들들아, 기억하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주어졌으나 오히려 사망을 택한 자들의 구에 매우 두렵게 들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을 때 그들의 불법은 그 사건에 대해 소돔의 불법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겔 16:48, 49). 하물며 그가 지금 우대하신 선지자, 곧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때야 오죽하겠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사실에 대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 그들은 “그 집이나 성에서 떠나야만”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복음은 그것을 저버리는 자에게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떠날 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야”한다.그들의 악함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땅은 더러운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더러운 것으로 “떨어 버려야만”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과 더불어 교제나 친교를 가져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그 성의 먼지까지도 떨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배도자들의 행위는 내게 붙잡지 아니할” 것이다(시 101:3). 선지자는 “벧엘”에서 “먹거나 마시지”아니하였다(왕상 13:9).그들에게 대한 분노의 경고로서. 그것은 그들이 먼지처럼 비천하고 사악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떨쳐버리실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도들의 떨쳐버린 발의 먼지는 그들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막 6:11). 야고보서 5장 3절과 비교하라. 이것이 실천된 것을 보라(행 13:51; 18:6).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는 “가볍게 여겨질 것이라”는 사실이다.이러한 “고의적인 불복자”에게 닥쳐올 운명(15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앞으로 다가오는 심판의 날이 있으며 그때에는 복음을 거절하였던 모든 자들이 확실히 그것을 받아야 하는 자로 불러냄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아무리 그것을 희롱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구원할 교훈을 듣지 않으려는 자는 그들을 파멸시킬 선고를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심판은 “그 날”까지 연기되는 것이다.그날에 있어서 형벌에는 상이한 차등이 있다. 지옥의 모든 고통은 “견딜 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지옥 속으로 빠져들며 더욱 매맞게 되는 것이다.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는 그 날에 소돔이나 고모라에 대한 정죄보다 더욱 심하고 무거울 것이다. 소돔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해진다(유 7). 그러나 그 “형벌”은 큰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극심하게 도래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매우 사악하였으며(창 13:13), 더구나 불법이 가득 찼으며 또한 그들에게 파송된 천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능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창 19:4, 5). 또한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14절). 그러나 그것도 그리스도의 사역자와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자들보다 오히려 더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을 거절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방법에 대해 명령을 받고 있다. 이 경우는 “그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 자들”(14절)에 대한 언급이다. 사도들은 지금 그들이 전파할 이러한 교훈을 가졌으며,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보편적으로 환대를 받으며 또한 환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전에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최상의, 가장 능력 있는 복음 전파자는 그들을 경청하지도 않고 어떤 존경의 표식도 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소리”에 귀를 막으며 “매력적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의 말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살펴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과 복음 사역자에 대한 멸시는 흔히 함께 병행하며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에 대한 멸시로 해석되며 이에 준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들에게 명령하기 위하여. “만일 너희의 인사 때문에 그들이 실로 합당하다는 것이 나타난다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사귐에 대해 관심을 더욱 가지게 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하라. 그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평안을 전파하라.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일 그들이 그것을 무리하게 너희들에게 가져간다면, 또한 너희를 거스려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너희가 말했던 것을 취소하고 그들에게서 너희의 등을 돌리라. 이것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너희의 남은 은혜에 합당치 못하며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큰 축복은 사람이 시련 가운데 있을 때나 행동하는 경우에 거의 무시되거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짐으로 말미암아 종종 상실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에서는 그의 장자권을 상실했으며(창 25:34), 사울은 그의 나라를 잃은 것이다(삼상 13:13, 14).

첫째, 사도들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인사는 “평안할지어다”였다. 그들이 이것을 사용했을 때는 그것이 복음으로 바꾸어졌다.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평화,” 하늘나라의 평화였다. 그들이 이러한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선포하는 것을 마음으로 꺼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합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망설임을 없애도록 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복음적 기도도(이제 그것은 그와 같이 되었다) 복음적 제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모든 사람을 위해 베풀어야만 하며 또 그것의 결과는 마음과 모든 사람의 참된 성격을 아시는 하나님께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그 집이 합당하다면 그것은 “너희가 축복의 유익을 획득할 것이다.” 만일 합당하지 않다면, 아무런 손상이 없다면 너희는 그 유익을 잃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그의 배은망덕한 원수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것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시 35:1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 자비롭게 판단하거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 또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남겨 두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경건하게 가족들에게 인사드렸을 때 그들은 거슬러 그 가족에 관해 판단해야만 하며 이에 따라 진행시켜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선한 사람들과 교역자들에게 어떻게 환대하는가를 살피기 위해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하기를 빌라.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3절). 그들이 “가장 합당한 자”(11절)를 찾은 후에 그들이 합당치 못한 자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반적인 소식이나 의견에 경청하는 것은 지혜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잘 분별하여 판단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 “현명한 자의 지혜”는 스스로 그 자신의 “길이 깨닫는 것”이다. 이제 이 규칙이 의도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낯선 집에서, 그들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집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집에 들어갈 때 인사를 드려야만 한다. “그러한 예의에 있어서 너의 겸손의 표로 사람을 앞질러 행하라. 네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초대받는 것에 대해 거북하여 생각하지 말라. 가족들에게,””보다 더 대화를 이끌어 내거나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의 메시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인사하라”(공통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서서히 교화에 좋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가족들에게 너희를 환영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인사하라. 너희는 그 인사가 스스러움이나 냉정함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며 혹은 준비된 답례로 받아들여지는 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인사를 친절하게 받지 않으려는 자는 너희의 메시지를 친절하게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대해서 불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불충성하기 때문이다(눅 16:10).””가족들에게 그들의 좋은 의견을 넌지시 말하도록 하기 위해 인사하라. 너희가 진지할지라도 침울하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가족들에게 인사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교는 우리들에게 정중하고 예의바를 것과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권위를 힙입어 나갔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명령하지 않고” 인사하였다. 왜냐하면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는 것”이 복음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몬 8, 9절). 영혼은 먼저 “사람의 줄”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려지며 “사랑의 띠”에 의해 그에게 보존되는 것이다(호 11:4).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먼저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는 인사를 받았던 것이다(행 10:25 참조).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받고자 한 것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방면을 바꾸는 좋은 의도가 없는 것으로 올바르게 추측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을 가장 좋은 곳으로 여기며 또한 모든 불쾌와 불편 때문에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들에게 낯선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지도할 것에 대해 명령을 받고 있다.”낯선 성이나 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가 마을에 들어가면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으라.”각 장소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복음을 받고 그것을 전파하는 자를 영접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추측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보편적인 타락과 배교의 때였다고 했을지라도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악의 때와 장소에 있어서 우리는 너그럽게 그들 자신을 구별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이웃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내를 거스러 헤엄치는 사람이 있으며 겨 가운데 있는 밀과 같은 사람이 있다. 네로의 집에도 성도는 있었다. 누가 합당하며, 그들의 안목에서 볼 때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또한 누가 그들이 가진 빛과 지식을 좋게 개선하는가를 탐문하라. 최고인 자는 복음 제의의 은혜의 공로로부터 먼 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도와 그들의 메시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호의적인 환영을 하며 이러한 진주를 발로 짓밟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것에 대한 이전의 성벽은 사람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교역자들에게 지시와 격려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합당한 것처럼 이미 잘 기울여지는 자들에게 유익한 말씀의 최고 소망이 있다. 또한 이곳 저곳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그들은 이러한 자를 찾아야만 한다. 가장 좋은 여인숙을 찾아서는 안 된다. 공공적인 집은 돈을 가지거나(9절). 어떤 것도 받으려고 기대하지 않는(8절) 그들에게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잘 환대할 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집에서 적응할 것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의 기도와 설교에 대해 선지자의 보상, 사도의 보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을 환영하는 자는 그 비용을 아까워하거나 이 세상에서 그것에 의해 얻으려고 약속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자인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되며, 합당한 자를 찾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신사를 찾아서는 안 되며, 가장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든지 그곳의 좋은 사람에 대해 탐문해야 하며 그들과 친숙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취할 때 우리는 그의 백성을 우리의 백성으로 취하며 그것과 똑같이 즐거워 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여행을 통하여 거기에 형제가 있다면 찾았다(행 28:14). 만일 그들이 합당한 자를 찾았다면 그들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웃보다 더 나았던 자는 주시 될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정직하고 착실하며 좋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오른 손의 고약과 같이 그 자체를 드러내며 그 향기로 집을 채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선견자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고 있었다(삼상 9:18).그들이 합당하다고 본 자들의 집에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기거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의 각 성읍에서 단시일 머물렀음과 그들이 거처를 바꿀 필요가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들이 맨 처음 거처했던 곳에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을 것을 나타내고 있다.

Ⅴ. 그들이 어떤 장소를 물색하는데 있어서 유념해야 할 처신(11-15절). 그들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갔으며, 초대되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곳,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갔다. 그들이 태어난 고향은 그들에게 낯설은 곳이었다. 그들은 어떤 규칙에 의해 가야만 했는가? 그들은 어떤 길을 취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완전히 교육시키지 않고는 보내시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 그것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일을 위해 준비를 해서는 안 된다(9, 10절).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 한편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하여 지위를 높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이에 대해 자신들이 소유한 것에 어떠한 것도 소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사명에 제한된 것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인간 지혜의 행위를 따라” 행동할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 단기간의 여행을 할 따름이며 곧 그들의 주인, 즉 그들의 사령관에게 다시 돌아갔으며 따라서 왜 그들은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무거운 짐을 져야만 할 것인가?”신적 섭리에 의존하여” 행동할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다. 그들은 “목숨을 위해 걱정하지 말고”(마 6:25 등) 생활할 것을 가르침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를 섬기는 데 있어서 “간편한 음식을 휴대”해야 할 대부분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할 여기 없이 그리스도는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을 결코 궁핍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고용하신 자들은 특별한 보호 아래 두어지며 또한 특별한 준비가 마련된다. 그리스도께서 고용한 종들은 “나누어 줄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에 대해 충성하거나 우리의 일을 잘 수행하려고 진력하는 동안 우리는 그 밖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는 준비하신다) 주님으로 하여금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우리와 우리의 것을 위해 마련하시도록 하자.그들은 그들이 보내어진 자들(그들을 받아들이는 자)이 필요한 것을 “그들을 위해 준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10절).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들은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이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하러 가는 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며 친절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준비하도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은 제단에 의해 부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는 가질 수 있는 것이다(고전 9:13, 14). 그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로 말미암아 생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은 옳은 사실이다. 사역자들은 노동자요 일군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러한 자들은 먹을 양식을 벌기 위하여 그 밖의 다른 노동을 하지 않도록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려고 하시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생활 문제로 마을 사람들을 불신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만일 너희가 그들에게 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다면 정녕 그들은 너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충분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행한다면 결코 진미(珍味)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여러분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적절한 때에 진행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가서 산을 옮겨라”거나 “하늘로부터 불을 끌어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은 사랑과 선하심이 그들이 전파하러 왔던 복음의 정신과 순수성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그들이 세우려고 고용된 왕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공적인 축복으로서 널리 보냄을 받았다. 이것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며 “모든 사역에 대해 그의 자비하심이 편만해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이 전파하였던 교훈의 의도는 병든 영혼을 고치며 “죄 가운데 죽었던”자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죽은 자를 일으키신” 사실이 언급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전에 그가 늘 소생시킨 자에 대한 기사를 읽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적인 생명에로” 많은 사람을 일으킨 도구였기 때문이다.”거저 선을 행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모든 질병들을 고치는 권세를 가졌던 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부요하게 할 기회를 가졌다. 여하튼 누가 이렇게 쉽고도 확실한 치료들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이적을 행하는 권세를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그들은 더욱 은혜뿐만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 세워진 복음 왕국의 본질과 양상을 입증하기 위해 “거저”(gratis) 치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gratia gratis data)(롬 3:24) “돈 없이 값없이” 약을 사라(사 55:1). 그 이유는 “너희가 거저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병든 자를 고치는 권세는 아무 돈도 드리지 않고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 때문에 어떤 세속적인 유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박수인 시몬은 성령의 은사들에 의해 돈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것 때문에 돈을 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행 8:1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값없이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값없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Ⅲ.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8절). 그가 전에 전파하셨던 동일한 교훈을 전파하려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결코 거짓으로는 할 수 없는 동일한 신적 표적들에 의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와 있는 지금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이적을 부르는 것은 건물이 세워져 있을 때 기초를 다시 놓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행하였던 이적들에 의해 요점이 설정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훈이 충분히 입증되었으므로 표적을 더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이제 이것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가 전에 전파하였던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은 여러 번 반복하여 강조된 진리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또 그것들이 새로운 감동으로 전파되고 경청된다면 그것들은 마치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처럼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복음에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이후에 참으로 성령이 부어지고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이 “천국은 도래하였고,” 지금은 임박한 것으로 언급되었다. “천국”은 우리의 전파의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이제 천국은 도래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말해야만 하며 또한 그 계율과 특권을 그들 앞에 두어야만 한다. 또한 아직 도래해야할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우리는 이 나라가 가까이 와있다고 말해야만 하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은 열심히 고려하도록 경각 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가까이 있는 구원,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있는”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9, 10). 즉 “가까이 있는 천국”이다. 이것은 왕의 직접적인 임재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가 옮겨질 때 사람의 마음속에 세워질 영적인 왕국을 의미한다.

Ⅱ.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설교의 임무. 그는 그들을 임무 없이 보내지는 않으셨다. 아니, “가서 전파하라”(7절)고 하셨다. 그들은 순회하는 설교자였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복음의 시초에 “천국이 가까워졌느니라”고 말하면서 선포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 밖의 것을 말해서는 안 되며, 이것만이 그들의 본문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 주제로 확대시켜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오신 주인이신 메시야의 왕국이 지금 성경을 따라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이때로부터 사람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을 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나라의 특권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였다”(막 6:12)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늘 나라”의 접근에 관한 이 교훈의 적절한 용법과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래 갈망하였던 메시야에 대해 즉시 더 많이 듣기는 기대해야만 하며, 또한 그의 교훈을 받고 그를 믿으며 그의 멍에에 맡길 준비를 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설교는 떠오르는 태양의 접근을 나타내는 새벽빛과 같았다. 이것은 임박한 파멸을 선포하였던 요나의 설교와 얼마나 다른가?(요 3:4).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人)에게 가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유혹을 당하든지 간에 이스라엘 땅에서부터 “이방인의 길로”나 어떤 길로도 가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거절하기까지는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앗수르의 왕이 사마리아에 이주시켰던 잡종 민족의 후손인 사마리아인(人)들의 지방은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마리아인(人)들의 “길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성읍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人)들에게 나타나시기를 꺼려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들에게 전파해서는 안 된다. 만일 복음이 어떤 장소에서 숨겨진다면,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그 장소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다. 이러한 억제는 그들의 맨 처음 위임에서만 두어졌으며, 이후에는 “모든 나라에”가서 그들을 가르치도록 명령받았던 것이다.그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전유하였다(마 15:24). 왜냐하면 그는 “할례자의 사역자”(롬 15:8)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종자와 대변인에 불과하였던 사도들은 그들에게 제한되어야만 한다. 구원의 첫 제공은 유대인에게 향해져야 한다(행 11:2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집”에 대해 특별하고도 다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었다”(롬 11:28). 그는 그들을 “잃어버린 양”과 같이 동정하셨다. 목자이신 그는 곁길로 나가 데려오지 않으면 끝없이 방황하게 될 그들을 죄와 허물의 샛길에서 모으셨다(렘 2:6 을 보라). 이방인들도 역시 잃어버린 양과 같았다(벧전 2:25).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에 정진시키기 위해 그들이 보내어진 자들에 대해 이러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집에로 보내심을 받았으며(그들 자신이 후에 이 수에 속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집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도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분부하셨던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임이 그들에게 계속된 설교에서 주어졌든지, 또는 그것의 몇 항목이 여러 번에 걸쳐 암시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명하셨다.” 야곱이 그의 아들을 축복한 것은 “명하셨다”고 불리워진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것으로서 축복을 명하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0:16

열두 제자의 파송에 붙인 설교 (마태복음 10:16-42)

이 모든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 그들은 여기에서 기대할 것과 준비할 것을 가르침 받고 있다. 그들은 또한 어떻게 그것을 견디며 또한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일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설교의 이 부분은 그들의 현재 위임보다 더욱 더 앞을 내다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 어떤 큰 어려움이나 박해를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그것들을 잘 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직면하게 될 고난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의 사명은 확대되며 “지금 가까이 있었던” 하늘나라가 실제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들은 그때에 어떤것에 대해서도 꿈꾸지 않을 것이며 외적인 과시와 능력에 대해 꿈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또한 그들이 왕이 될 것을 기대했을 때 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띠를 띠고 있을 때 갑옷을 벗어버린 것처럼 이에 준하여 준비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이후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근심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Ⅰ. 어려움에 대한 예언과, Ⅱ. 그것과 관련된 조언과 위로의 명령이 혼합되어 있다.

