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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행전 20 장 | 사도행전 20장 6059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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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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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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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사도행전 20. … 제 20 장 …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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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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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 RNKS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도행전 20. 20. 바울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여행. 1소동이 그친 뒤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그들을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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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9/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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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사도행전 20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20:1 <전도하는 바울> 소동이 그치자, 바울은 신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 곳을 떠나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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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8/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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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KLB –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 Bible Gateway

사도행전 20. Korean Living Bible ·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돌아오는 길 ·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림 · 에베소 장로들과의 작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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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8/20/2022

View: 9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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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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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7/10/2022

View: 2201

[사도행전 20 장 – 문제와 해설]

사도행전 20 장. 1. 다음 두 구절은 바로 이 여행 때에 있었던 일을 가리킨다.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행이 이렇게 많은 지, 현실적인 문제와 비교하면 바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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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5/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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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1-38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사도행전 20:1-38 말씀 묵상’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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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8/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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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화) “사도행전 20:1-12” / 작성: 이창호A

[본문] 사도행전 20:1-12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마게도냐와 그리스에 가다(1-6)]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가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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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5/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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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주석 – Daum 카페

사도행전 제 20장 =====20:1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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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9/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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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 행전 20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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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eV00PmWyZY

사도행전 20

바울이 마게도냐와 헬라를 다니다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1)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유두고를 살리다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항해하다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2)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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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바울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여행

1 소동이 그친 뒤에, 바울 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그들을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 로 떠나갔다. 2 바울 은 그 곳의 여러 지방을 거쳐가면서, 여러 가지 말로 # 그 , ‘그들을’ 제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 에 이르렀다. 3 거기서 그는 석 달을 지냈다. 바울 은 배로 시리아 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그는 마케도니아 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4 그 때에 그와 동행한 사람은 부로 의 아들로서, 베뢰아 사람 소바더 와 데살로니가 사람 가운데서 아리스다고 와 세군도 와 더베 사람 가이오 와 디모데 ,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고 와 드로비모 였다. 5 이들이 먼저 가서, 드로아 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6 우리는 무교절 뒤에 배를 타고 빌립보 를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 에 이르러, 그들에게로 가서, 거기서 이레 동안을 지냈다.

유두고를 살리다

7 # 또는 ‘안식일 밤에’ 또는 ‘토요일에’ 또는 ‘주일에’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 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8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9 유두고 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 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10 바울 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11 바울 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12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항해

13 우리는 배에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 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바울 을 배에 태울 작정이었다. 바울 이 앗소 까지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14 우리는 앗소 에서 바울 을 만나서 그를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 로 갔다. 15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떠나서, 이튿날 기오 맞은편에 이르고, 다음날 사모 에 들렀다가,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 드로길리움 에 머무른 뒤에 그 다음날 밀레도 에’ 그 다음 날 밀레도 에 이르렀다. 16 이런 행로를 취한 것은, 바울 이 아시아 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베소 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 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별 설교를 하다

17 바울 이 밀레도 에서 에베소 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18 장로들이 오니, 바울 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 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19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또,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내게 덮친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20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 를 믿을 것을, 엄숙히 증언하였습니다. 22 보십시오. 이제 나는 # 그 , ‘영’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 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 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쉬운성경 사도행전 20장

20:1 <전도하는 바울> 소동이 그치자, 바울은 신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 곳을 떠나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0:2 그는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에 여러 지방에 들러 신자들에게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고 그리스에 도착했습니다.

20:3 바울은 그리스에서 세 달을 지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20:4 그 때,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20:5 이들은 드로아에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6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뒤에,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오 일 만에 드로아에서 그들을 만나 그 곳에서 칠 일 동안을 머물렀습니다.

20:7 <유두고를 살린 바울> 안식일 다음 날, 우리가 교제의 식사를 나누기 위해 모였을 때에 바울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음 날에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한밤중까지 신자들에게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20:8 우리가 모인 다락방에는 등불을 많이 켜 놓았습니다.

20:9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문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는데, 바울의 말이 너무 오래 계속되자, 잠이 들어 그만 삼층에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20:10 바울이 내려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고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청년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20:11 바울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 먹은 후에 날이 새도록 오랫동안 설교를 하고 떠나갔습니다.