Ⅰ. 여기에는 어려움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그들이 일할 때 이 어려움을 직면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난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행하신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은 어려움들이 그들에게 놀라움이 되지 않고 또한 그들의 신앙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함이며 예언이 성취되므로 그들이 그들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고난받아야 할 것과 누구에게서 고난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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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을 것인가?” 확실히 어려운 일들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16절) 때문이다. 초라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으며 보호되지 않는 양의 무리가 사나운 이리 가운데서 두렵고 찢기울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사람은 이리들과 같으며 그들의 성품은 삼키고 파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특히 그의 사역자들은 그들과는 반대되는 성품과 성벽을 가진 양과 같으며 흔히 그들에게 쉬운 먹이가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에게 많은 위험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몰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큰 심판날에 그들이 그의 오른편에 앉게 될, 말하자면 그의 양을 위해 예비된 영광이 봉사와 마찬가지로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 그러나 위로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그들을 앞서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위로를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그가 그들을 보호하시며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어려운 경우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그들은 미움받게 될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22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남은 모든 자의 뿌리이며, 그 뿌리는 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세상은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왕실이 축복하는 자를 서민이 미워하는 것처럼. “만일 세상이 연고 없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였다면”(요 15:25), 그것은 그의 형상을 가졌고 그의 사업을 봉사한 자들을 미워한 것이므로 놀라지 말라. 우리는 메스꺼운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만물의 찌끼같이 여겨지는” 것이다(고전 4:13). 우리는 유해한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하는자”(왕상 18:17)와 그들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자(계 11:10)로 간주되는 것이다. 미움을 받고 악의 의 대상이 되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인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구실로든지 미움받는 자의 참된 이유를 말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미움받는 자들에 대한 위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이유 때문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참예하며 그것을 자신이 떠맡아 줄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그들은 죄인으로 인식되고 고발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만 한다.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악의는 저항할 수 없는 악의이며 또한 그들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기 위하여”(17, 18), 공공적인 평화를 보살피는 총독이나 공의석에 넘겨주기 위하여 시도할 뿐만 아니라 설복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재난이 종종 법과 공의라는 미명 아래 선한 사람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재판하는 곳에 악, 즉 핍박하는 악이 있다”(전 3:16). 그들은 공회에서의 높은 통치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통치자나 왕, 최고의 직권자에게서 당할 고통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행해진 이와 같은 험악한 항의 아래 그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두렵고도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분노는 사자의 노호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이 “사도들의 행동”에서 성취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그들은 죽음에 넘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21절). “그들이 자들을 죽는 데” 즉 내어 줄 것이다. 당당하고 경건하게 죽도록 할 것이며, 그때는 죽음이 가장 무서운 “두려움의 왕”으로 나타나게 되리라. 원수들의 악의가 이것을 가할 만큼 높이 격노할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피”에 굶주려 있다.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이것을 기대하는 만큼 견고하게 서 있다. “내 목숨을 내 자신에 대해 귀중하게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의 지혜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순교자의 피를 어떻게 “진리의 표”와 “교회의 씨”로 만드는가를 알고 있다. “자기들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죽는데 내어 준 이러한 거룩한 군대에 의하여 사탄은 정복되었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관심은 두드러지게 진척되었다(계 11:11). 그들은 원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인으로 죽는 데 버려졌으나, 실제로는 희생 제물로서 죽음에 처하여진 것이다(빌 2:17; 딤후 4:6). 번제물로서,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인식의 제물로서 또한 그의 진리와 변호 안에서 제물로서 죽는 데 처하여진 것이었다.그들은 이러한 고난들 가운데서 가장 밉살스럽고 굴욕적인 이름들과 인물들로 낙인 찍혀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의 유혹함과 잔인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박해받는 자들에게 곰 가죽을 씌워 먼저 변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저들에게 붙인 모든 악한 이물들 중 최고의 악명이 여기에 진술되어 있다. 그들은 저들을 바알세불(마귀들의 왕 이름)이라고 불렀다(25절). 그들은 저들을 흑암의 나라의 세력의 장본인으로 나타내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마귀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은 저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게 유해한 자들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기만되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워하라.사탄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사탄의 친구로 표현되고 있다. 마귀의 나라를 멸망시킨 사도들을 마귀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들이 알지 못한 일”과 그들이 증오하고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일로 비난을 받는다.사탄의 철저한 심복이 그의 원수로 생각될 것이며, 또한 그렇다고 결코 그들이 사탄을 대적하여 싸운다고 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일을 행할 수는 없다. 종종 마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자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마귀의 아버지로 만드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옷으로 치장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숨겨진 것은 밝히 드러날 때(여기에 뒤따라 나오는 것처럼, 26절)가 온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이러한 고난은 여기에서 검과 불화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34, 35절). “내가 화평(일시적인 평화와 외적인 번영)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부귀와 능력을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그들에게 화평을 주려고 함이 아니다. 그들을 하늘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으나 땅 위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 시키려 함이며 그 화평은 우리의 양심에 있어서의 화평이요 형제와 더불어의 화평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모름지기 복음의 목적을 오해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자연히 보편적인 화평이 뒤따르지만 그를 거절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한 앞으로 있는 동안(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뱀의 후손”이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의 불화의 열매를 감수할 각오를 지녀야만 한다.”화평”을 구하지 말고 “검”을 구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을 거스려 싸우며 이 검이 행한 “정복하는 일”(계 6:4; 19:21)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또한 세상이 “말씀의 검”으로 마음을 찌르며(행 7:54) 그리스도의 증인의 증거에 의해 고통을 받는(계 11:10) 제자들과 더불어 싸우며 “박해의 검”을 주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이 검이 행한 잔인한 일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그리스도는 이 검을 꺼낼 경우를 제시하며 또한 이 검을 보낸다고 말해질 수 있는 복음을 보내셨다. 그는 그의 교회로 하여금 그의 백상의 은혜들의 시련과 칭찬을 위해 고통받는 상태로 들어갈 것과 그들의 원수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도록” 명령하고 있다.”화평”이 아닌 “불화”를 구하라(35절). “내가 온 것은 불화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복음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해진 일들을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을” 때 믿는 자들의 신앙은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따라서 그들은 믿는 자들에 대항하여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고로 난폭하고 무자비한 반목은 종교의 차이에서 생긴 자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이러한 것은 어려운 말씀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참을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일을 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말해 줌으로써 우리들을 공평하고 신실하게 취급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우리들도 앉아서 먼저 비용을 계산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정대하게 대하기를 바란다.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누구에게서 또한 누구에 의해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정녕 지옥을 열어버려야 한다. 또 큰 구원에 대해 아무런 분깃도 없는 절망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영들 즉 마귀도 이러한 악의에 찬 원수가 “사람들을 향한 선한 뜻”이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본체인 교훈을 이용할 수 있기 전에 정체가 드러나야 한다. 아니, 생각이나 할 수 있으랴? 이 모든 불행이 그들에게 구원을 전파하려고 왔던 복음 전파자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지만 의로운 자는 그의 영혼을 구한다”(잠 29:10).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매우 반대한다. 왜냐하면 땅은 지옥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엡 2: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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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부터이다(17절). “사람들을 삼가라. 너희는 너희와 더불어 동일한 본성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서도 너희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러한 것은 그러한 성품의 비행과 타락으로써(home homini lupus─즉 사람은 사람에게 대해 이리이다) 사람처럼 교활하고 책략적이며 짐승처럼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전적으로 인간성으로 불리운 것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박해하는 격노와 적개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야수나 마귀로 바꾸게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람의 소양을 가진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전 15:32). 가장 친한 친구를 조심해야 할 때가 도래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들이 같은 피로 이루어졌고 “뼈 중의 뼈”인 자들에게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들의 근심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다. 박해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짐승보다 더욱 악하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류를 먹이로 삼는 것이다. Saevis inter se convenit ursis ─즉 야만적인 곰들도 그들 가운데서는 일치한다.

우리가 보호와 동정을 기대할 수 있는 자가 “우리를 치려고 일어나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사람,” 그 이상은 아니다.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 성도가 아니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이 세상 사람”(시 17:14)이다. 성도는 “사람들” 이상이며, “사람들에게서 구별된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해 미움을 받는다.” 사람의 본성은 만일 그것이 성화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버금가는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성품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종속적이고 의존적이며 죽어야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지만 단지 “인생뿐인 것이다”(시 9:20).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사람들을 삼가라.” 하몬드(Hammond)박사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친숙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버린 유대인 산헤드린의 사람들을 삼가라(벧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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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종교를 과시하는 신앙 고백자들로부터이다. “그들은 그들의 회당,”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들의 교회 훈련을 수행하는 장소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그들 종교의 한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회당에서 다섯 번 매맞았다”(고후 11:24).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한 열심이라는 명목 아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매우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으며, 그러한 불법 행위를 그들 종교의 점수에 가산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야심적인 박해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제자들을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추방하여 그들을 죽였으며, 또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사 55:5; 슥 11:4, 5)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당은 박해를 신성케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그 박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회당을 모독하고 속되게 할 것이다.위대한 사람들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로부터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초대의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채찍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는 그리스도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로마의 힘에 넘겨주었던 것이다(요 18:30). “너희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것이다”(18절). 그들은 더욱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욱 큰 불행을 야기시킬 수 있다. “총독들과 임금들”은 그들의 능력을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며(잠 8:15), 또한 그의 종이 되고 그의 교회의 보호자와 양부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그들의 능력을 그를 대적하는데 사용하고, 그를 대적하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지상의 임금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였다(시 2:1, 3; 행 4:25, 26).모든 사람들로부터이다(22절). “너희는 모든 사람,” 즉 모든 사악한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사악함”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대의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은 매우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친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 치우쳤으며,” 그러므로 ‘내 백성을 삼켰다”(시 14:3). 하나님께로부터의 배교가 행하는 것만큼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이 행해지는 것이다. 어떤때는 그것이 다른 어떤 때보다 더욱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불순종의 자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 독소의 어떤 것이 있다. “세상은 너희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온 땅은 짐승을 이상히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 이므로 진리를 미워하는 것이다.그들 자신의 모든 친척들로부터이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죽는데 내어 줄 것이다”(21절). 이 때문에 “사람(man)이 그 자신의 아버지와 불화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 보다 더 연약하고 나약한 성(性)을 가진 여자들도 역시 박해자가 되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박해하는 딸이 믿는 어머니를 대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러한 처지에서는 본래적인 애정이나 자식으로서의 의무가 그 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때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 매우 종종 사랑의 냉정함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35절). 일반적으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절). 그의 친구들이 되려는 자들은 기독교를 신봉하기 때문에 특히 핍박을 받을 때 이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낼 것이며 또한 그를 거스려 그의 핍박자들과 제휴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강력한 친족적 사랑과 의무의 유대는 종종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한 적의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참 종교를 거스리는 편견이었고 거짓된 것에 대한 열심이었으며 모든 관심과 최고의 성스러움, 매력적인 것과 애정이 이러한 몰록(Molochs)들에게 드려져 왔다.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러한 “맨 것을 끊으며 그 결박을 벗어버린다”(시 2:2, 3). 그리스도의 배우자는 그 “어미의 아들들”의 분노로부터 어려운 일을 겪는다(아 1:6). 이러한 자들로부터의 고난은 더욱 비참하다. 그 어느 것도 이것보다 더 짜를 수 없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이다”(시 55:12, 13). 또한 이러한 자들의 적의는 대개 도무지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우니라”(잠 18:19). 고대와 현대의 순교사(殉敎史)는 이러한 실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데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아야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환난을 거쳐야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임을 기대해야만 한다.”

Ⅱ. 이러한 고난의 예고와 더불어 우리는 여기에서 고통의 때를 위한 권고와 위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도 그들을 실로 위험스러운 곳으로 보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시험을 잘 견딜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함으로 무장시켜 보내신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종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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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일들에게 권고와 지시하는 방법으로.”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워라”(16절). “너희는 그렇게 해도 좋다”(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허락하는 것으로 취한다). “너희가 비둘기처럼 남을 해치지 않는다면 너희가 좋아하는 만큼 용의주도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모든 때에 유용한, 특히 고난의 때에 유용한 그의 길을 아는 신중한 사람의 지혜를 우리에게 추천하는 교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즉 너희는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교활하게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여우와 같이 지혜롭지는 말아라. 오히려 그 자신만을 방어하며 또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뱀”과 같이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으며, 또한 그들의 파멸은 기정화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뱀”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려움 가운데 많이 노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사역자들은 불필요하게 그들 자신들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며, 그들 자신의 보호를 위해 공정하고도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지혜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마 21:24, 25; 22:17, 18, 19; 요 8:6, 7). 그는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여러 번 그의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셨다. 바울의 지혜를 본보기로 살펴 보라(행 23:6, 7).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는 목숨과 그 모든 위로에 대해 냉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머리가 깨어지지 않도록 안전케 하는 것이나 “술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시 58:4, 5) 것이나 또한 “바위틈에 피하는 것”은 “뱀”의 지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울 수”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머리 위로 고통을 끌어들이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 악한 날에 침묵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도울 수 있다면 “범죄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유순하라. 그리고 온유하라. 또한 침착하라. 손상에 대해 무엇이든지 하지 말며 악의에 대해 무엇이든지 참으라. 비둘기처럼 증오하지 말라. 이것은 언제나 전자와 병행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고” 있으며, 그러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양과 같이 보냄을 맏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한다. 우리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행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로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를 주고 되돌려 받는 “뱀”의 간교함보다는 20번의 손상을 참을 수 있는 “비둘기”의 순결을 사용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그들이 처하여 있는 원수들과의 관계에서 결백하고 무해 하는데 대해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식(肉食)을 하는 새들로 포위되어 있을 때 그들을 성나게 하거나 또는 그들에 의해 성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을 필요로 한다. 다윗은 매의 날개보다는 멀리 날아가서 휴식을 얻기 위하여 “비둘기의 날개”를 갈망하였다.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다.” 또한 모든 신자들은 전쟁이 아닌, 사랑을 위해 마련된 “비둘기 같은” 영 즉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하는 것이다.”사람들을 삼가라”(17절). “언제나 조심하라. 그리고 위험스러운 무리를 피하라. 너희가 말하고 행한 것을 유의하라. 어떤 사람의 신임에 대하여 너무 동떨어진 추측을 하지 말라. 가장 그럴듯한 주장에 대해 방심하지 말라. 친구를 믿지 말라. 아니, 네 품 속에 있는 아내를 믿지 말라”(미 7: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유의하는 것은 은혜스러운 자들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사람들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곤고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해야 할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일찍이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 의하여 입맞춤으로 배반을 당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 즉 “거짓 형제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19절). “너희는 총독들 앞에 끌려갈 때에 버젓하게 행동하라. 그러나 어떻게 빠져나갈까를 궁리함으로 고민하지 말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근심하거나 당황, 또는 불안한 생각을 하지 말라.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께 맡겨 버려라.” 마치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ad captandam benevol entiam─즉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훌륭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릇된 변명을 겉치레할 뿐인 이상한 표현이나 화려한 꾸밈을 하지 말라. 좋은 금은 그것을 도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이 이 일에 열심하는 것은 너희의 변명이 자신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야하는 근거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verbaque praevisam rem non invita swquentur─즉 적절한 표현이 쉽사리 생기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무엇을 말할까 미리 염려하지” 않았던 3인의 전사(戰士, 다니엘의 세 친구)보다 총독이나 왕 앞에 더 잘 말하였던 사람은 없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 3:16; 시 119:46)을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게 잘 “말할”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잘 “행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그들의 정직을 “변호”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Non magna loquimur, sed vivimus─즉 자만한 말이 아닌, 우리의 생활은 최상의 변증을 이룬다.”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절). “이와 같이 너희와 너희의 교훈을 거절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네 자신의 안전을 위해 피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임박한 위험이 닥쳐올 경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그들에게 도피의 문을 개방할” 때 도망함으로써 그 자신들을 안전케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하는 자는 다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그들의 군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지역을 포기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의무”의 길에서 나가지 않으면서도 “위험”의 길에서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피난처를 마련하신 그의 돌보심을 보라. 그와 같이 명하셨으므로 핍박은 동시에 모든 각처에서 휘몰아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성”이 그들에게 뜨거울 때 “다른 성”은 보다 차갑게 또는 “적은 성역”으로 보존된다. 곧 이것은 사용되고 멸시되지 않은 은혜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러한 단서가 붙는다. 즉 죄스럽고 부당한 수단이 피신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개방하시는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지혜”와 정직이 “교훈하기에 유익한” 모든 것들의 적용에 있어서, 즉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규율에 대한 많은 실예 들을 발견할 수 있다.”저희를 두려워 말라”(26절).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몸만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28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수많은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의무와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혼돈의 덫을 가져온다. 즉 우리가 죄로 빠져 들어가도록 혼란시키는 덫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심스럽게 주시되고 추구되고 기도되어야만 한다. 때가 악하고 원수가 격동하며 사건들이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비록 땅이 옮겨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선한 이유, “은혜로 말미암은 선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험에 이를 때 고문과 고통, 토굴과 돛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젖게 한 배), 도끼들과 교수대, 불과 장작더미는 용감한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특히 두 서넛의 쇠약한 걸음에 의해 피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할 때 뒷걸음질치게 하는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에 대해 우리를 무장하기 위하여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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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의 제한된 능력으로부터 이끌어낸 이 두려움에 대한 좋은 이유. 그들은 “몸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격노가 최고도에 이르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행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더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을 죽이거나” 해할 수 없다. 영혼은 사람이다. 이로 보건데 영혼은(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처하여지거나 또는 사고나 인식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몸을 죽이는 것이 영혼도 죽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서 끊어질 때에 죽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은 영혼의 생명이며 또한 그의 진노의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능력보다 더 벗어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지는 못한다. 도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에게 사랑 받는 것을 못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롬 8:35, 37).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보석들처럼 자신의 영혼에 대해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들을 빼앗아 갈 능력이 없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죽게 될 몸을 죽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즐겁게 할 “영혼”은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장농(cabinet)을 부실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방인은 폭군을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Tunde capsam Anaxarchi, Anaxachum non laedis─즉 너희는 아낙사쿠스의 처지를 욕할 수 있으나 그 자신을 해칠 수는 없다. 값비싼 보석은 만져지지 않는다. 세네가(Seneca)는 죽음 그 자체는 현명하고 선한 사람에게 참으로 어떤 재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에 너희는 그를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Si maximum illud ultra quod nihil habent iratae leges, aut saevissimi domini minantur, in quo imperium suum fortuna consumit, aequo placidoque animo accipimus, et scimus morten malum non esse ob hoc, ne injuriam quidem─ 즉 만일 우리가 손상을 입히는 법과 무자비한 폭군이 전혀 고통을 입히지 않고 또한 운명이 그 지배를 종결지우는 최후의 극단을 태연하고 침착하게 직면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최소한의 상해도 야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Seneca, De Constantia).그것에 대한 좋은 처방. 그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라.

첫째, “지옥”은 “영혼의 몸”의 파멸이다. 그것은 전인(全人)의 파멸인 것이다. 만일 영혼을 잃는다면 몸도 역시 잃게 된다. 그들은 함께 범죄 하였다. 몸은 죄로 이끄는 영혼의 시험자였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둘째, 이 파멸은 하나님의 능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멸하실 수 있으시다.” 그것은 그의 “힘의 영광”에서 비롯되는 파멸이다(살후 1:9). 그는 그것으로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 판결을 내리는 그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 판결을 수행하는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롬 9:22).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훌륭한 성도들에 의해서도 “경외를 받으셔야만 한다.” “주님의 두려움을 알므로써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경외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두려움에 따라 그의 진노가 된다면 그의 진노에 따라 그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특별히 그 이유는 “아무도 그의 노(anger)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시 90:11). 순진한 아담도 위협에 두려워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스러운 두려움을 억제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그때는 이미 죽었었다)의 하나님은 이삭(아직 살아 있었다)의 경외하는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창 31:42, 53).

넷째, 하나님과 영혼을 지배하시는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항하는 최고의 제해물(除害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불찬성의 얼굴을 대함 보다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찡그린 얼굴을 대함이 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 가장 옳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행 4:19). “장차 죽게 될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들을 지은 자인 여호와를 잊는 자이다”(사 51:12, 13; 느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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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할 것이다”(27절).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여 너희의 임무를 수행하라. 그것은 너희의 임무이다. 원수들의 의도는 너희를 파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어떻게 되든 간에 그것을 전파하라.”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말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이다(히 2:3).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바를 말하였는데─즉 “그것이 모든 것이었으며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 대사들은 그들의 교훈을 은밀하게, “어두운 데서,” 귀로, 구석에서, 비유로 받았다. “그리스도는 많은 것들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으며,” 그가 공중 앞에서 설교하셨던 것과 틀리게 “은밀히 설교하신 일은 전혀 없다”(요 18:20).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나니 나라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특별히 교훈 하셨을 때는 귀(ear) 속으로 속삭이셨다(행 1:3). 왜냐하면 그때에 그는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어 나타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빛 가운데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잠 1:20, 21; 8:2, 3).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방인들이 교회로 받아들여질 것에 대한 첫 번째 암시는 “지붕 위에서” 행해졌다(행 10:9).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숨겨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계시되어야만 한다”(행 20:27). 많은 무리들에게 그것은 분명히 그리고 완전히 전해져야만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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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격려의 방법에 의해. 여기에서는 그 목적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거의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역과 어떤 능력의 협조 없는 현재의 연약함을 통하여 맞붙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을 고려하면서 그들은 가까스로 이러한 취급의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은 왜 즐거워해야 하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여기에는 그들의 현재 사명에 대해 특유한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23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들은 “인자,” 곧 메시야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전파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시며”하고 기도하였다. 이제 그들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전파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그리스도의 승귀와 성령의 부으심으로 나라가 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위로가 되었으니, 곧그들이 말했던 것은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자가 오고 계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보라 그가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자의 말을 확증하실 것이다”(사 44:26).그것은 빨리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하는 시간은 짧을 것이며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고용인도 자기의 시간을 가지는 법이다. 일과 전쟁은 잠시 동안에 만료된다.또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때에 그들은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인자가 올 때에 그들은 위로부터 보다 큰 능력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위임자와 특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의 사명은 확대될 것이며 또한 그들은 전권대사로서 세상으로 파송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여기에는 그들의 일반적인 사역과 연관된 많은 어휘들이 있으며 또한 그들이 그 가운데서 직면해야하는 고통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좋은 말들이며 위로를 주는 말들이다.”그들의 고난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함이다(18절). 유대인 공의회가 너희를 죽게 하려고 로마 관원들에게 넘겨 줄때에 이로 말미암아 어느 한 재판석에서 다른 재판석으로 분주하게 재촉을 받는 것은 너희의 증거를 보다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아니, 너희는 그들에게 증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가 당하는 바로 그 고난들에 의해 그들에게 증거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행하는”(doing) 사역과 “고난받는”(suffering) 사역에 있어서 그의 증인(사 43:10)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교자─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의 진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은 그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증인이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이 고백한 복음 진리를 증거하며 동시에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적의에 대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 대해 증거가 되며,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큰 심판날에 명백하게 나타낼 것이다. 판결의 이유는 “너희가 이러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이다. 만일 그들이 고난이 증거가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즐겁게 견디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그 증거는 그러한 것들이 오기 전에는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계 11:7).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인내해야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어떠한 경우에도, 특히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증거하기 위하여 소환을 당해야만 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서” 선택함을 받은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특히 위대한 사람들 앞에 불리웠을 때 그들 자신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불신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로 보냄을 받았을 때 그는 불평하기를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하였다(출 4:10).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그는 한사코 “나는 아이라”(렘 1:6, 10)고 거절하였다. 이제 이러한 제안에 답하여,

첫째,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할 것인가”가 이전의 어떤 때가 아닌 바로 “그 때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있다. 그들은 “즉석에서” 말할 것이며 비록 그것에 대해 잘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말씀하도록 불러내실 때에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그를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극도의 불리한 입장과 실망 가운데서 애쓸 때에라도 그를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여기에서 성령이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간구를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그들은 그들 혼자만이 이러한 경우에 방치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책임을 지신다. 그의 지혜의 성령이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종종 그의 섭리가 그들을 위하여 놀랍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 둘(성령, 섭리)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핍박자들의 양심 속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목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강단에서 그들을 도우셨던 동일한 성령이 법정에서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예언자를 가진 그들은 순조롭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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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된다.

첫째, 이러한 고생은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지속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으로 그 자신을 위로하셨으며, 이것은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간다”(눅 22:37). Dabit Deus his quoque finem─즉 또한 하나님은 이것들을 종결 지우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고난받는 시기에 대한 신앙적인 기대는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데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을 것이다”(욥 3:17). 하나님은 “장래에 소망을 주실”것이다(렘 29:11). 고통은 마치 “고용의 날과 같이”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그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것들이 계속되는 동안 견딜 수 있다. 그것들은 “영원한”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들은 “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고난 자들은 영원한 팔 안에서 그것들을 견디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셋째, 구원은 “끝까지 견딘” 모든 자들이 영원한 보상이 될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길이 진수렁이 될지라도 가정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위하여 바로잡을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신앙적인 유의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고난받는 성도들의 강심제와 음식물이 되어왔다(고후 4:16, 17, 18; 히 10:34). 이것은 “참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격려가 되며 “끝까지 견디는 데” 있어서 약속이 된다. “잠시 동안만” 견디는 자나 “시험 때에 넘어지는” 자는 헛되게 달음질할 자들이며 그들이 획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견디어낸 자는 분명히 상급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주인이 전에 받았던(24, 25절) 취급 이상의 것은 아니다. “제자는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 우리는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의무, 곧 남의 발을 씻는 것도 사양치 말아야 될 이유로서 이것을 그들에게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요 13:16). 여기에서 그것은 왜 그들이 어려운 고난에 넘어지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로 주어져 있다.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 회상하게 된다(요 15:20). “하인이 그 주인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로 하여금 “더욱 나으려는” 기대를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이시며 우리는 그에 대해 배우는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집의 “주인” (oivkodespo,thj)이시며 그의 가족인 교회에서 독재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둘째, 우리의 주인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매우 딱딱한 대우를 받으셨다. 세상은 그를 “바알세불”(파리의 왕, 귀신들 중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고 그가 이 바알세불과 동맹을 맺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욕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그 자신이 이러한 모욕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인내가 더욱 기이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광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는 파리들의 왕으로 낙인이 찍혀졌으며, 이스라엘의 왕은 에그론의 왕으로, 빛과 생명의 임금은 사망과 흑암의 능력을 가진 임금으로 오명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적수요 파괴자인 그리스도는 그의 동맹자로 중상을 당해야만 하지만 아직도 그는 “죄인들의 이러한 반박을 견디시는”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하신 학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똑 같은 것을 당하리라는 기대와 그것에 대해 준비할 것을 고무시켜 주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인내할 것을 당부해 준다. 그리스도를 미워한 자가 그를 인하여 그의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해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또한 머지 않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있게” 될 자가 지금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쓴 잔”으로 시작하셨으니 그를 위해 기꺼히 맹세를 하자. 그가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용이하게 하셨다.

[5]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26절).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 복음의 계시로, “너는 그것을 전파하라(27절). 왜냐하면 그것은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비로서 사람들의 자녀에게 숨겨진 진리들은 모든 나라들에 그들 고유의 언어로서 모두 알려지게 될 것이다”(행 2:11). “땅의 끝은 이 구원을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확실히 행해질 사역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척시키실 경작지이다.

둘째, 바알세불이라고 불리운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의 결백성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들의 참된 성격은 지금 거짓된 색깔로 불공평하게 감추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무죄성과 탁월성이 지금 “감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꽤 많이 행해지기도 하는데 그때는 성도의 의로움이 결과적인 사건에 의해 “빛과 같이 빛나는” 때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이 모든 세상과 또한 천사들과 사람들, 지금 그들을 “조롱거리로 만드는”(고전 4:9)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큰 심판날일 것이다(고전 4:9). 그들의 모든 비난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지금 “감추어진” 그들의 은혜와 봉사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4: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될” 마지막 날에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이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온갖 중상과 비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의 진리를 신실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적합한 시기에 그들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6]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고난에 있어서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29-31절). 특히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행동 또한 가장 적은 것에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의 교리와 우리의 첫 원리들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연의 빛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 특히 신앙으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그는 그들에게 온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들에게 위로를 준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첫째, 모든 피조물들, 특히 “참새”와 같이 작은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섭리의 일반적인 범위(29절)이다. 이러한 작은 동물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므로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참새들은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아니, 여러분은 다섯 마리를 두 앗사리온에 살수 있을 것이다. 눅 12:6). 그러나 그들은 신적인 돌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

2.

그들은 음식을 위해 “땅에” 내려앉아 곡식알을 쪼아먹는 것이 아니라 “너희 천부”께서 그의 섭리에 의해 그들을 위하여 그 곡식을 땅에 놓아두시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2장 6절에 보면 이것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먹이신다”(마 6:26). 참새들을 먹이시는 자는 성도들을 굶주리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그것들은 하나님의 지시 없이는 자연적인 죽음이나 난폭한 죽임에 의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적은 일부분일지라도 그들의 죽음은 신적 섭리에 의해 이른다고 한다면 하물며 그의 제자들의 죽음이랴! 높이 날아다니던 새가 죽을 때는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죽음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땅으로 떨어지게 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데 사용되었던 “두 마리의 참새”(눅 14:4-6)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마리의 새는 “참새”라고 불리운다. 그들 중 하나는 죽임을 당해 “땅에 떨어지고”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도록 내버려진다. 두 마리가 죽임을 당한 것은 우연한 일처럼 보여졌다. 고용된 사람은 그들이 좋아한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을 계획하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참새들도 그들이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면 이러한 보살핌의 눈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너희에게는 더욱 더 보살피는 눈을 가지실 것이다. 만일 참새가 “너희 천부의 허락 없이” 죽지 않는다면 사람, 곧 기독자나 사역자나 친구나 내 어린아이는 정녕코 그의 허락 없이 죽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섭리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서는 새잡이군의 그물에 걸리거나 화살에 맞아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장에 팔리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간교한 새잡이군과 같은 너희의 원수는 너희에게 “덫을 놓고” 몰래 너희를 향해 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너희를 사로잡거나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원수는 “위에서 주어진 것”이 없으면 너희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활과 덫을 깨뜨릴 수 있으시며(시 38:12-5; 64:4, 7), 또한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새와 같이 도망하게”하신다(시 124:7).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31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두려움을 잔잔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 속에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을 위해 지은 바 되었으며 “그 발아래 두어졌기” 때문이다(시 8:6-8).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 마리의 참새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자인 그들이야 오죽 더 하겠느냐.

둘째, 섭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 특히 그들의 고난에 있어서 취하는 특별한 인식(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심지어 가장 적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탐문의 사실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정신(Etenal Mind)의 무한한 영광에 대해 경시하거나 무한한 휴식에 대해 동요함이 없이 그 자체를 모든 사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계속적으로 믿으면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한 표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털을 세신다면 그는 더욱 더 그들의 머리를 세실 것이며 또한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위로, 그들의 영혼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이 염려하는 것보다 더욱 더 그들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돈과 재물, 그리고 가축을 세는 데 열심인 자는, 떨어지고 잃어버릴 그들의 머리털을 세는 데는 결코 유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털을 세시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을 것이다”(눅 21:18). 그 적은 것 하나라도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성도들은 매우 귀중하다. 또한 그들의 삶과 죽음도!

[7]

그는 머지 않아 승리의 날에, 지금 곤고한 때에 그를 인정한 사람들을 인정할 것이며 또한 그때에도 그를 부인한 자들이 그에 의하여 내어버림과 거절함을 받게 될 것이다(32, 33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한 만일 우리가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이후에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행복이 될 것이다.

1.

2.

우리가 그를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로 부르심을 받아 그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를 위한 시중, 그에게서부터의 기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이 입증되고,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받게 된다.이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비난과 고통을 당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인의 부활 시에” 이것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예와 행복이 될 것이다(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즉 “그는 비록 세상의 보잘 것 없는 벌레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를 시인하리라.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했고 나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았던 나의 것 중 하나요.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자 중 하나이다. 내 피로 산 사람이요, 내 영의 제작품이다. 나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그때에 그것은 그를 취하여 최상의 봉사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하여 좋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때에 그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의 판결을 받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타나겠으며 그를 내 아버지 앞에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 그는 이와 같이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의 “아버지 앞에서” 영예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일이다.