20:12 사람들은 살아난 젊은이를 집으로 데려가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20:13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여행하다> 우리는 먼저 배를 타고 앗소로 항해하였습니다. 앗소에 도착해서 바울을 그 배에 태울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은 바울이 걸어서 앗소까지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14 우리는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를 배에 태워 미둘레네로 갔습니다.

20:15 이튿날에는 미둘레네를 떠나 기오에서 가까운 곳에 이르렀고, 다음 날, 사모로 건너갔다가, 그 다음 날,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20:16 바울은 아시아 지방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

20:17 <에베소의 장로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20:18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20:19 그 동안, 나는 유대인들이 지어 낸 모함으로 몹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20:20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공중 앞에서나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20:21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모두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20:22 그러나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20: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20:24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20:25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줄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제 나의 설교를 들으신 여러분 중에는 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설령 누군가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20:27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20:28 여러분은 자신들과 모든 맡겨진 양 떼를 잘 살피고 그들을 잘 돌보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0:29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나는 압니다.

20:30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20:31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20: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20:33 나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20:34 여러분 자신도 아시듯이 나는 언제나 직접 일을 해서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

20: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0:36 바울은 이 말을 마친 뒤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20:37 그들은 다 바울을 껴안고 작별의 입맞춤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20:38 특히 그들은 다시는 자기를 보지 못하리라는 바울의 말을 듣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 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38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38 말씀 묵상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Acts 20:24).

바울의 계획은 분명히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대로 항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서, 그와 누가는 이 항로를 취소하고 다른 항구에서 항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3).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렀던 마지막 날 저녁 드로아의 교인들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해 모여 바울에게 긴 강론을 경청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 때문에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몸을 끌어안자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음은 물론입니다(7-12).

바울은 원래 계획보다 드로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연됨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나머지 일행들을 미리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앗소, 미둘레네, 기오 그리고 밀레도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면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16). 이처럼 바울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고별설교와 권면을 하기 위하여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17).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신변의 위협을 받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자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가르쳐 주십니다(20).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권면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많은 신자들이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장로들 스스로가 언어와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세상이나 우상 숭배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돌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 안에 흉악한 이리가 나타나 양떼를 아끼지 않으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했습니다(28-30). 바울은 장로들에게 지혜와 정성이 필요함을 상기시키며 그들과 교회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이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이유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 때문입니다(38). 장로들은 바울의 섬기는 모습, 집회를 주재하는 모습, 따뜻한 충고와 위로를 주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근심하였습니다.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는 일에 전심전력하기를 소원합니다.

2020/10/27(화) “사도행전 20:1-12” / 작성: 이창호A

[본문] 사도행전 20:1-12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마게도냐와 그리스에 가다(1-6)]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가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면한 후에 다시 마게도냐로 길을 떠납니다. 바울의 권면은, 20장 17절부터 나오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했던 권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억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말 것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게 된 일은 데메드리오의 소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마술과 요술을 이기고, 세력을 얻었던 때(19:20),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이미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보다 먼저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어, 교회들의 영적 형편을 돌보고 권면하는 일을 하게 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를 모으는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남아 영광스러운 복음의 추수 보기를 원하지 않고, 미련 없이 에베소를 떠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눈에 띄게 안정되면, 기득권이라고도 할 것 없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로서 이 정도의 모범적 삶을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바울은 신실한 신자의 표본이요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행전 문맥에서의 바울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간사함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게 자기 분깃과 얻게 될 이익에 대한 관심은 내려놓은 채 사는 길은 바울만 걸을 길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걸어야 할 길입니다.

바울은 먼저 에게 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 드로아에 머물며, 디도를 기다립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전달했고, 그 결과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전 2차 전도여행에서 방문했던 것과 동일한 여정으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들을 방문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헬라”라고 불리는 아가야 지방에서 석 달을 머무는데, 대부분을 고린도에서 체류하며 그곳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롬16:23).