둘째,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는 자는 “큰 심판 날에 그에 의하여 거절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은 그를 매우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자들을 그의 종들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7:23). 사람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드릴 수 있던 최고 선의 일이었던 기독교의 초창기에 있어서 이러한 신앙 고백은 후에 이것에 수반되는 세속적인 유익을 가진 것에 비한다면 하나의 진실성에 대한 보다 더 큰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8]

그들의 제자 직분의 기초는 마치 고난들을 그들에게 대해 매우 가볍고 쉽게 하려고 한 것처럼 이러한 기질과 성벽에 두어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추종자로 삼으신 것은 고난을 위해 준비하는 조건에서였다(37-39절). 그는 맨 처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들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거기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측하였던 난관들에 대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그러한 피곤과 고생에 순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고백의 특권과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기독자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들은 이러한 것이 지니는 위엄과 행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러한 가치를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두지 않고 다른 어떠한 관심보다도 앞에 두기 때문이다. 계약의 조건을 지키려하지 않는 자들은 거래에서 유익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계약 조건은 설정되는 것이다. 만일 종교가 “어떤”(any)일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every) 일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진리를 믿는 자는 모두가 곧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자신들의 임무와 행복으로 삼는 자는 그 밖의 모든 것을 그것에 순복 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독자가 아닌 자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거나 잃거나 고난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님을 알면 용기가 솟아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값비싼 진주를 잃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위해 제공한 것은 매우 가치가 있다는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가장 친근하고 소중한 친척들, 곧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앞에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이 친척들 사이에는 시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이 친척들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로 열거되어 있다. 자식은 그들의 부모를 사랑해야 하며, 또한 부모는 그들의 자식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셨던(21, 35, 36절) 우리의 친척들을 증오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아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서도 안 된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신 33:9)고 말한 레위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우리의 안락과 평안에 앞서 그를 높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2.

3.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하며,”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가 하셨던 것처럼 인내해야 하며,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것을 참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큰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실하게 그를 따른다면 그가 당하신 고난을 통해 그의 영광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셋째, 목숨보다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목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목숨을 버리려는 자는 그의 말할 수 없는 이익, 즉 영원한 생명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오는 생명을 위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이다.

[9]

그리스도 자신은 그들의 주장(이유)을 진심으로 지적함으로써 그 자신을 그들의 모든 친구에게 친구로 나타내며 또한 여하한 때에라도 그들에게 주어져야난 했던 모든 친절을 도로 갚으려고 하셨다(40-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첫째, 대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며,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인하여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려고 하는 몇몇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최악의 시기에도 은혜의 선택에 의하여 남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수고를 “헛되게”하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해석

10

제9장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선포하시면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마감되고 있다. 본 장은 양떼의 목자요 추수의 주인 되시는 분으로서의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분의 교회에 영혼을 불러 모으는 위대한 전도 사명을 주어 파견하시고 있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셨다.” 열 둘이란 교회를 구성하게 되는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에 있는 사랑과 신앙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를 표현하는 숫자이다. 이런 천국적 품위와 영적 측면의 원리들은 그분께서 밝히 알게 하신 말씀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열 두 제자란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말씀 속의 선과 진리를 삶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이 발휘된다. 이러한 열 두 제자를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그분의 종들을 자비의 사역에 파견하실 때 주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것들을 행할 권능을 주신 것이다. 이 권능은 그분께서 아버지로부터, 즉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파생된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발휘되었던 힘이다. 사실 제자들에게 수여된 병 고치시는 능력은 주님 안에 존재하는 능력과는 아주 다르다. 제자들의 능력은 그분의 이름으로 발휘되었다. 이 이름은 구세주의 신성한 인성을 표현한다. 이 이름은 유한한 매체밖에 안 되는 곳에 존재한 권능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력하는 결과는 각 개인이 이미 소유해오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 이유가 각 제자는 표현적 수준의 특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제자가 표현하는 특성들은 말씀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요 이 원리가 진정한 주님의 사도이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심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말씀 속의 선과 진리를 매우 친밀하게 예수님과 연결되도록 끌어 당기시어 인간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데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데 새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본문과 위에서 말한 설명은 인간으로 계신 주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합당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육을 입으신 뒤 신성화 하셨을 때 영원한 말씀과 씌어진 말씀 사이에는 더욱 친밀한 관계가 건설되었다. 그래서 신성화 하시기 전에는 발휘된 적이 없던 말씀의 진리의 힘이 신성화 하신 이후에는 인간에게 나누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태어나시어 체류하시는 동안 인간 삶의 모든 상태를 통과해 가셨다. 특히 그분은 인간 차원에서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셨다. 그러나 이 지식은 가상적인 진리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남에서 진리의 수준을 승강시켜 가듯 주님도 영광을 입으시는 쪽으로 진리를 승강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과거 획득해 놓으셨던 진리를 불러 모으시어 승강시켜 가상적 수준의 진리 하나하나가 그 수준을 계속 벗게 하셔서 결국 순수하게 신성한 수준이 될 때까지 계속 해 가셨다. 씌어 있는 말씀 안에 있는 진리가 낮은 수준에서 가장 높은 수준까지 통과해 가게 하셨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그대로 내려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광을 입으신 단계를 통해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져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를 인정하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악령을 제어하고 쫒아내고 온갖 질병과 허약함까지 고쳐질 수 있게 되었다. 말씀 속의 진리를 부르시고 이 진리가 악과 거짓을 제어하도록 능력을 주심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거듭나도록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진리들이 말씀으로부터 획득되어 기억 안에 맨 먼저 저장된다. 그 다음 주님께서는 이 진리들을 하나씩 부르시어 그분께 더 가까워지게 승강시킨다. 이 진리들이 승강된 만큼 이 진리들은 그 사람의 마음과 삶 모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부여 받는다. 몸에 해당되는 교회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고 이것이 제자들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무질서를 교정하고 세상에 질서를 소개하기 위한 교회의 능력 척도는 교회의 원리가 얼마나 순수한가라는 추상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는 멤버들의 심정과 지성 속에서 그 원리가 실지로 얼마나 높이 승강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2-4.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사도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이유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그 이름들의 일반적인 배열에 관해 몇 가지 짚어 보아야 할 게 있다. 이미 거론했던 바와 같이 사도들은 넷씩 세 그룹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 분류는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시리즈로 기록된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되는 점이다. 이를 도표로 살펴보기 위해 아래에 모아 놓았다.

마태 10:2

마가 3:16

누가 6:14

1. 시몬과

1. 시몬과

1. 시몬과

2. 안드레아,

2. 야고보와

2. 안드레아,

3. 야고보와

3. 요한과

3. 야고보와

4. 요한,

4. 안드레아와

4. 요한,

5. 필립보와

5. 필립보와

5. 필립보와

6. 바르톨로매오,

6. 바르톨로매오와

6. 바르톨로매오,

7. 토마와

7. 마태오와

7. 마태오와

8. 마태오,

8. 토마와

8. 토마,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10. 타대오,

10. 타대오와

10. 혁명당원 시몬과

11. 가나안 사람

시몬과

11. 가나안 사람

시몬과

11. 야고보의 형제

유다와

12. 가리옷사람 유다

12. 가리옷사람 유다

12. 가리옷사람 유다

세부적으로 보면 세 기록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세 그룹 측면에서는 일치하고 각 그룹의 첫 이름은 같은 사도들로 시작되고 있다. 말씀 안에서 우연한 게 전혀 없듯 세부적인 차이를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데에도 의미와 의도된 목적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사도들은 말씀과 인간의 마음 내지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를 표현하듯 세 그룹이라는 배열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세 수준 즉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의 질서를 표현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구별과 유사함도 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거론될 때 복음서 기자들에게 일치했던 것은 시몬을 첫째에, 가리옷 유다는 마지막에 배열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도는 한 쌍으로 배열되고도 있다. 마가 6장 7절을 보면 이 순서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사도들을 짝지어 보낸 서술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둘씩 짝 지음”이란 선과 진리는 서로의 짝이어서 모든 선은 그 선에 걸맞은 진리를 가지고 있고 모든 진리는 그에 걸맞는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둘은 비록 유한한 그릇 안에서는 나뉘어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주님으로부터서는 언제나 하나 된 상태에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짝지어 열 두 사도가 거론된 것은 각 쌍이 표현하는 원리의 품질을 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유가 고대 시대 때 이름이 주어진 것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함 보다는 당사자의 특성 내지 어떤 사물의 특이한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연결을 추적하기 위한 공부를 생각해 본다면 각 이름이 주어지는 부분과 그 이름이 지닌 영적 의미를 파악하면 효율적이고 값진 탐구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위에 열거된 사도들의 이름에 관해서는 Noble의 「Intellectual Repository, 1839출판」에서 어느 정도나마 탐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줄 믿는다.

5,6. “예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파견하셨다.” 인간의 영적 발전 내지 거듭남에 관련시켜 열 두 사도를 부르시어 파견하시는 주변 여건은 한 인간의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춘 상태, 또는 말씀 속의 진리들이 충분히 저장되어 있고 이 진리들이 내적 인간의 애착과 적절하게 하나되어 주님과의 결합으로 능력을 부여받아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상응하도록 외적 측면에 내려 올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들에게 내리시는 분부사항은 사도들로 표현된 원리들이 작동하는데 근거가 되는 질서의 법칙이요 이 법칙에 따라 움직여 가면 가장 확실하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라.’” 위 구절의 사항을 글자대로 고집해 생각한다면 이상한 구절이 되고 만다. 주님의 통치는 유대인의 세계에만 국한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교회가 유대인에 한정된 상태에서 벗어나 이방인에게도 그분의 교회에 입장하는 특전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사도들의 노력이 위와 같이 이스라엘에 한정된 것은 오로지 매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뿐인 바 글자적인 생각은 편파적인 차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세상에 나가 온 누리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 구절을 개인이 응용하는 측면 내지 영적 수준의 의미에서 살펴야 하리라 본다. 이런 측면일 경우 사도들, 이방인들, 사마리아인들, 이스라엘인들은 우리가 지닌 어떤 원리, 능력, 자질에 모두 관계되는 말들이다. 이미 살핀바 대로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작동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들, 이 원리들이 천국의 품위로 완전히 전환되어 있는 것, 그리하여 인간 전체에 이 원리가 영향을 주는 것을 뜻한다. 이방인들, 이들이 나쁜 측면 내지 이스라엘에 적이 되어 언급될 경우 그들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소속된 악들을 의미하게 된다. 말씀 속에서 악이 취급될 경우 거짓도 통상 취급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 이들은 과거 아시리아왕이 이스라엘 왕국 열 지파를 포로로 끌어가고 텅 빈 사마리아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인데 이들은 유대교의 썩은 형체를 섬겼는바 그들은 인간 이해성이 쉽게 물들고 마는 왜곡된 모든 감정(sentiment)을 의미한다. 이를 종합해 생각해 보면 사도들을 향한 분부,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란 원래 악에서 근원되는 것인 왜곡된 감정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란 거짓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 어떤 교리도 지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위 사항이 천국의 원리라고 이해되어진다면 왜 이런 금지 사항이 있어야 할까?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표현된 의미가 좋은 측면일 경우 올바른 코스나 모습을 떠나 악하고 거짓된 어떤 것으로 그 자체 스스로는 바뀔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원리들은 무르디 물러 자칫 타락하기 쉬운 창조물 안에 있을 경우 그것들은 쉽게 뒤바뀌어 아예 거꾸로 되고 말 때가 많다. 마치 성경의 많은 진리들이 순수한 기독교의 원리에 불일치되는 죄 내지 실지 사건으로 탈바꿈되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위 명령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방향 설정 즉 하늘의 선물이 더럽혀지거나 남용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선물, 천국의 원리들은 우리의 애착과 생각이 제아무리 변화무쌍하게 움직여도 그 속에서 언제나 거룩한 채로, 원래의 순수함 그대로 오점 하나 없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심정이 쉽사리 좋아하는 악한 어떤 욕망을 천국의 원리도 좋아하는 듯 여겨지게 하거나 우리의 지성이 선뜻 왜곡된 어떤 추론을 지지하는 듯 나타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의 의무는 이방인들의 길로 가면 안 되고 사마리아의 도시에도 들어가면 안 되고 “단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가는” 것이다. 영적인 사도 즉 말씀에서 획득해 우리 속에 들어와 현존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은 우리 영혼의 삐뚠 것을 바로 잡아 주는 바 이 원리들이 선함 쪽에 가담하고 있는 우리 속의 모든 것을 순수하게 하도록 흠모되어져야 한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사람은 진정한 교회의 모든 멤버를 뜻하는데 세부 측면에서 그들은 교회를 구성하는 품위들이 들어 갈 수 있는 마음의 모든 원리나 자질을 뜻한다. 양은 선함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행(charity)이라는 원리를 성경에서 언제나 상징해 주고 있다. 그 이유가 순수한 선행은 영적 수준의 사랑에 대한 애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애착은 인간이 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랑한다. “이스라엘 가문의 모든 양”이란 인간 안에서 교회를 구성해 주는 원리와 근친 관계에 있는 모든 선이나 선행에 대한 애착을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양은 “이스라엘 가문의 길 잃은 양”이다. 이는 순수하지 않은 상태여서 순수한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선행에 대한 애착들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순수한 진리로 인도받거나 순수해짐이 없는 바 이런 선행에 대한 애착은 눈이 먼 자연적 수준의 애착이어서 쉽게 엉뚱한데로 끌리어 가고 극한적으로는 비통할 만한 악 속에 파묻히고 만다. 사실 진리는 선을 지키는 자, 양떼를 지키는 목자와 똑 같은 바 진리의 인도가 없으면 울타리를 벗어나 흩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 빠진 길 잃은 양은 복음의 소식을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 자연적 수준에 있는 애착들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산되는 순수한 선함과 진리를 말씀의 가르침을 매개체로 해서 그분의 생명을 흡입하고 교통을 갖게 됨으로 영적 수준의 애착이 되어 간다.

7. 사도들을 파견하시되 그들에게 말하신 첫 사항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선포하여라”는 것이다. 복음의 이런 첫 전도 내용은 얼마나 복되고 중요한 사항인가! 인간 거듭남의 시작은 이 소식 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지! 더구나 천국적 삶에서 영혼의 모든 발전 과정 역시 이 소식 밑에서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게 하시고 있다. 사도들의 전도란 주님의 말씀 속 진리가 인간 마음에 그려놓는 감명을 뜻한다. 이 감명이란 우리로 뭔가를 하고야 말도록 재촉하는 영향력을 동반한 직관과 지시받음이다. 이 감명은 영원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눈이 떠진 사람, 진짜 행복은 영원히 있을 자신의 모습이라는데 마음의 눈이 보게 되어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고 부름받고 자극받은 사람에 의해 느껴진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감명의 내용은 그 사람의 애착과 바람이 동반되어 말씀으로부터 읽고 듣고 배운 진리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감명 받은 영혼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설비되는 것임을 꾸준히 상기하면서 그의 삶이 계속 되어간다. 그러므로 순수한 전도의 꾸준한 주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란 하느님의 진리가 통치하는 정부, 즉 그분의 지혜가 그분의 사랑과 하나 되어 통치하는 정부, 마치 천국으로부터 인간 마음 안으로 사랑과 지혜가 흘러드는 질서로 이루어진 정부이다. 이 왕국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통치해 오던 천국 자체이고 천사에 의해 이 나라가 받아들여질 때 이 나라는 실지의 천국이 된다.