에베소를 떠나 자신이 섬겨야 할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섬기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해상 항로를 이용하여 수리아로 가고자 했지만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를 알고는, 마게도냐를 거쳐 육로로 우회하기로 작정하고 이방교회 여러 대표자들과 길을 함께합니다.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모는 비밀리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정보망이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에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부족하고 없는 것 투성이의 전도팀이었을 것이지만 이런 공모가 미리 바울 일행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주시고, 사명을 이루기까지 안전하도록 이끄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감히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소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르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를 예수 안에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하시고, 그 삶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렇게나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백성된 삶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신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을 완성하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으셨고, 세상의 부와 명예도 주시지 않았지만 바울을 보호하시고, 말씀을 이루는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마치기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묵상하며, 오늘 나는 그 길의 중앙을 걷고 있는지, 길을 비켜나 어긋난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수확의 계절에, 삶으로 맺은 열매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며 말씀 이루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유두고의 죽음과 되살아남(7-12)]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언급되었던 이방 교회의 대표들은 드로아에 먼저 도착하여 바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5일 만에 드로아에 있는 이방 교회의 대표들과 합류했고,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바울은 잠시 들러 일주일을 머물렀던 드로아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 일행은 그 주간의 첫날, 곧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시작한 바울은 한두 시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밤중까지 계속 설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따라 부활하게 되리라는 요지의 설교였을 것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된 설교에 3층 창문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9절 말미에,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죽었음을 증거합니다. 유두고의 죽음으로, 가장 은혜로워야 할 예배의 시간, 축제의 시간이 가족을 잃은 슬픈 장례식장이 될 뻔한 상황입니다. 바울도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가 목숨을 잃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포갠 엘리사처럼 죽은 청년의 몸을 안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말하며, 바울은 죽은 유두고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유두고가 살아났고, 올라가 함께 떡을 떼어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예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유두고에게도 실제로 일어남으로써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이심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살아내었고, 유두고를 살려냄으로써 부활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사역을 친히 감당했습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는 말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유두고가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저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실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부활을 살아내며, 부활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영적 체험의 장임과 동시에, 우리 삶의 현장이 부활을 보여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부활을 말하지만, 삶으로는 다른 이들을 주님 앞에서 낙심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남은 실낱 같은 희망의 끈마저 끊어버린다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는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고 낙심하게 만든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대하셔서 자녀 삼으신 우주적 교회, 그속에서 교회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살아내어야 하는 삶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신 선, 투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투브를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살아내며, 증명하는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꼭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야 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깨어진 심령이 회복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행할 투브입니다. 분열되었던 공동체가 하나되고,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한 치의 거짓없이 순전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오게 만든다면, 그것이 투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살아내어야 할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저와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 가운데서 우리가 진짜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사사로운 나의 입지와 기득권인지 헤아려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주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경험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살아내고, 부활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곳마다 위로와 평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선대하셨음을 기억하여 복음에 빚진 자로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루는 하루를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이 배로 수리아로 가려다가 계획을 바꾼 이유는 무엇입니까? (3)

2.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 인생 계획이 수정되었던 경험이 있으면, 그 과정을 써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보세요.

3. 유두고의 죽음에 대응하는 바울의 자세를 보며, 떠오르는 인물과 사건은 무엇입니까? (10)

4. 이 부활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부활을 살아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작성:이창호A)

사도행전 20장 주석

사도행전 제 20장

=====20:1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

나이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

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두려움 속에서 소요가 그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도망가는 것처럼 생각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요가 그치매’라는 문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나 동기를 진술하고 있다기 보다는 떠나가게 된 시간

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R.C.H. Lenski).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 이것은 바울이 놀라움에 가득차서 갑작스럽게

야간 도주하듯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작별의 의식을 다 갖추고 그들과 진지하게

헤어졌음을 뜻한다. ‘권한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사스'(* )

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권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전도 계획에 의해서 떠나려는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권한다는 말 속에는 기독교 설교의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작별하고'(* , 아스파사메노스)는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

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7절).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

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

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

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

를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후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마게도냐로 향하였다.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 ‘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 )란 말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낱말로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

도를 다 망라(網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

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도 갔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그가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

아르리아 해의 두로하키움(Dyrrhachium)에까지 여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F.F. Bruce).

고린도 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고후 7:6). 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

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困窮)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

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

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이다(롬 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20:3

석달을 있다가 – 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다. 체류 기간은 삼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uce).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

(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

기 위함이었다. 바을이 이처럼 로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차 로마를 복음 전

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5:17-23).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

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

다. 그래서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

하는 자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Pilgerschiff)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8).