8. 이 좋은 소식은 선포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말씀을 수단으로 교통되는 천국의 품위 또는 영적인 사도는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하도록 위촉되어 있다. 즉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 그 유익한 행동이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고 마귀는 쫒아 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명령 안에 담겨 있다. 위의 나쁜 것들은 만일 우리가 해결하고자 사도의 도움을 원한다면 사도의 선교로 구원받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위 사항에 대한 것들을 눈치 채든 그렇지 못하든 만민이 도움을 받아야 할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는 우리가 한탄할 수밖에 더 재간이 없는 재난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출생과 유전적 상속으로 병들어 있고, 나병환자이고 죽어있다. 죽어가고 있을 경우 이는 죽음보다 더 나쁜 생명을 호흡하는 상태이다. 그 이유가 우리는 악마에 의해 소유당한 상태로 악마의 활동 무대를 제공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재난들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 또는 출생할 때 존재한 그대로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과 꼭 같은 상태를 총괄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 본문의 “앓는 사람”을 직역해 보면 약함, 우유부단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그 수준의 마음 안에서 지배하는 썩은 것 때문에 선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약하고 무르디 무른 상태여서 악에 저항하는 힘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인간 본성이 지닌 자연적 수준의 경향성 내지 인간적 신중함만이 자신을 끌고 가도록 스스로 허용한다면 악마가 단 한번 공격해도 백기를 들게 된다. 결국 자신이 좋아해서 악마에 노예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 고유의 것들은 나병이라 불리는 자연적 수준의 상태 안에 존재한다. 그 이유는 타락된 썩은 것들 때문에 그는 진리를 뒤집고 모독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8장 2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나병이라는 참혹한 질병은 신성 모독을 표현하는 질병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을 두고 성경은 죽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모든 영적 수준의 생명이 결핍되어 있어 감각이나 그 본성 자체로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뿐 하느님과 천국에 관한 자연적 수준의 상태 자체 만을 들여다 보면 그것의 진짜 품질은 단지 악이고 거짓된 감정들 뿐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인간이 사랑하는 것이 그 인간의 생명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 그 사람을 통치하게 되는 사랑(ruling love)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곳으로부터 오고 있다. 만일 그의 사랑 또는 생명이 단지 자연적 수준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래서 악해 있다면 그의 생명은 어둠의 나라와 연결을 이루고 있는 바 그는 지옥의 영향력을 전달하는 악마의 군사일 뿐이다. 사실 악마라는 단어는 악한 욕망으로부터 튀어 나오는 왜곡된 추론을 생명으로 삼는 악한 영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상 설명한 것들은 심정을 아시는 분에 의해 보여진 인간 본성을 어느 정도나마 살핀 것이다. 그분이 보신 인간 속에 든 것, 지옥에 쉽게 사기당하는 연약함, 그 결과 지독하게도 사악해 있는 인간 본성을 우리는 얼마라도 느껴 보아야 하리라. 구원 받아야 할 우리의 악 조건에 대한 모습은 주님만이 초상화 하실 수 있는 바 그분 만이 올바르게 고쳐 주실 수 있다. 우리가 자아 속에 있는 고질 병을 고치겠다고 애쓰고 있으면 주님께서는 특사를 파견해 주시어 건전한 상태, 진정 즐거운 상태로 회복시켜 주신다. 그분께서는 이미 그분의 말씀을 주셨고 그 안에는 각종 병에서 구원되는 길이 열린 채 놓여 있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말씀 속에 있는 하느님의 진리들을 받는 자질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다. 말씀이 인도해 가는 대로 우리가 따라갈 때 그분 자신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이 그 말씀에 동반된다. 이것이 그분께서 부패된 속성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파견하는 살아 있는 적극적인 사도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으로 회복되어 간다. 그분께서는 위와 같은 사도들에 “앓는 이는 낫게 하고 나병은 깨끗하게, 죽은 사람은 살아나게, 악마를 내쫓는” 힘을 부여 하신다. 이런 사도, 즉 말씀 속의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에 저항하는 힘과 진리를 모독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받는 힘을 얹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 자아가 자연적 수준에 있는 썩은 상태라는 죽은 것들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일어난 우리는 이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착각하게 한 지옥 세계의 영향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다.

9.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더 분부하시기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라.” 이 구절의 의미는 한마디로 자신의 것과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을 섞지 말라는 말이다. 금, 은, 동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사랑과 선함의 세 종류 내지 세 수준을 말한다. 금은 가장 높은 수준인 순수한 사랑 또는 선함을 표현하는 바 주님을 사랑함이다. 은은 순수한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바 그 자체는 이웃을 사랑함이다. 동(구리)은 자연적 선을 표현하는 바 이는 순종으로 생산되는 선이다. 위 세 수준을 달리 간단하게 말한다면, 선행, 믿음, 선한 일이다. 이 세 가지를 지갑(전대)에 넣는다는 것은 위 세 가지의 근원이 되시고 또 그것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근원되었고 자기 고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의미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갑(purse)은 우리의 자질 중 하나인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 은, 동을 지갑에 넣고 있다”란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 선행, 믿음, 선한 일에 관한 원리를 자신을 소생시켜 생명 있게 하는 원리로서 인정하지 않아 기억속에 만 담고 있는 상태도 뜻한다.

10. 더 분부하신다. “여행을 위해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이 자루(scrip)는 식량을 담는 자루이다. 사도들에게 돈 뿐만 아니라 양식, 여벌 옷을 지니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양식은 영혼을 지탱시켜 주는 선을, 옷은 영혼을 보호하는 진리를, 지팡이는 영혼이 기대어 편하게 해주는 최말단의 힘을 상징하는 표현물들이다. 이 구절에서 지니지 않아야 할 세 가지 것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양식, 옷, 지팡이(신발)는 의지, 이해성, 바깥쪽 삶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 금지 사항은 우리의 안쪽 삶이든 바깥쪽 삶이든 그 삶들을 보살피는 것들은 어느 것도 자아로부터 파생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주님으로부터서만 공급된다는 것, 따라서 그분이 내리시는 선물과 품위들을 자아의 것과 섞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글자대로의 해석을 시도한다면 복음의 전도자인 그 당시의 사도들에게 크게 부각될만한 명령이 못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살핀바와 같은 영적 측면의 의미에서는 위 간단한 명령이 모든 기독교인에게 정녕 필요한 것, 더 이상의 어떤 금지 사항도 이 명령에 버금가지 못할 정도의 교훈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에 더하여 가르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영적이고 천국에 속한 것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선을 획득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공급하시는 유일한 통로는 유용함(use)이다. 그래서 주님 스스로 이렇게 증거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11. 이렇게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사도들에게 이런 규칙이 첨가되고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말씀에서 언급되는 도시란 교리를 뜻한다. 그 이유가 교리는 가장 확실한 진리들, 또는 마감을 지어 결말로 간주된 일반적인 원리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원리 안에 있는 구분되는 각각의 모든 기능들은 마치 우리가 집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튼튼한 성벽으로 된 도시 안에 있는 각 집들이 안전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도시와 마을이 동시에 언급될 경우 도시는 원리 중에서 내면에 속한 것 또는 서열상 제일에 속하는 원리를 말하고 마을은 상대적으로 외면에 속하고 서열상 제일가는 원리를 뒤따르는 원리들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는 지성 자체 또는 지적인 기능을 상징하는데 이 안에는 살아 움직이는 주민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애착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사도들이 가야 하는 곳이 이런 도시요 마땅한 것, 가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성 자체에 국한해서 이해해 본다면 우리의 원리들은 교리와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그 원리에 걸맞고 가치 있는 형체를 체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더 세밀히 분석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거룩한 진리와 선함들을 우리의 안쪽 인간으로부터 바깥쪽 인간으로 가져다 놓으려 할 때 이 거룩한 진리와 선이 과연 거룩함에 합당할만한 가치 있는 애착과 생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거룩한 것들에 천국적 품성이라는 거처를 제공하고 있는지, 거룩한 품성이 핵심이 되어 바깥쪽 삶으로 그 영향력을 뻗어 갈 수 있도록 준비되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을 검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셀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담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 중 누가 “마땅한 사람,” 어느 원리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을 위한 증거들을 담아 놓으시고 있다. 땅에도 좋은 땅, 나쁜 땅이 있듯 심정 안에도 좋은 바탕이 최소한도의 얼마간은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런 선한 바탕은 인간 스스로 출생 때부터 소지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국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게 되어 있는 게 섭리이다. 이런 자질은 유아기와 어린 시기가 순진 속에 있는 동안 그 영혼 위에 신성의 역사로 형성되어지고 형성됨과 동시에 하느님의 영에 의해 보존되도록 섭리된다. 이렇게 해서 내면이든 외면이든 인간 마음 속의 원리나 자질 안에는 주님에 속하는 어떤 것이 존재해 있다. 인간 마음의 모든 부분은 본래의 창조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하지만 그 마음들이 변질되고 잘못 사용되어 왔다. 사실 마음의 각 부분은 모두 제각기에 합당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타당한 용도 안에 주님은 현존하실 수 있고 그분의 사도들이 영접 되어진다. 인간 마음 안의 “마땅한” 자질, 가치 있는 자질은 본시 창조 때 수여된 기능에 맞게 사용되어야 할 뿐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육체이든 영체이든 각 부분은 그것에 합당한 용도를 가지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엄밀히 보면 어떤 악이라도 인간 자체가 범했다기 보다는 그 사람에게 위탁된 권능의 발휘가 보다 고상한 목적에 충당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본래 선하도록 되어있고 거기에 알맞는 용도가 부가된 어떤 것이 뒤집혀 있다 해도 본래의 용도가 인간에 의해 합당하게 여겨지면 곧바로 마음 속 자질들은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된다. 이렇게 질서 잡힌 우리의 자질들이 사도라는 천국에 속한 원리의 거처이다. 그러면 원리와 자질은 서로 힘을 모아 그 인간의 영원한 복지를 위해 정진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우리의 자질 속에 머무른다. 사도들이 머물게 되는 이런 거처는 선한 상태, 그리고 이 거처 안에서 선을 확증하는 상태와 언제나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무른다의 의미란 천국적인 원리들은 그 원리가 머물게 된 그 사람의 자질들이 선한 상태로 완전히 고정되어서 그 상태가 선한 행위로 이어질 때까지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선은 마음의 어떤 자질 안에 틀어 박혀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인간 삶이라는 바깥쪽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통과해가게 되어 있고 통과하는 어느 곳에서나 신성한 스승의 뜻을 행해야 한다.

12. 그분의 명령이 이렇게 이어진다.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인사하여라.” 도시가 마음의 지적 부분과 상응 관계를 지니듯 집은 마음의 의지 부분과 상응 관계에 있다. 인사(salute)란 선함과 진리에 관한 거룩한 원리들이 의지 속 애착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탐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의 경우 “평화가 이 집에 있기를 빕니다!”라고 인사말을 하도록 분부되고 있다. 복음서의 이런 인사는 이 얼마나 천국적이고 복된 인사인가! 정녕 그렇다. 평화는 복음의 목표요 소원에 해당된다. 평화는 복음이 널리 퍼져야 하는 이유이요 복음의 영에 해당된다. 마치 천국의 원리가 인간 마음 안으로 흘러들 듯 천국의 원리는 그 자체와 더불어 평화라는 천국의 기운까지 가져다 준다. 주님의 교리들은 빗방울 같이 떨어지고 그분의 언어는 아침 이슬같이, 작은 빗방울이 연약한 목초 위에 떨어질 때 같이 스며든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평화롭고 온화하고 온유하다. 이 지혜는 평화라는 메시지만을 가져다 주고 마는 게 아니라 평화라는 답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고 있다. “그 집이 가치가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다.” 누가복음(10:6)의 경우, “그 집에 평화의 아들(후손)이 살고 있다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받아질 천국적 평화는 받게 될 마음이라는 그릇 속에 이미 평화라는 씨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게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존재해야 할 요소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자주 지적해 온 사항이 있다. 주님께서 거듭남의 근원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오셨을 때 그분은 이미 시작되어 왔던 일을 완성하시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오신 것은 창조 때의 것들, 즉 천국 생명의 싹을 생산하시어 심정과 이해성 안에 존재하게 하신 것들, 즉 잠복되어 있는 애착과 직감들을 불러 내시기 위해서였다. 잠복된 애착과 직감 없이는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고, 동정하는 느낌도 있을 수 없고 상호적인 생각도 없고 천국 인사에 답하는 소리도 있을 수 없다. 천국의 특사가 머물기 위해 들어가기 전 그 집에는 이미 평화의 아들이 살고 있어 그 집이 평화를 누릴만 해야 한다. 평화의 아들이란 어린 시절에 저장된 순진, 그리고 평화의 후예인 직감(perception) 외 더 무엇이 있을까? 천국이라는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거듭남이란 무지한 순진과 평화가 지혜로운 순진과 평화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첫 단계에 있던 거듭남은 둘째 단계의 거듭남이 호소할 때 화답한다. 각자가 홀로서기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13. “그 집이 값어치가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될 것이고…” 평화의 씨가 있어 값어치 있는 집에 와지는 사도의 평화란 의지에 있는 영적 수준의 평화가 상호교류해서 자연적 수준의 평화까지 있게 됨을 묘사하여 뜻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실지의 거듭나는 행동이 있기 전 마음 속에 있는 선한 품질은 그 자체 비록 영적이긴 하지만 자연적으로도 납득되고 사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마음 속 선한 품질 자체가 하늘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하늘 나라를 획득하게 하는 자질이 되어 천국 원리가 접목될 수 있는 가지를 제공할 뿐이다. “…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극도로 중대한 원리, 가장 위대한 순간에 있어지는 한 가지 교훈이 매우 짧은 위 명령 안에 포함되어 있다. 만일 영적 원리와 자연적 원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자연적 원리가 영적 원리의 입장을 허락치 않는다면 두 원리들은 약화되어 가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 이유는 이것이 유입(influx)의 법칙이기 때문, 즉 생명이 형체 안에 흘러 들되 이 형체 때문에 생명의 흐름도 제한받고 때로는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선함과 진리는 내면으로부터 흐르되 외면인 정직이나 예의 바름 같은 삶의 형식에서만 거처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천국적 원리가 자연적 수준에서 들어 앉을 합당한 자리를 발견할 수 없으면 발견될 때까지 되돌아 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가 이 구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는 평화가 각 사람의 깊은 곳으로 영원히 되돌아 가고 만다는 게 아니라 되돌아 가되 가치 있는 집이 발견될 때까지라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14. 더 일반적이면서도 더 심각한 경우, 즉 더 심한 거절과 이 거절에 대한 단호한 항변에 관해 언급되고 있다.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 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이미 언급된 무가치한 사람의 경우에서는 사도가 그들 집에 들어가되 거절될 경우는 말하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이 그들 집에 부적합한 경우만 말했을 뿐이다. 이제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더구나 사도들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고 있다. 어떤 도시나 어떤 집이 사도가 묵어도 될 마땅한 장소인가를 조사하라는 앞의 명령이란 세상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외적 부분에 들어가 있는 교리적 감정과 도덕적 원리들을 자세히 검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 영적 차원이 자연적 차원으로 들어가기 전, 더 높은 총명의 지시나 영향력을 잘 받을 수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의도된 명령이다. 본 구절의 경우는 집주인 내지 시민들이 거절하는 경우인 바 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정도 뿐만 아니라 외적 인간 측면에 있는 도덕적 수준이 반대한다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외적 인간 또는 자연적 수준의 우리 마음 전체가 이런 적개심으로 차 있다는 것은 아니고 도시나 집의 일부가 적개심을 품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볼 때 가치가 매우 저하되어 있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마땅한” 거처인지 사도가 조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가 천국에서는 비록 악인이 심각한 범죄를 도모하려는 순간에서도 그 악인의 양심을 통해 말할 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한 상황은 본문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의 사도는 구원해 주는 자비를 실천하는 것, 또는 영적 진보라는 여행을 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런 여행 도중 사도들이 복을 빌어 주려던 사람들 사이에도 가치 없는 사람, 또는 적개심을 품은 사람이 섞여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속의 모든 것이 세상으로부터서만 흡수된 게 아니라 종교의 선과 진리에 직접 반대되는 지적 교리나 도덕적 원리들을 많든 적든 자신의 것이 되도록 채용했다는 말이다. 가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도들의 의무가 본 절에서 더 추가되고 있다. 평화를 빌었으나 받을 자격이 없어 그 평화가 사도에게 되돌아 온다는 단순한 이치 외에 더 추가되는 것은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라”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에서는 “…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명령되고 있다.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이는 심판과 보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는 선하고 참된 것을 방어해 주고 보존하라는 명령에 해당된다. 따라서 발에서 먼지를 턴다는 것은 먼지가 발에 들러 붙는 것을 예방하여 먼지로 인해 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먼지(dust)란 땅에 속한 것에서도 가장 하급에 해당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 이래 먼지는 뱀의 양식이 되어 왔다. 즉 감각적 측면의 인간 또는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인 원리들은 지상적 목표나 만족 그 이상을 가지고 있지를 않다. 주님께서 “발에서 먼지를 털라”는 명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의도하신 교훈이란 이러하다. 우리의 의지나 이해성 속에서 영적 원리에 직접 대치되는 감각적으로만 쏠리게 하려는 경향성 내지 감정들이 발견될 경우 이것들이 영적 원리에 고착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 반드시 즉각 털어 내서 모든 영적 원리와의 연결을 끊을 것, 그것들이 우리의 삶이라는 실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함을 뜻한다. 사실 이런 사항은 세상과 육으로부터 해방되어 보존되어야 하는 새 사람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15. 사도들을 거절하는 도시에 관해 더 말씀하시고 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과거부터 물려 받은 전통이나 습관이라는 침침한 빛 속에서 죄를 진 사람들과 달리 보다 명백하게 알도록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죄를 질 경우 후자는 전자보다 더 큰 정죄를 자초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위 구절에는 위 간단한 의미보다 더 내면에 속하는 의미까지 담겨 있다. 도시 주민 일부가 사도의 출입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도들이 전하는 새 교리를 즉각 인정 않했다는 이유만으로 도시 전체가 정죄될 리 만무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채 악한 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을 뜻한다. 한편 사도를 영접 않는 도시나 집들이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진리에 의거 삶을 꾸리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위 구절을 세부 측면에 적용해 보면 이런 의미도 살필 수 있다. 위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서 거행되는 심판과 관계되고 있다. 이런 심판 날이란 각자의 마음 안에서 선과 악이 분리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 악은 정죄되고 거절되면서 선은 환영받고 확증되는 따로 따로의 두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런 심판 속에서 더 지독한 악들은 더 심각한 정죄의 대상 임에 틀림없다. 거듭나는 삶의 과정 중에서 무지로부터 불거져 나온 죄로 생각되는 지상의 삶에 속하는 것들은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많이 진보되어 우리의 마음이 상당히 계발된 상태에서 범해지는 죄보다는 덜 비극적 수준이라 가늠해 볼 수 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인들, 이들이 육체의 껍질을 벗고 맞게 되는 심판에서의 마지막 정죄됨을 피하려면 숨이 붙어 있는 현재에서 자신이 계속 심판 받아가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악들이 들추어 내지는 즉시 신성한 진리의 심판을 받게 해서 정죄되도록 해나가야 하리라.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양은 영적 수준의 마음 안에 있는 선행(charity)이라는 원리를 의미하고 이리떼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 있는 악한 욕망들을 말한다. 사도들이 평화의 특사로 보내져서 경험하게 되는 세상의 핍박에 관한 모든 역사는 영적 마음을 기만하려드는 자연적 마음 안에 존재하는 반목질시하는 타입을 놀랄 정도로 확실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런 자연적 마음으로 하여금 영적 마음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거듭남의 노동에 해당된다. 이 노동의 필요성, 이 노동을 효과 있게 하는 방법, 그리고 노동에 수반되고 있는 환난과 시련들, 이런 것들이 사도들의 체험에서도 상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거듭남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 있고 또한 교훈적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내적 인간 안에 이식해 두신 영적 원리들이 그 자체의 형상을 외적 인간 안에 만들기 위해 내려갈 경우 이는 마치 “이리떼 가운데 보내지는 양”과 같다. 선과 정 반대요 적에 해당되는 악에 속한 것들도 선과의 실제 접촉이 있기 전 까지는 그 악의 속성이 완전히 들춰져 나열되지 않는다. 따라서 악이 모두 정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악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선이 만나는 경우가 허다한 바 우리에게 너무나 귀감을 주는 말씀으로 이렇게 권고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하리라.” 지혜 자체요 선함 자체 되시고 그분 안에서 선과 지혜가 완전히 하나를 이루시는 그분께서 주시는 위와 같은 충고는 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자신 속의 악과 싸우든 세상의 악과 싸우는 기독교 인이든 모든 기독인은 만사에서 위 두 가지 품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슬기와 단순함(simplicity)이 하나 되는 것은 우리가 위쪽을 향한 삶의 과정에서 우리를 맹습하는 악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대승을 거두게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뱀의 지혜”를 특별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 지혜는 세속의 자녀들이 폭 넓게 소유하고 있는 바 빛의 자녀들 보다 이세상의 삶을 더 잘 꾸리게 해준다. 말씀에서 뱀은 인간 본성으로부터 오는 원리 또는 감각 측면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다시 말해 뱀은 가장 외적인 것 즉 이세상과 교통하게 하는 수단에 해당되는 것들을 통털어 뜻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뱀은 인간 속성 중 용의주도함(circumspection)을 상징하고 인간 본성 중 감각적 원리가 이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감각적 원리가 마음 측면에 해당되듯 몸에서는 감각기관이 이와 대응된다. 감각 기관들이 육체에 해로운 것을 탐지해서 접근을 미리 예방하듯 마음에 있는 감각적 원리들은 “생명의 나무에 이르게 하는 길목”에서 우리 영혼에게 악의 접근을 경고하고 동시에 선함 쪽으로 인도해 간다. 인간을 타락 쪽으로 팔아 넘긴 게 뱀으로 뜻해진 감각적 원리이다. 더불어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장치되어 있는 것도 감각적 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께서 말해 두셨다.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서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는 인간 본성 속의 감각적 원리를 입으시고 그것을 거룩되게 만드시는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최하급인 감각적인 원리까지 거듭나게 해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거룩해진 주님의 감각적 원리의 특성인 용의 주도함이라는 것까지 인류 위에 펼쳐지게 해주시어 교묘함이나 원한 같은 마음 속의 악들로부터 보호되게 하신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인간 속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을 모방하고 그 형상을 닮아야 함을 권고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17. 더 나아가 이런 지혜가 실시 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보여 주신다.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동물과 확실히 구별되게 하는 인간의 자질은 이성(reason)이다. 자연적 수준의 인간일 경우 이는 자연적 수준의 이성(추론력)을 지니고 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권고 하신 이유는 기독교의 제자들이 마주쳐야만 하는 가장 큰 위험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 속의 자연적 이성이 종교와 말씀 속의 진리에 맞서도록 부추키고 있음을 위 구절에서 가르치시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했듯이 자연적 마음의 미묘한 추론은 말씀과 진리 자체되신 그분까지도 그분이 말하시는 대목 자체로부터 덫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하려고 순진한 방책으로 슬며시 접근한다. 이러한 감각적이고 교묘한 추론을 두고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찍어 말하셨다. 제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사람”의 추론하는 특성이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 “너희를 법정에 넘겨 준다”에 담겨 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의 합리적 추론은 영적 인간이 지닌 진리를 효과 없게 만든다는 것, 미리 짜 놓은 정죄 쪽으로 공정과 심판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마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듯 보이면서도 부정한 재판에 따른 보상은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 당하는 것이다.” 이는 선하고 참된 것이 어떤 종교라는 이름 아래, 또는 미신의 영향 아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자연적 인간 내지 자연적 마음도 나름대로 영적인 것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나 체험으로부터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종교가 보편적이고 필수에 속하는 종교와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은 과히 드물지 않다. “사람”들은 먼 거리도 아닌 매우 가까운 자기들 회당 안에서 제자들을 채찍질 한다. 사탄의 회당을 의미하는 종교나 교회의 왜곡된 모든 교리는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에 맞서는데 이것이 “제자를 매질 함”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이 매를 맞는 모습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회당에서도 발생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종교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 원리의 뿌리는 자아 사랑이요 이런 사랑이 확증을 못 가질 때 조차에서도 자아 총명은 이 원리를 떠 받혀 준다. 이런 각 개인의 회당이란 각자의 종교가 발견하는 왜곡된 양심, 가짜 양심이다. 이 양심 속에서 각자의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성소와 예배를 발견한다. 이런 속에 진리가 출현하면 매질 당하고 만다.

18. 앞 구절의 경우는 종교적 측면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세상적 측면에서 말하신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 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일 경우 “총독과 왕”은 선함과 진리를 규율하는 원리를 뜻해 주지만 위 구절에서는 반대적인 상황이므로 선함과 진리에 반대하는 악과 거짓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반대함이란 세상 사랑에 근원을 두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의 인간 측면에 근원을 두는 기독교의 원리에 뭔가를 제공하려는 것, 또는 심정과 지성 안에 있는 주님의 나라에 근거한 기독 원리에 뭔가를 제공하려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란 교회 내에 있는 것과 교회 밖에 있는 것들을 말하는 바 우리 속에 있는 원리 중 교회로부터 획득된 것과 자연계에서 획득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그들과 이방인에게 예수에 관해 증언한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와 교통을 이루고 이 진리가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내적 측면의 것들이 외적 측면의 것에 영향력을 행사해 선용으로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주님 자신도 이런 과정을 통과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럼으로 해서 그분 스스로 진리의 증언자가 되셨다. 그분의 증거란 진리 측면에서의 증거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증언된 진리란 무엇일까? 악을 폭로시켜 정죄하면서 그 악이 차지했던 마음 영역에 그것 대신 선을 이식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진리를 말한다. 예수를 증거함이란 구원받는 그 자체를 납득하게 해 주는 위대한 진리, 즉 말씀이 주님을 인간 안에 탄생하게 했다는데 대한 증거이다.

19,20. “그러나 잡혀 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해야 할 말을 그때에 일러 주리라.” 일반인에게 주어지지 않는 신성한 영향력이 사도들에게 있어질 것임을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본문의 약속은 보다 더 특이한 경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계발됨이라기 보다는 영감 받음에 관계되고 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서 표현된 의미 그 이상의 영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the Spirit)이시다.” 사도들이 총독과 왕 앞에서 주님을 증거할 때 절대적인 영감을 받게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놀랄 일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 세상의 미래 세대가 사용하기 위한 복음서의 거룩한 진리를 기록할 때에도 그러했는 바 이 역시 마찬가지로 놀랄만한 사항이다. 거룩한 저술들은 인도함만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부터 직접 씌였다는 사실도 무조건 인정하는 방법 외에 더 다른 생각은 해볼 수 없다. 위 구절의 영적 의미를 간략히 생각해 보자. 신성한 원리가 인간적인 견해 또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 놓여지는 것은 마치 “사도들이 총독이나 왕 앞에 나가는” 모습과 같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인간 안에 놓았던 원리들, 즉 신성한 원리들은 순수하게 영적이요 천국에 속한 것들임을 우리의 마음이 이해하도록 진열되되 특히 “총독과 왕”에 해당되는 자연적 마음 속의 애착과 생각들이 신성한 권위를 느끼게 함으로 자연적 마음 전체가 영적 마음의 통치를 받게 함을 뜻한다. “어떤 말을 할까?”하고 생각하지 말고 그로인해 걱정도 하지 말라는 주님의 훈계에는 인간 고유 의지, 자기 지혜로움이 없는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진리를 증거하게 될 때 자기 뜻이나 지혜가 들어가 있는 한 정작 예상한 결과나 진리의 설득력은 힘을 잃고 만다. “아버지의 영”이란 사랑으로부터 있어지는 진리이다. 이 영은 그것을 받고저 하는 모든 사람의 심정과 지성 안으로 꾸준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영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손상 받지 않으면서 순수해져 거룩해지게 된다. 최소한 이런 사항들이 우리의 내향적 바람이 되어 있어야 하리라. 내적 인간 속에 있는 새 생명의 순수함이나 그 영성이 모든 것을 질서대로 놓기 위해 자연적 마음으로 내려오게 되면 필시 외적 인간의 반대에 부딛치는데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더 말하신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자기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이 구절에는 세 종류의 대립이 있다. 형제가 형제에 대립함은 거짓이 진리에 맞서는 것이고, 아버지가 아들과 대립함은 악이 진리에 맞서는 것이고, 아들이 아버지와 맞섬은 거짓이 선에 맞서는 것을 뜻한다. 이런 대립에 따른 불화가 끝까지 가면 선하고 참된 것을 소멸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위 구절은 묘사해 놓고 있다. 어쨋든 거듭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선하고 참된 것이 완전히 소멸된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극도의 싸움 속에서 죽음은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수단, 진정한 부활을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향해 품는 분개함은 지독한 것이어서 사도들 스스로도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천국적인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원리에 자연적 수준의 마음은 온통 모순되고 있다는 것, 마음 속에서 이기심 때문에 주님의 것에 반대하는 싸움이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어쨋든 끝까지 참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되고 있다. 종합해서 뜻하는 바 이는 시험 가운데서 악에 굴복하지 않는 영적 원리들은 결국에 가서는 내향적으로나 외향적으로나 확증되어질 것임을 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원된다. 그 이유가 우리 속의 부패된 이기심이 주님께서 이미 이식해 두신 사랑과 믿음에 관한 구원하시는 원리들이 다해야 할 의무라는 길에서 이탈하도록 유혹하여 시험하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협동으로 꾸준히 보존되고 성장하는 방법 외에 더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주님의 것이 우리 속에서 보존되기 위해서 우리는 양순함을 지니면서도 지혜로워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비둘기로 우리의 심정이 자극받는 반면 뱀에 의해 가야 할 방향을 결정지어야 하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크라우스(Clowes) 목사는 위 구절에 대해 이렇게 해설해 주고 있다. “신앙 측면의 교리에서 맞서게 될 경우 선행(charity) 측면의 교리에로 피하고 선행(charity) 측면의 교리에서 대립된다면 신앙 측면의 교리에로 피해야 한다는 것, 바꿔 말해서 진리 측면에서 대적되면 선함 측면으로, 선함 측면의 대립이 있게 되면 진리 측면에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교차는 신성한 섭리에 속한 사항이다. 아마 거듭나는 과정에서 각각의 원리가 완전해지도록 의도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이유가 이렇게 됨이 없이는 다른 측면의 원리로부터 분리된 한쪽 원리 안에 안주하도록 유도당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이쪽을 흠모하기 위해 저쪽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되어야 거듭남 속에서 선과 진리, 신앙과 선행은 명료하게 완전해지고 분명하게 결합된다.” 주님께서 위 구절에 더 이으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글자대로라면 이는 사도들이 모든 동네에서 박해 당하기 전에 주님께서 사도들의 보복자로서 예루살렘을 멸하러 오신다는 뜻으로 이해될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내적 의미 측면에서 볼 때 위 구절은 유대 교회 시대 또는 박해의 시대가 속히 끝나되 이는 복수 차원이 아닌 사랑의 차원에서 짧아 지도록 섭리해 주실 것임을 뜻한다. 그 이유는 이런 시대가 짧아지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구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이든 어떤 종교 시대이든 그것들의 끝장은 자동적으로 오도록 허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만일 저절로 끝이 도래 된다면 구원의 어떤 가능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것을 형성해 줄 어떤 수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라 해도 반드시 옛 것을 그루터기로 삼아서 일어난다. 새 교회가 시작되기 위해 그분께서 나머지(remnant)를 아껴두시려면 만료되는 교회들의 종말로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원리가 소멸되지 않아야 새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바 소멸 이전에 미리 아껴놓기 위해 심판 기일이 당겨져야 한다. 이런 내용이 “사도들이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구절에 담겨 있다. 각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동네”란 교회 속에 있는 교리들이 종말을 고하는 것과 완전해짐을 의미하게 되고 완전해지는 수준은 사람의 아들이 오심, 또는 신성한 진리가 우리에게서 명백해지는 정도에 비례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24,25.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이는 사도들이 기쁨과 평화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대접은 과거 그들의 스승이요 주인되신 분이 받는 대접보다 더 낫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위 구절을 통해 알려주는 진리는 그분의 직계되는 제자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응용된다. 위 구절을 넓은 의미에서 찾아 본다면 자신을 주님과 동등하게 만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가 소유하게 된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소유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런고로 제자가 지닌 것은 그분이 지니셨던 것인 바 제자가 스승만 하고 종이 주인만 하면 그것으로 넉넉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주님이 제자 안에 계신 결과 제자들이 참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주님의 인도를 받는 각 개인 속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인간 속에 있는 두 인간, 즉 외적 또는 자연적 인간은 제자 내지 종과 같고, 내적 또는 영적 인간은 스승 내지 주인과 같다.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에게 순종하는 결과가 있게 되면 이는 주인의 지시대로 종이 일을 해낸 것인바, 실질 면에서 주인과 종은 서로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일의 결과 측면에서 볼 때 주인이 한 것이나 종이 해준 것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주인과 종은 하나로서 행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특별한 측면은 보편적인 측면과도 일치한다. 즉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이 하나 되어 행동하면 주님 스스로 행동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가 영적 인간은 그 스스로 행동할 수 없고 오로지 주님으로부터서만 행동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 또는 영적 마음이 천국으로 열려 있는 만큼에서 그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행동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행동한다. 제자와 스승, 종과 주인을 선과 진리 또는 의지와 이해성에 관계시켜 보면 의지와 이해성 속에 있는 내면의 것들은 자연적 마음에 있는 자아와 세상 만을 사랑함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에 비례해서 외면의 것들도 고통 당해야 한다는 것까지 우리로 알게 해 준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집 주인”이란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를 말한다. “집 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란 근본되는 원리들을 뒤집으려 발버둥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부른다란 최고로 높은 수준에서 선을 악이라고, 빛이 어둠이라고 억지 부리는 것을 말한다. 선과 진리라는 제일가는 원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은 그 다음 서열에 속하는 원리라면 더욱 쉽게 왜곡할 것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제자들이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요 자신 스스로에 확신을 두고 두려워 말라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 신뢰를 둠으로 두려워 말라고 권고하시는 구절이다. 기독인들은 과거 이스라엘 족들 같이 그들의 적이 얼마나 강하든 숫자가 얼마나 많든 두려워 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가 정작 싸워 승리해서 구원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두려워 한다란 제자들에게 신앙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두려워 함 따위는 생각 속에도 없어야 한다 라고 말하신 이유는 “감추인 것은 드러날 수밖에 없고 비밀은 밝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인간에 관련해 볼 때 보편적 진리에 해당된다. 즉 모든 심정들 속에 담긴 비밀들은 영원한 세계에서는 밝히 들어나고 모든 겉치레 역시 훌랑 벗겨지며 가장 캄캄하고 가장 깊숙히 틀어 박힌 생각이나 의도까지도 대낮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상응적으로 볼 때 감추어지고 덮여 놓인 모든 것은 우리 마음 안에서도 빛으로 가져와 진다. 거듭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감각이나 거짓들로 인한 오류로 감추어 둘 수 없다. 그 대신 모든 것은 진리의 빛의 영향 아래 놓여져 그것의 진정한 값이 매겨지게 된다. 내면의 마음 깊은 곳에 아껴두신 선함과 진리들은 바깥쪽 마음에서 활동하는 천국 원리들을 응원하기 위해 드러나 명백해진다.