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

정을 변경하여 해상보다 훨씬 늦은 육로를 통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였

다. 여기서 ‘공모’의 헬라어 ‘에피불레스'( )는 그의 생명을 노

리는 필사적인 음모를 뜻한다. 그리고 ‘작정하니’의 헬라어 ‘에게네토 그노메스’

(* )는 ‘결단을 내렸다'(He decided)라는 뜻으로서 그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나타낸다(Bruce).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두기고와 드로비모라 – ‘함께 가는’의 헬라어 ‘쉬네

이페토아우토'(* )는 ‘그와 동행했다’는 뜻이지만 여기

서는 바울을 수행(隨行)하는 것을 말한다(E. Haenchen).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

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냈던 것

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손으

로 이 연보를 관할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

도적 결정을 따른 행위로서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행 6:1-6). 그러면 이제 바울과

함께 동행한 각 교회의 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바더 –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

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다고 –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

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세군도 –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

다.

가이오 –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

이다(16:1-3).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

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

기(고후 1:1) 때문이다(R.C.H. Lenski).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

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Ramsay)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

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F.F. Bruce).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활동의 절정기에서 여러 수행인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한다.

=====20:5

그들은 먼저 가서 – 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 드로아로 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合流)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Pulpit).

우리를 기다리더라 – ‘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만 우리 가

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16:10). 따라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한다.

=====20:6

무교절 후에 –

누가와 바울이 뒤에 남아 디아스포라의 관습에 따라 유월절 절기를 조용히 지켰다.

특히 바울은 유월절 양처럼 희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

빌립보에서 무교절 주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F.F. Bruce). 닷새 만에 바울은

1주간이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생각하면서 서둘러 에베소를 향하였다. 그

런데 뜻하지 않게 닷새나 걸리는 오랜 항해를 하였다. 16:11에 보면 전에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배를 타고 이틀밖에 안 걸렸는데 여기서는 닷새가 소요된 사실에 대해서

는, 역풍으로 인해 항해가 순조롭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A.C. Hervey).

=====20:7

안식 후 첫날에 – ‘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 )

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

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

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요 20:19, 26;고전 16:2;계 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

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것은 자연스러

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

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

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히 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떡을 떼려 – ‘클라사이'(* )는 ‘클라오'(* )의 제 1부정과거

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

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 , 아르토스, 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 )에 정관사 ‘톤'(* )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

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

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 )에는 정관사 ‘톤’

(* )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

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

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

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여서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만찬을 나

누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저녁 시간이 아니고 한밤중에 떡을 뗀 것을 생각

해 보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밤중에 떡을 뗀 것은 단지 그것을 맛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고한다(Jonh Calvin). 와 의 주장이 보다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한편

떡을 떼는 횟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에 각 교회는 임의로 그 횟수를 정했으

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 회집(會集)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

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

(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

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

(R.C.H. Lenski).

=====20:8

윗다락에 – ‘휘페로오'(* )는 9절과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

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Tyndale). 그들은 모든 사

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

정 모이기를 힘썼다(Matthew Henry).

등불을 많이 켰는데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등불을

많이 켜서 장소 전체를 환하게 했다(Ernst Haenchen).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Kuinoel).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의 집회에 잡담을 방

지하기 위해서다(Bengle). 단순한 장식적인 효과라고 본다(Olshausen). 누군가

가 떨어지는 것을 즉시 알아보기 위해서다(Meyer). 한 젊은이가 졸았다는 것을 사

람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Alford). 모인 수가 많았기 때

문에 밤중 집회에 알맞게 많은 등불을 설치하였다는 견해(John Calvin). 혹자는 다락

방 자체가 많은 회중이 모일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만일 그 다락방에 많

은 무리가 모여 비좁지 않았다면 유두고(Eutychus)가 구태여 창에 걸터 앉지는 않았으

리라는 논리로 반박을 한다. 사치스럽게 허식적으로 꾸며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

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20:9

창에 걸터 앉았다가 – 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Matthew Henry), 그보다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

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 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Bruce).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

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강론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오

늘의 교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상깊은 귀절이다.

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깊이 졸더니’의 헬라어 ‘카타페로메노스’

(* )는 ‘카타페로'(* )의 현재분사로서 점

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의 헬라어

‘카테네크데이스'(* )는 부정 과거분사로서 계속되는 졸음의 결

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

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Bruce, McGarvey). 또한 많은 등불

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다고 본다(Alford, Bruce).