27. 악과 거짓이 드러나지만 선하고 참된 것도 드러나는 바 그 결과가 이렇게 말해진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두운데서 말하신 것들이란 그분께서 우리의 이해성에 내면적으로 밝히 알게 하신 진리이고 그분께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씀이란 우리의 의지 안에서 내면적으로 받게 되는 선을 뜻한다. 내면적으로 주어진 것들은 희미하게 보이는 수준이요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합리적 자질 속에 있는 의지와 이해성 안으로 오게 되면 뚜렷해지고 분명해지게 된다. 이런 의미는 위 구절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우와 다른 의도에서 말하신 누가복음 12장 3절을 참조하면 확실해진다. 골방(closets)은 마음의 내면 측면을 뜻하고 지붕은 내면의 것들이 명백해지는 곳인 외면을 뜻한다. 빛의 경우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빛은 지혜 자체 안에 존재하지 않고 이해성의 생각, 이로부터 언어 속에 존재한다.” 이는 마치 열이 사랑 자체 안에 존재하지 않고 사랑으로부터 의지 안에, 이로부터 육체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지혜는 열과 빛의 본체이다. 따라서 열과 빛은 그 본체로부터 진행되어 나온다. 주님은 깊은 어둠 안에 거하신다 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그분 자신의 본성이 납득 불가능함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가장 높은 거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을 통해 오는 주님의 가르침이 처음에는 귀에 속삭이는 수준에서,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는 정도에서 다가 온다. 이 가르침이 의지와 생각에까지 내려와야 속삭여지고 중얼거린 듯 우리에게 여겨졌던 그 가르침들은 낭랑하게 울려퍼지면서 총명하게 지각되어 인간과 교통을 이루게 된다. 대기의 높은 영역에서 소리는 잠잠하고 빛은 직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은 영역으로 내려올 때 소리는 청취할 수 있게 되고 빛도 볼 수 있게 된다. 진실된 설교자, 마치 진정한 제자와도 같이 자기 스승으로부터 감명과 생각들을 받는다. 그는 외형 측면에서는 스승을 닮지 않은 듯 보일 수 있어도 그의 뜻과 사상 측면에서는 스승의 의지가 임신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영혼이 육체로 아직 옷 입혀지지 않았고 사상들이 보일 수 있는 형상을 아직 형성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이것이 의식할 수 있는 느낌과 또렷한 생각의 영역으로 내려오게 되면 지적 형체와 도덕적 표현이 주어져 총명한 언어로 옷 입혀져 타인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데서 말하게 되고 귀에 속삭이듯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게 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제자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선생이 되어야 한다.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로 선포해야 할 뿐 아니라 행위로도 선포해야 한다. 그가 신성한 진리를 내향적으로 베껴 쓴 것을 이해성의 생각으로 가져다 놓고 신성한 사상을 의지의 애착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삶과 대화에서 그분의 진리와 사랑이 형체를 갖게 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선한 일로 나타나 볼 수 있게 해야 안과 밖 모두의 저자 되시는 분을 영광되게 하리라.

28. 이런 의무들을 말하시면서 이 의무 수행에 따라 붙는 두 가지 영향력, 즉 세상으로부터와 자신으로부터 받는 영향에 관해 말하신다.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 하여라.” 우리는 인간을 두려워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 하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힘은 육체에만 국한되지만 하느님의 힘은 영혼과 육체에 공히 미친다는 말이다. 이러한 글자적 의미는 가상적인 진리일 뿐 실제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 이유가 하느님은 지옥에 보내고자 영혼을 죽이시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물질인 육체는 무덤 너머까지 잔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 구절 역시 그 속의 영적 의미만이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고 이 구절에서 선포된 말씀의 진정한 힘 역시 영적 의미에만 존재한다. “영혼과 육신”은 영(the spirit)에 관련해 서술되는 바 이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도 같다. 영적 의미로 볼 때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사람이란 인간을 멸하길 결코 원치 않으시는 신성한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원인되는 각자 속의 어떤 원리를 뜻한다. 그러면 외적 인간은 죽일 수 있으되 내적 인간은 죽일 수 없는 게 무엇일까? 부분적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거짓이고 우리를 전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거짓 추론은 이해성을 뒤집음으로 외적 인간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뿐 악만이 인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의지 또는 뜻함이 있는 곳이 인간의 생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악의 파괴는 폭 넓으면서도 매우 깊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두 부류의 사람을 놓고 말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지옥이란 침몰의 상태가 더 깊은 것, 죽음 보다는 생명이라 표현되는 것에 반대된 상태가 더 깊다는 측면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 파악은 누가복음 12장 4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서 가능하다. 거기서 제자들이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육체가 죽은 뒤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죽음과 지옥을 따로 따로 언급하고 있다. 둘 모두 마지막 상태들을 뜻하지만 죽음은 사탄의 거처이고 지옥은 악마의 거처임을 우리로 확실히 알게 해 준다.

29.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새란 생각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참새 종류는 새 중에서 매우 흔하고 그 가치도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두 마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진리 측면에서의 생각과 선함 측면에서의 생각, 또는 선하고 참된 생각을 뜻하는 숫자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린다”라든가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의 가치밖에 안된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선함과 진리에 관한 우리의 매우 낮은 수준의 생각들이 선함과 진리에 관한 매우 수준 낮은 지식과 하나 될 경우를 말한다. 기억 속의 선함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돈(닢)이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가치가 거의 없는 우리 생각 중 어느 하나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볼 사항은 위 구절이 제자들이 받게 되는 시련과 박해와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때에 참새가 땅에 떨어질까? 시련 받는 때이다. 이때 우리의 생각들이 내적 인간의 하늘로 높이 오르는 대신 바깥쪽 인간으로 향할 때, 땅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아예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애착은 생각의 생명이다. 그래서 애착이나 느낌이 풀이 죽어 버릴 때 생각은 쇠약해져 죽기까지에 이른다. 흔히 모든 사람은 자연적 수준의 시련에 대한 결과는 확실히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매우 사랑한 사람이 죽을 경우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 죽은 사람과 묶여 있어 이 세상에는 텅 빈 공백만이 남아 있는 듯 여겨지고 생각은 땅에 묻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듯 여겨지는 때가 그럴는지 모른다. 자연적 수준의 시련도 이러할진대 영적 수준의 시련은 더욱 심각하다. 이런 저런 상태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 아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그분은 우리 생각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지배하시면서 조절해 주신다. 따라서 위 구절은 시련과 박해로 우리의 생각이 바닥에서 기고 있다 해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다. 하느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마음 안에서 신성한 사랑은 지극히 작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까지 들어오고 그 생각을 죽지 않게 보존해 주신다. 본문에서 언급된 “땅”이란 우리의 좌절감을 상징한다. 이런 좌절 속에 빠져 있다 해도 우리가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어 있다면 견뎌낼 힘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선포되고 있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참새가 자연적 수준의 매우 수준 낮은 생각을 상징하는데 비해 머리카락은 지혜 또는 합리적 원리 중에서 최말단에 해당되는 것들을 뜻한다. 앞 구절에서는 참새를 가지고 그분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하셨다. 이 구절의 경우는 머리카락을 들어 우리를 지키시는 섭리가 세세한 부분까지 미친다는 것을 선포하신다. 특히 시험의 때에 그러하다는 것을 앞 문단과 연결해 상념 해야 할 것이다. 본문이 가르치는 바, 가장 작고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분에 의해 점검되어 있다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은 섭리를 주제하시는 아버지의 감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음 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서 용기를 가져 보자.

31.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주님께서 미세한 부분, 하찮은 듯 여겨지는 항목까지 다 돌보고 계신다면 가장 높은 것,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히 돌보고 계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하나도 있을 수 없으리라. 주님과 천국에 가장 가까운 원리들,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고 그분의 계명을 완수하는 것은 이보다 덜 중요한 문제들, 세상과 육신에 속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참으로 우리 시련의 얼마쯤은 이런 가치 기준에 관계된다. 우리가 겪게 되는 시험의 얼마는 무게를 두어야 할 높은 원리를 덜 중요하게 사용함으로 오게 된다. 우리의 애착과 생각이 감사와 신뢰를 수단으로 주님께로 승강시켜야 하는 때에 내일을 위해 걱정하느라 생각 자체를 땅에 떨어트려 땅속에 묻게 하려는 것 때문에 시험은 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을 안다고 증언하면 그 아들은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한다는 말이다. 아들(the Son)이란 신성한 진리를, 아버지란 신성한 선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실천한다면 그 진리는 우리를 선 쪽으로 인도해 갈 것임을 약속하시고 있다. 우리가 아들을 믿노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성실히 실천함으로 확증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으로 인도해 주는 진리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진리 자체가 증인같이 우리 속에 존재하면 그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꾸준히 있어지는 진리의 증언 결과 내지 그 보상으로 진리의 선을 선물하게 된다. 본문을 읽게 되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해지고 있고 아들은 땅 위에 계신 것으로 이해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 구절에는 더 약속되는 바가 있다. 즉 우리가 진리를 외적 인간 측면에서 꾸준히 인정하는 것은 그 진리 자체를 내적 인간 안으로 들어 올리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가 통치하는 형태에서 사랑이 통치하는 형태로 승강되게 해준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사람 앞에서 아들을 부인함 속에는 아들로 아버지 앞에서 그 부인자를 부인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만일 진리가 생활에서 부인된다면 그 진리가 향해 가는 선, 우리를 지휘해 가는 목적인 선 쪽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 구절을 더 생각해 보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모른다고 하는 것 보다 사람 앞에서 아들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심각한 결과임을 알게 해준다. 아들이 우리를 모른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진리를 무시하고 있을 때 그 진리 자체는 우리를 정죄하고 그 진리가 가르치는 모든 선을 우리로부터 박탈함으로 해서 진리를 알지 못했던 이전과는 아주 달리 진리와 선함 모두에 대해 반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 구절을 글자대로 생각하려고 고집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그분께서 가르치신 그 결과는 다른 견해를 낳게 해 그 결과가 분리를 창조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세상은 사람 사이에 분규나 폭동같은 게 없으면 혼수 상태 또는 죄있음에서 깨어나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영적 의미로 볼 때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신앙자의 마음 안에 구세주로 주님이 오신 결과가 이 구절과 같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결과란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애정들은 모두 영적 수준의 것들에 적대감을 갖도록 흥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제는 이미 말했던 사항인데 이 곳에서도 취급되고 있다. 이 구절은 위 내용을 찾는 이들에게 더 직설적으로, 마음에 꽉 박히도록 의도하시고 있다.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비질서적이고 썪어 있는 상태일 경우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러 오지 않는다. 아마 단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하느님의 진리의 칼은 하느님과 인간 자신에게 공히 적이 되는 마음 속의 악과 거짓을 향해 휘둘러진다. 거듭나기 전이라 해도 거기에 평화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일 뿐이다. 이런 평화란 자연적 수준의 인간에 상속적으로 선택된 죄, 불신앙, 비질서 같은 마음에 합일될 때 있는 평화일 뿐이다. 영혼에 주님이 오심, 그분을 구세주로 응낙하면 그분께서는 칼을 내어 주시고 악이 정복될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후 승리가 있을 때마다 진정한 평화가 정의와 공정이라는 원리 위에 건설되어진다. 주님을 영접함으로 창조되는 전쟁이란 우리의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악들이 마음을 통치하는 원리와 생명으로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 대신 하느님의 법이 내적 인간에서 인정되면 자연적 마음 속의 욕망은 새로운 내향의 법에 반기를 들게 되지만 성공적인 전쟁으로 마무리 되기 위해 미움같은 혹독한 분노 속에 휩싸인다. 이 전쟁의 모습에 대한 일부가 다음 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35.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아들, 딸, 며느리란 내적 인간 안에 있는 새 원리와 선과 진리를 향한 애착들이다.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란 외적 인간 안에 있는 옛 원리들과 악과 거짓을 향한 애착이다. 아들은 진리를, 딸과 며느리는 선과 진리를 향한 애착인데 이것들은 내적 인간의 원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아버지는 악을,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악과 거짓을 향한 애착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들은 외적 인간의 원리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우리 영혼에 주님이 오시면 위 새 원리들은 다양한 조건 위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이유가 악과 거짓에 노예되어 있어 왔던 마음은 진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한 열정의 폭력에 저항하는 일도 없이, 또는 죄의 굴레를 벗으려는 투쟁도 없이 진리가 정착할 수 있는 마음 영역 즉 자유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때는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투쟁 속에서 기독인은 다음 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지 깨닫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집이란 인간 고유의 마음을 말한다. 진짜 적은 인간 고유의 집에 있다. 인간의 유전적인 근성에는 악밖에 더 있는 게 없다.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게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본성이다. 자아와 세상 만을 사랑하는 게 인간이 태어날 때 지닌 본성이다. 자아와 세상만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참 인간의 원수이다. 그 이유가 이 사랑은 참된 부와 행복을 박탈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마음은 자아와 세상만을 사랑함이라는 악이 자기 원수인줄 모른다. 그 이유가 진리와 생명의 원리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참 친구되심을 알게 되고 그분의 형상을 닮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때 과거 거듭나지 않고 있던 심정 속에 있던 것들이 얼마나 몹쓸 것인지 이내 발견한다. 그래서 원수가 집안에 들어 앉은 것들임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즉시 그 사람에게 위험이 뒤따른다. 마치 모든 시련이나 투쟁에는 언제나 위험이 곁들여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가 기독인의 생활에는 투쟁 내지 전쟁 상태는 언제나 하느님을 사랑하느냐와 자아를 사랑하느냐, 이웃을 사랑하느냐와 세상을 사랑하느냐라는 두 원리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정 반대되는 사랑들 사이에 싸움이 늘 있다는 참 사실은 어느 쪽이 승리를 하든 승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힘의 균형이 어떠 하느냐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만일 자아와 세상 사랑이 우리 애착에 깊이 뿌리 박지 않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는 심각하게 싸울 바탕이 있을 리 없고,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미워하고 적대시 해서 정복하려 들 어떤 위험한 상태도 있을 수 없다. 자연적 수준이 영적 수준을 정복해 버리는 결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는 불행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시는 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고 이 두 사랑은 악한 모든 사랑의 부모격이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란 모든 거짓과 악을 향한 애착들을 뜻한다. 이 사랑은 위 부모격인 두 사랑의 자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랑은 악한 모든 것, 즉 유전적인 악과 실제의 악을 일괄해서 뜻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또는 주님보다 자아를 더 사랑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이 싸움의 목적이다. 싸움터가 이러하기에 위 말씀에 담긴 진리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자아를 우선시 하는 사람은 생명 자체가 사랑이신 그분에게 아무 쓸모없게 된다. 악은 악마 특히 자아 사랑이라는 악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아버지가 악마에 소속되어 있다면 지독하게도 무가치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악마의 자식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는 지당한 귀결 때문이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가장 필수되는 의무, 기독인의 전투를 성공리에 마무리 하는데 필수되는 꼭 한 가지는 십자가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인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다. 세상과 육에 속하는 것들을 십자가 형에 처해 버리는 것이 기독인이 날마다 땀 흘려야 하는 노동이고, 주님만을 따르는 것은 기독인의 일상적인 의무이다. 기독인은 자기 내부에 있는 악한 욕망과 싸워 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악한 습관과도 싸워가야 한다. 그리하여 악행을 중단하면서 선행을 배워 익숙해져야 한다. 기독인은 악에 저항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하고 주님의 거룩한 본보기를 모방하려 노력함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기독인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즉각 짊어지고 사랑과 은혜의 생애를 엮으신 그분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가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중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체가 고통 받을 때 있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을 순수해지게 할 때 존재한다. 또한 마음이든 육체이든 만족 시키려는 것을 부정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나 육체에 있게 되는 이기적인 것들과 그 속에 있는 불순한 것에 반기를 들 때 십자가는 존재한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행동은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더 특별히 말해보자. 십자가를 짊어짐은 시험을 견뎌내는 것이고 이 시험은 영적인 악과 내향적으로 투쟁하는 것, 즉 주님께서 우리 심정 속에 이식해 두셨던 선을 제압하려 봉기하는 영적 측면의 악과의 투쟁을 뜻한다.