따라서 앞의 8절에서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술한 것은 유두고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복선(伏線)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Meyer).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혹

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Metthew Henry).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

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

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로써 이미 유두

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

는 점을 제시한다(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

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꼭 죽었겠느냐며 의문

을 제기하기도 하지만(I.B.C.)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

를 ‘죽은 것 같이’라는 뜻의 ‘호세이 네크로스'(* ;막 9:26)가

아니라 ‘네크로스'(* )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Thomas Whitelaw).

=====20:10

내려가서 – ‘에페페센'(* )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

뜻이다.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여기서 ‘안고’를 가리키는 ‘쉼페릴라본’

(* )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

서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J. Calvin).

떠들지 말라 – ‘메 도뤼베이스데'(* )란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 불고하는 회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일찍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

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막 5:38ff.) ‘티 도뤼베이스데'(* ,

‘어찌하여 환화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생명이 저에게 있다 –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무라

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 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

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20:11

오래 동안…이야기하고 –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

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

에서 이 잊을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의 헬라어 ‘호밀레사스'(* )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

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20:12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

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

가 무엇이겠는가 !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정하여 준것이라 –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

는 거리인데 밤새 철야 강론을 한 바울이 일행을 먼저 보내고 왜 혼자서 육로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육로를 도보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예상하는 일

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 바울이 쇠약하여 배 멀미를 하기에 밤

에 배 타는 것이 싫어서 육로를 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바울이 철야 강론을 한 것이

나 본서 27장을 보면 바울이 바다를 기피할 정도로 쇠약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한다. 따

라서 불쑥 돌출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서 긴 항해를 하는 것보다 직선거리인

육로를 통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기 위해서 그길을 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발자국씩 예루살렘으

로 다가서는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E.M. Blaikclock).

=====20:14

바울이…우리를 만나니 – 바울은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승선하였다. 그리고 그 배

는 앗소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레스보스섬의 수도 미둘레네로 향했다. 여기서 ‘만나

니’에 부정과거가 사용되지 않고 미완료 시제 ‘쉬네발렌'(* )이 사

용된 것은 바울과 그 일행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효과를 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Thomas Whitelaw) 여행 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다(E.

Haenchen).

=====20:15

거기서 떠나…밀레도에 이르니라 – 바울을 태운 배는 첫 날 밤에는 미둘레네에서

보냈다. 둘째날 밤에는 가능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 때

문에 항구에 배를 정박(碇泊)시키지 않은 채 이른 아침의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기오

앞에 있었다. 그리고 셋째날에는 사모에 들렀다. 여기서 베자 사본(Codex Bezae)은 그

들이 밤에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트로길리움(Trogyllium)에 체류한 것을 첨가하고 있

다. 그리고 넷째 날 에베소 곁에 있는 밀레도에 도착했다.

=====20:16

바울이…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감이러라 – 바울이 에베소를 그냥 지나가기로

한 이유를 밝힌다. 혹자는 바울이 에베소를 통과한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난

날 에베소에서 겨우 살아난 경험이 있기에(19:23-41)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주

장을 하지만(E. Haenchen) 그것보다는 본문에 밝히 언급된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

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바울은 유

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로 곧장 향할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능하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인들

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연보를 전해 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 연보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

칠 숭고한 메시지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모여

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동안

이방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교회가 서게 되었는가에 관한 선교

(宣敎)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20:17

에베소로 보내어…장로들을 청하니 – 배가 밀레도 항구에 닿자마자 바울은 그곳에

서 직선 거리로 약 50km 떨어진 에베소에 사자를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presbyters) 청하였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 관심과 사랑이 어

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장로들'(* , 프레

스뷔테루스)란 각 교회의 지도자들(leaders)을 가리킨다(14:23). 본 설교에서 ‘감독자

들'(* , 에피스코푸스)이라고도 지칭된 그들은(28절)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으리라 짐작된다(약 5:14;밸전 5:1-4).

기타 장로에 관한 사항은 신 21:1-9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20:18

오매 – 추측컨대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일이 걸렸을 것이다

(Ramsay). 그리고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찾아온 것은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 약 3년에 걸친(31절) 에베소 사역 기간을 가리킨다.

너희도 아는바니 – 원문에는 이 문구가 본절의 처음에 나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되

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이처럼 바울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한 자신의 실생활을 증거삼아 복음으로 살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고전 11:1;

살전 2:1-12).

=====20:19

겸손과 – ‘타페이노프로쉬네스'(* )에 대해 라이트

푸트(Lightfoot)는 이 단어가 굽실굽실하는 굴종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 예속된 자의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의미한다고 한다.

눈물이며 – 31절에서도 눈물이 다시 언급되며 또한 고후 2:4과 빌 3:18에서도 그

의 눈물이 언급되는데 이는 그가 고도의 지성인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을 보여준다. 이 눈물은 주님을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그 아픔에 못이겨 나온 것이며 또한 자기 동족의 회심을 위한 그의 애타는 심

정의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나

님의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장을 위한 눈물이라 하겠다.

유대인의 간계 –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유

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13:45;14:2;17:5) 또한 19:9, 13, 33, 34을

보면 유대인들의 적개심(敵愾心)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장은 에베소에서의 유대인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주를 섬긴 것과 – 여기서 섬긴다는 표현을 ‘둘류온'(* )으로 나타

낸 것은 바울 자신이 주님의 ‘종'(* , 둘로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시제의 사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직 ‘둘로스’로서 주님만을 섬긴 것!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다.

=====20:20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

지런히 목회한 것을 본다. 여기서 ‘공중 앞에서’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

(18:19;19:8)이나 두란노 서원을 뜻하며 ‘각 집에서’란 그들의 필요를 따라 바울이 심

방한 에베소 교인의 집이나 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을 의미한다(18:26). 따라

서 강단에서 왜 선포적인 설교와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피고 권면

(勸勉)하고 가르치는 심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공적인 설교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사적인 방문을 태만히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

양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매맺는가를 살피지 않은 게으른 종이 될 것이다.

꺼림이 없이 – ‘휘페스테일라멘'(* )이란 말은 자신이 전

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추러들거나, 또

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 즉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

요한 모든 것을 삭감이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

나님 앞에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증거의 책임을 다한 자신의 떳떳한 사역을 변호한 말

이다.

=====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 회개와 믿음 ! 이것

은 바울이 증거한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이다. 혹자는 회개는 주로 이방인

들에게 해당된 것이고,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구별하지만(Kuinoel) 전

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다

(2:38;3:19). 사람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 , 메타노이아)가 반

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는 각성과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과 멸망을 알고 하나님의 자

비를 구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

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

세에서 해방시키고 의롭다 하시며 새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 그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 그자체는 개과천선(改

過遷善)에 머무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20:22

심령에 매임을 받아 – ‘심령에’를 가리키는 ‘토 프뉴마티'(* )가

‘심령에'(in the spirit)냐 아니면 ‘성령에'(by the spirit)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

리지만, 문맥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

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표현으로 ‘심령에’라는 해석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

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란 말은 바울의 앞에 일을 고난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으

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령의 지시로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 속에서 느끼는 하나

의 내적인 압박감(壓迫感) 같은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한 것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20:23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

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준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자연스럽다(21:10-14).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

들 곧 문자 그대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

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

실이었다.

=====20:24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

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

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현실 앞에서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

여주고 있다. 즉 결론적으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다.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로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따

라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바우어(Bauer)는 이 구절을

“…을 다하기만 하면(…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겠습니다(또는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바울이 오직 하나의 목적

을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내놓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

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

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다(롬 14:8;빌 1:20,

21).

=====20:25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막 1:4). 왜냐하면 븍음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나님 나라에 관

한 자세한 내용은 막 1:14-20 주제 강해 참조). 따라서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

리해서 구별되게 생각하는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그릇된 신학의 결과이다.

=====20:26

오늘 – ‘엔 테 세메론 헤메라'(* )는 ‘오늘

이라고 하는 이날’ 즉 ‘너희와 작별하는 마지막 이날’을 강조한 것이다.

증거하노니 – ‘마르튀로마이'(* )는 일반적으로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는 뜻이며 본절에서처럼 중간태로 사용되면 주로 ‘엄숙하게 호소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특히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다(갈 5:3).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이

다. 바울은 여기서 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

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

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

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다(겔 33:8, 9). 따라서 바울의 이 선언은 20절의 진술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엄숙한 고백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責務)를 남김없이 수

행했음을 의미한다.

=====20:27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전하였음이라 –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말한다.

=====20:28

너희는 –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

한다.

삼가라 – ‘프로세코'(* )는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

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한다.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 삼가라고 당부한 구체적인 첫번째 이유이다. 자

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 삼가라고 당부한 두번째 이유로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

탁(委託)되었다는 신성성을 상기시킨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한 것이다.