39.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꾸준하게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거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목적 내지 마지막 결과로서 이기심을 십자가 형에 처해 죽이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런 결과가 없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헛된 공상일 뿐이다. 즉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랑이 생명(목숨)이다. 자아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사랑함은 인간 고유의 사랑, 거듭나지 못한 생명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새로운 생명, 거듭난 생명이다. 자기 심정을 통치하도록 자아 사랑을 허용함으로 거기서 자기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진정한 생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의 생명을 잃는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인간 고유의 생명을 내려 놓는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정한 생명을 발견한다.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자아를 죽이는 것이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인바, 이는 악과 선, 거짓과 진리를 맞바꾸는 것이다. 이런 교체 속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영광은 더 한층 드높여 진다. 생명(목숨)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생명이란 단어가 위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하나가 선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예를 찾아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구별되는 점이 발견된다. 요한복음 1장 4절의 경우,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리고 주님 스스로 말씀하셨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한이 있고 다시 그 목숨을 얻을 권한도 있다…” (요한복음 10:15,18). 아버지로부터 얻은 그분의 생명은 그분께서 내려 놓으신다고 말했을 때의 생명이 아니고 단지 동일한 단어인 목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뿐이다. 그분께서 내려 놓으신 생명은 “내 영혼이 죽을 정도로 심히 괴롭다”고 말하셨을 때의 “영혼”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똑같다. 이렇게 구별해 살피는 이유는 그분이 태어나실 때 아버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는 생명은 신성한 사랑이라는 것, 그분께서 내려 놓아야만 하겠다고 심히 통곡하신 생명은 신성한 진리였다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볼 때 발생된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시험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 내지 선함 측면에서 그분은 모든 시험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바 죽을 수가 없다. 이쯤해서 주목해 둘 사항이 있다. 우리가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은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다고 말할 경우라 해도 이때의 신성한 진리란 그 진리 자체를 뜻하는 게 아니라 유한하고 미약할 뿐인 인간성을 수단으로 세상에 내려 오실 때 필요했던 진리, 즉 진리의 외관을 입으실 때의 신성한 진리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내용을 교리 차원에서 달리 말해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은 그분의 내적 인간 측면의 생명이고 그분께서 내려 놓겠다고 하신 어머니 쪽에서 받은 생명은 그분의 외적 인간 측면의 생명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목숨, 즉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게 되는 생명은 우리의 외적 인간 측면의 생명, 좀 더 꼬집어 말한다면 지적 측면의 마음에 해당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에워싸고 있는 각종 거짓이나 오류를 벗어 던진다는 말과 같다. 이럴 때 자연적 수준의 인간 즉 인간 고유인 각종 거짓들로 범벅된 의심과 불신앙을 우리의 참 신앙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이를 응용해 생각해 보자. 지적 자만은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잃어야 한다고 하신 목숨 내지 영혼이고 이 목숨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새 생명, 하느님께서 불어 넣으신 살아 있는 영혼을 발견하고 이때 새 피조물이 된다. 이상의 내용을 집약해 생각해 보면 위 본문의 두 가지 약속은 신성한 섭리에 관한 교리를 요약해서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에는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 경우 그분께서 설비해 두신 것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허용하시는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악에도 빠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그러나 더 큰 악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경우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을 위해서라면 악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실 때도 있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머리카락을 세어 놓는다는 것은 우리를 보전하신다는 섭리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질서 법칙에 일치 하도록 우리의 자연적 수준의 마음과 삶에 있는 미미한 활동까지도 섭리하심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질서를 수단으로 섭리를 펴시고 하느님의 질서 자체가 그분의 권능이다.

40. 이제 인간 고유에 속한 자연적 인간이 거듭 나질 때 더 밝은 측면이 제시되고 있다. “너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 들이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보내셨고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자들이 스승과는 독립된 인물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인물(person)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신성한 실체는 하나일 뿐 나뉠 수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탄생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무한하시다. 그 반면 인간은 창조 되어진 상태로 유한하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는 어떤 비교도 할 수 없다. 무한은 생명 자체이고 유한은 그 생명을 받는 그릇에 불과한 바 그 근원되는 생명으로부터 한순간이라도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신성한 실체가 하나요 분리될 수 없다 해도 실체의 속성은 복수로 존재한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지혜 또는 선함과 진리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실체이다. 마치 한 인간 안에 이해성과 의지가 놓여 있듯 위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따로 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의 이런 구별이 신약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 또는 선함이고 아들은 신성한 지혜 또는 진리를 표현한다. 지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는 선함으로부터 발출된다. 자연계에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출생되는 것과 같다. 이런 자연계와의 유사한 점을 수단으로 신약 성경에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표현된다. 신성한 지혜는 신성한 사랑에 의해 보내졌다.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졌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와 상응되는 견지에서 예수께서 제자를 보내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보낸 제자란 진리 자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진리들,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더욱 낮은 수준의 마음에 체류할 수 있는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점진적 수준으로 존재한다고 말해볼 수도 있다. 즉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신성한 선에 의해 보내졌고 가상의 진리, 신성으로부터의 진리(truth divine)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 보내졌다. 또한 영적 수준의 원리는 천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자연적 수준의 원리는 영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진행된다. 보다 낮은 것들은 보다 높은 것에 이끌리고 보다 높은 것은 가장 높은 것에 이끌린다. 그 반대로 가장 낮은 것은 그 안에 보다 높은 것을 포함하고도 있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태에서 가장 낮은 것을 맞아 들이는 사람은 그외 다른 것도 맞아 들일 수 있다. 이제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말씀의 내적 의미는 최말단 의미, 즉 글자 의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글자 의미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신다. 말씀의 지극히 단순한 의미가 담긴 진리를 맞아 들이는 사람은 말씀의 더 높은 지혜를 받을 수 있다. 지극히 간단한 순종부터 실행하는 사람은 그 순종 안에 지극히 높은 사랑,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까지도 지닐 수 있다. 종교 생활의 발전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그의 순종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위 큰 두 사랑은 그의 마음 안에서 적극적인 원리로 되기에 이르러 그에 상당하는 완전한 삶을 이룩하리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복음 14:23). 이 축복의 말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 마음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거주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성막이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우리와 계신 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실 수 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예언자요, 진리를 실행하는 자가 옳은 사람이다. 따라서 각각은 진리와 정의를 의미한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 들인다는 것은 그 예언을 위해 진리를 받는 것이다.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인다는 것은 옳은 것을 위해 선을 받는 것이다. 참됨과 선함을 위해 참되고 선한 것을 받는데 따른 보상은 진리와 선함을 향한 애착이다. 사랑 안에 행복이 있다. 영적 수준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 참 행복이 존재하고 이 사랑은 행복과 천국 모두를 우리에게 갖게 해준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소자(little ones)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작은 어린이는 순진을 상징한다. 소자에게 물을 준다는 것은 순진하되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순진 자체에 진리가 심어지는 것까지 뜻한다. 그런데 이런 의무 실행에 약속된 보상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까지 포함되고 있다. 따뜻함이 사랑 또는 애착인 반면 차가움은 사랑이 없음 또는 사랑이 부족함을 말한다. 찬물이란 사랑의 진리가 아닌 순종의 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사람에게 찬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받을 보상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고 말한 위 본문의 약속이란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비록 자신의 뜻이라면 행하고 싶지 않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있게 되는 선한 일, 의무감에 따른 선한 일, 지극히 단순한 선함까지도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뿐 아니라 지극히 높은 보상까지도 받으리라는 것, 가장 높은 사랑의 행동과 비교해도 그 수준이 덜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이다. 어쨋든 이렇게 지극히 단순한 의무가 상을 취득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자의 이름을 걸고 행동되어야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행동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말해보자. 지극히 단순하나마 주님의 뜻을 행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가르침에 관계되어야 하고 자연적 수준의 자비심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무감에서 비롯된 지극히 단순한 선한 일에 영적 수준의 품질과 천국적인 결과가 있기 위해서 의무수행은 반드시 영적 수준의 원리로부터 진행되어야 한다. 종종 기독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을 덜 사랑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때 애석해 한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하느님을 생각했던 만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면 그분께 순종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자기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자기를 강요할 수 있다. 그분께 순종해 가려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성실히 순종함을 시작한다면 비록 그 순종이 “냉수” 같이 차가운 순종이었겠지만 차츰 그런 의무감에서 해제됨을 수단으로 과거 자신에게 너무 결핍되었었다고 통탄했던 그 사랑을 느끼면서 소유하게 된다. 비록 사랑이 존재되도록 자기 의지가 움직여질 수 없었다 해도 그 사랑이 존재하도록 역사된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을 바치면 그 보상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갖게 해 주신다.

마태복음 10장

<마태복음 10장 흐름정리>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전도 사역자로 파송하기 직전에 베푸신 주님의 교훈으로서, 시간상 제3차 갈릴리 사역 초기에 일어난 일이다. 크게는 한 단락으로 볼 수 있겠으나, 내용상 열두 제자의 명단(1~4절), 복음 전파자의 자세(5~23절), 복음 전파에 대한 주님의 도우심과 섭리(24~33절), 복음과 세상과의 대립(34~39절),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에 대한 축복(40~42절) 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주제는 하나, 즉 복음 선포의 절대 우위성과 그것을 담당하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전적 헌신이다. 고난을 회피하고 값싼 복음을 좇는 오늘의 우리가 다시 되새겨 볼 말씀이다.

<마태복음 10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열두 사도에게 이적 행할 권능을 주어 보냄.

5. 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가르침.

16. 핍박에 처한,

40.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함.

<마태복음 10장 도움말>

* 1절 : 그 열두 제자.

이것은 마태가 열두 제자를 그 이름으로나 한 그룹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 5절 : 이 열둘.

지금까지 예수의 봉사를 도왔던 열두 제자는 이제 홀로 일하도록 보냄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예수의 방법을 관찰하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 때때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하는 말씀을 통해 유익을 얻을 기회를 가졌다. 이제 열두 제자가 보냄을 받아, 형제는 형제와, 친구는 친구와 둘씩 짝을 지어 나갔다.

* 6절 : 잃어버린 양.

구약에 이스라엘은 자주 양으로 비유되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목자로 비유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목자라 하였고, 그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그의 우리의 양떼라고 하였다.

* 14절 : 먼지를 떨어 버리라.

반갑지 않은 대접을 받은 곳에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그들을 기쁘게 맞이할 곳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었다. 어떤 집이나 마을에서 떠나는 이러한 행동은, 무례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항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냄으로써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당신들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15절 : 소돔.

소돔과 그의 운명은 배도와 하나님의 심판의 한 표징이 되었다.

* 16절 : 뱀같이 지혜롭고.

복음 교역자는 깨어서, 해야 할 일의 진로를 따라 나아갈 때 직면할 수도 있는 위험과 어려움을 인식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신속히 행동해야 한다. 그들은 행동에 신중하고 어려운 상황을 다루는 데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악한 자들의 계교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되, 스스로 그러한 계교를 부려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양의 특성을 모두 다 따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뱀의 특질 가운데 그들이 따라서는 안 될 것들도 있다. 그들은 뱀의 민첩성은 발휘하되, 간교함은 따르지 말아야 한다.

* 17절 : 공회.

즉, 지방의 사법 재판소 또는 23명으로 구성되는 소규모 산헤드린. 그러한 지방 재판소는, 대산헤드린이 모이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여러 유대 공동 사회에서 볼 수 있다.

* 19절 :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연구에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것을 너그럽게 봐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믿음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벧전 3:15)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6:34)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신실히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문제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극복할 은혜 주심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어떠한 상황에도 준비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연구하는 데 가장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21절 : 형제.

가능한 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롬 12:18)해야 하며, 한 가족 내의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살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도록 모든 신실하고 끈기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30절 : 머리털까지[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자신의 머리카락 수를 셀 만큼 자신에 대하여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우리를 알고 계신다.

* 34절 : 화평을 주러.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다. 하늘의 평화를 이 땅에 가져오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면 그는 세상으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려고 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피할 수 없이 죄인들로 하여금 화평의 제의를 거절하는 모든 자와 불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악과의 타협을 통하여 주어지는 화평을 추구하거나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화평을 얻으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38절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로마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노예나 가장 흉악한 범죄로 정죄된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렇게 죽도록 선고받은 자는 사회로부터 혐오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자는 보통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친구나 친척들,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불평이나 후회 없이 인내와 겸손으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가장 높은 특권을 가진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이르러 올 수 없다.

* 42절 :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아마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 봉사의 예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작은 봉사였지만, 물이 항상 부족했던 성경의 지역에서는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봉사 중의 하나였다.

마태복음 10장: 제자의 고난, 제자의 영광

마태복음 10장: 제자의 고난, 제자의 영광

1-4절: 열 두 제자를 세우시다

9장 38절에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없다”고 탄식하신 예수님은 열 두명의 제자를 세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권세를 입혀 주셔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나중에 “사도”(2절)로 불립니다. 그분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딱히 열 둘을 세운 이유는 실패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파기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당신의 피를 통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다 “새 계약”을 이루어 하나님의 새 백성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부였던 네 사람(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세리였던 마태 외에 다른 일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이라 했으니 그는 유다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혁명당원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에게 붙여진 “가룟 사람”이라는 말도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활동했던 자객단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로 뽑힌 열 둘은 인간적인 자격 때문에 선정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모으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은 인간적인 탁월함에 기초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전령이 된 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능력 때문입니다.

2. 5-15절: 제자들을 보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먼저 “이스라엘의 잃은 양”(6절)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수습 제자로서 일하는 단계에 있으니 친숙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이방인들에게 가겠지만, 먼저 유대인들에게만 집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철저하게 의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9-10절).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다 보면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질 것으로 믿고 최소한의 여장만 준비하여 떠나라고 하십니다. 또한 더 좋은 거처 혹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도 말라고 하십니다(11절). 그들을 환대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박대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니 겸손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처신하라 하십니다(12-15절).

3. 16-33절: 제자가 당할 고난 그리고 약속

제자들을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16절)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물질을 전부로 알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전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16절)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진실하고 신실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상황을 잘 분별하고 기민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과 박해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17-18절). 그런 상황에 처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9-20절). 예수님 자신이 하늘 나라의 복음으로 인해 오해와 박해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스승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제자로 나섰다는 사람들이 그런 운명을 피하리라고는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도, 그 복음대로 사는 것도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미움과 배척과 무시와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식구에게서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21-25절).

제자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로서 바로 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사형통하고 모든 것이 평안할 때 제자는 오히려 긴장해야 합니다. 제자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제자는 어떤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제자의 몫이 아닙니다(26-31절). 제자는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 인정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32-33절).

4. 34-42절: 제자 뒤에 있는 분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습니다(34-39절).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하찮아지고, 그동안 진실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이 거짓으로 보입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과 정반대의 삶을 살게 만듭니다.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하늘 나라를 통해 절대적인 것을 보았기에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상대화됩니다.

그렇게 믿고 말하고 행동하기에 때로 믿지 않는 가족과 믿는 가족이 원수처럼 갈라지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여는 것은 이렇듯 처음에는 분열과 갈등을 불러 옵니다. 그것이 무서워서 예수님에게 등 돌리고 하나님 나라에 눈 감는 것은 돼지떼의 죽음을 보고 떠나가 달라고 했던 거라사 사람들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모두가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 뒤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 하라고 하십니다(40-42절). 보내신 분이 보냄 받은 사람을 끝까지 책임 지신다는 약속입니다.

묵상:

제자가 되고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때로 불편과 손해와 거부와 무시와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열고 그 나라를 믿고 그 나라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또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일이니,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하고 거부하고 박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로 살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늘 나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다스림이 우리 가운데 있으며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안다면, 현세적인 불편과 손해와 박해 때문에 돌아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살고 그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 뒤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버티고 계신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며 또한 그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든든한 ‘빽’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 되어라, 제자로 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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