감독자를 – 여기서 감독(* , 에피스코포스)은 17절의 장로

(* , 프레스뷔테로스)와 같은 직무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것

은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감독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으니 이것이

삼갈 것을 당부한 세번째 이유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한 단어가 빠져버린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면서 ‘자기 아들의 피

로’라는 말을 넣어야맞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

하면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인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

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

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표현은 오

히려 예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임을 강조한

것이다(G. Campbell Morgan). 그런데 본 구절이 몇몇 사본과 역본들에는 ‘데우’

(* , ‘하나님의’) 대신에 ‘퀴리우'(* , ‘주의’)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해서 ‘주님의 교회'(* ,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ange, Meyer). 그러나 ‘여클레

시아 투 퀴리우’라는 표현이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여클레시아 투 데

우'(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11번 나타날 뿐 아니라(고전 1:2;고후 1:1;딤전 3:5)

또한 많은 학자들이 시내 사본(* ;Codex Sinaiticus), 바티칸 사본(B ; Codex

Vaticanus) 등에서 후자로 표기되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본문을 그대로 취하는 쪽을 지

지한다(Alford, Bengel, Tertullian). 하지만 이 부분이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난해한

구절임은 사실이다.

치게 하셨느니라 – ‘포이마이네인'(* )은 사역자의 포괄적인

목회 활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는(tending) 것을 뜻한

다. 결국 본절은 교회의 비할 데 없는 고귀함과 그 교회의 양 무리를 맡은 자의 책임

의 중차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20:29

흉악한 이리가…들어와서 –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豫見)

으로서 흉악한 이리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

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 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찍

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신 예수의 가르침(마 7:15)과 연관

된 것으로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시대의 성격을 상기시켜 준다.

=====20:30

너희 중에서도 –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 것이라는 29절과

대조적으로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어그러진 말 – ‘디에스트람메나'(* )는 ‘왜곡하다’, ‘구부

러지다’는 뜻이며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한

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

이 생겨 분열을 획책(劃策)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다.

=====20:31

너희가 일깨어 – ‘그레고레이테'(* )는 ‘깨우다’를 뜻하는 ‘그

레고레오'(* )의 현재 명령법으로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했다(막 13:35). 따라서 이는 배교의 시대의 성격을 예견한 사도가 파수를 보는

데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목회적 용어이다(Bengel).

기억하라 –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고(신 8:2, 18) 그리하여 하나

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신 8:1-6)고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

는 권면이다.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이다.

=====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

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

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

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

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

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

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 )는 ‘넘

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

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

산이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自足)한 삶을 살았다. 이것은 사무엘

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고백한 말과 같다(삼상 12:3,

5).

=====20:34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

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

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

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

은 당연하기 때문이다(고전 9:14). 여기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

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한 특별한 예이다. 따라서 바울 역시 생계비

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다는 것을 밝

힌 것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

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당하여’란 표현은

‘휘페레테산'(* )으로 낮은 자리에서 함께한 자들을 섬겼다는 뜻

으로 본서에만 나오는 단어다(13:36).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

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눅 6: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

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구전을 통해서 알

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

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

론을 삼는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한다. 여기서 ‘약한 사람들’이 어떤 사

람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약한자를 가리킨다

(Meyer, Bengel, Calvin).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킨다(Lenski 등).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Matthew Henry, Pulpit). 와

의 견해가 본문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또한 엡 4: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한다.

=====20:36

무릎을 꿇고…함께 기도하니 –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

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

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낸다

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다(눅

18:10,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짐작

할수 있겠다(엡 1:15-23;빌 1:3-11;골 1:3-12;살전 1:2, 3).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이것은 작별에 대한 유대인의 관례

적인 인사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견디지 못한 즉 감정을 억

제하지 못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

(창 45:14) 아버지 야곱에게(창 46:29)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입을 맞추다’의 헬라어

‘카테필룬'(* )은 미완료 시제로서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

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

것을 뜻한다(눅 15:20).

=====20:38

근심하고 – ‘오뒤노메노이'(* )는 ‘오뒤나오'(* )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

퍼했다’, ‘몹시 괴로워 마음이 아팠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배에까지…전송하니라 –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바올에 대

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

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본서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

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던 누가의 기록이라는 것을 더욱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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