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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8 장 | 요한복음 8장 6059 투표 이 답변

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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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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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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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요한복음 8 ·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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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17/2021

View: 8394

[개역개정] 요한복음 8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요한복음 8장 ;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33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35절 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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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2/16/2022

View: 9275

요한복음 8 KLB – 간음한 여자가 용서받음 – Bible Gateway

간음한 여자가 용서받음 –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다시 성전으로 오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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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7/3/2022

View: 1930

[요한복음 8 – 문제와 해설]

요한복음 8 장. 1. 예수를 고소하려는 사람들이 무슨 건덕지라도 잡을 심산으로 간음한 여자를 잡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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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2/9/2021

View: 4854

2020/07/24(금) “요한복음 8:12-20” / 작성: 정한조

본문 요한복음 8:12-20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예수, 빛이심을 선언하시다(12절)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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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5/8/2021

View: 5798

요한복음 8장 1-11절: 너 자신을 보라! – 사귐의 소리 2022

요한복음 8장 1-11절: 너 자신을 보라! 해설: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은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주무십니다(7: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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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onia2022.com

Date Published: 2/1/2022

View: 9273

요한복음8장

[매일 말씀] 요한복음8장 (John 8) – 자막성경 · 써니가 읽어주는 성경 Sunny’s Bible Reading … [요 8:31] 스스로 계신 자 예수님, 요한복음 8장 31-59절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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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outube.com

Date Published: 2/24/2021

View: 9416

요한복음 8장 주석 – Daum 카페

요한복음 제 8장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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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9/2021

View: 8948

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제목 : 독백으로 살지 말고 대화로 살라본문 : 요한복음 8:1-11팬더믹 기간 중에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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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12/15/2022

View: 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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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8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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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25a3LHyS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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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2020/07/24(금) “요한복음 8:12-20” / 작성: 정한조

본문 요한복음 8:12-20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예수, 빛이심을 선언하시다(12절)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 7장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두 번째 해의 유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유월절에서 6개월 후에 있는 초막절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에는 중요한 행사가 2개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실로암으로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도 순금 항아리를 들고 동행하여, 실로암의 물을 담아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긴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수문(water gate)으로 들어와서,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초막절이 지나면 보리를 파종해야 하는데, 그때 비를 내려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기에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라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치셨습니다.

초막절에 행한 또 하나의 행사는 ‘등놀이’였습니다.

초막절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4개의 금 촛대가 높이 세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렇게 불을 켜면 전기가 없던 당시에 그 주변이 환해져서, 그 불빛 아래에서 여인들이 바느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삶에 빛이 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의 끝날을 ‘큰 구원의 날’로 여겼습니다. 그날도 다 끝나갈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의 양을 치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그 부르심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표현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입니다. 이 표현과 “나는 세상의 빛이다.”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표현하면, “나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입니다.

12절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더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다’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같은 길에 서다’입니다. 당시 이 동사는 3가지의 경우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군인이 자신의 지휘관을 따른 경우와 노예가 주인의 뒤를 따르는 경우 그리고 제자가 스승을 따를 때입니다. 만군의 주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지휘관이시고,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구원의 주인이시며, 그 어떤 스승과도 비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스승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질곡, 죄의 진창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게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열매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습니다. 그 열매를 먹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될 것만 같았고, 하나님과도 견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빛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각광(脚光)을 받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빛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고, 그 결과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죽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에서 단 12명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랐지만, 빛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밤에 나가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따를 때만 어두움은 어두움이 되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올바른 분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시다(13-19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을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 ‘나는 세상의 빛이다.’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이 빛을 얻으리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목수가 무슨 근거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4-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갈릴리 나사렛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자 목수로 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믿은 것이 아니라 안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 일 수가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감을 따라서 예수님을 판단했고, 모든 사람을 다 판단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분명히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닌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있고, 또 분명히 보고 들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중에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틀릴 수 있고,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하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님 주변에는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적자, 비난자, 비판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바르게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므로 친히 주님의 증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신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옳다고 인정해 주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님의 답변 이후에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과 사람들은 “당신의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오?”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중의적입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팔아 당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 마시오.”의 의미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버지(목수 요셉)는 이미 죽지 않았소.”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영적으로 생명의 빛 속을 거닐고 있지 아니하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시다(20절)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약간 의아하게 보이는 단어, 하지만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킴 중에는 철저한 헌금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온전한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뿐만이라,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리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 먹기 위해서 마당에 있는 밭에 심은 채소와 조미료 역할을 하는 식물의 십일조까지 드리려고 했습니다.

당시 성전 중 여인의 뜰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함(넓은 입구에서 내려갈수록 좁은 통로의 함)이 13개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거기에 헌금을 넣을 때, 헌금이 들어가는 소리가 자신의 의를 더욱 굳게 세워준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헌금함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바치는 헌금을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재물이 필요하시기 때문이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이며, 헌금의 종류와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진리와 생명에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도, 단지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만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시며 탄식하곤 하셨습니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드려야 할 본질적이고 올바른 헌금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헌금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보다 더 바른 헌금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헌금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내면, 우리 자신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게 여겨져도, 또 우리가 연약한 아이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길을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 은총 속에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기에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빛이 되시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철저한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만 해도 빛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을 과대포장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헌금과 같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쉴 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매일매일을 밝혀 주시옵소서. 오늘도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조명 아래에서 사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되었거나 주님을 외면하다가 어두움에 빠지게 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2.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또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교정되었습니까?

3. 당신이 주님께 드리고 있는, 또 드리고 싶은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4.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며,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정한조)

요한복음 8장 주석

요한복음 제 8장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

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

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

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

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

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

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

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

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

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

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

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

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

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

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

었는가?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

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

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

님을 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

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

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

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

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

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

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

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

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

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

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

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

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

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

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

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

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

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

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

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

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

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

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

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

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

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

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

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

(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

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8:13,14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

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

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

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

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

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

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

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

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8:17,18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

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

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

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

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

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

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

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

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

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

者)시다(5:38, 14:7, 9; 마 11:27).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

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고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

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

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

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

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

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

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

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

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

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

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

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

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

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

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

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

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

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

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

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

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

(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

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

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

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

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

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

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

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

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

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

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

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

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

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

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

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

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

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

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

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

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

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

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

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

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

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

(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

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

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

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

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

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

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

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

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

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

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

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

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

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

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

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

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

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

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

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

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

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

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

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

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

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

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

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

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

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

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

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

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

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

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

(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

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

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

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

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

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

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

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

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

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

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

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

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

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

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그렇

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 창고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

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말하기

를, “나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

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

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

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

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

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

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8:38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

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

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

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8:39,40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

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

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8:41,42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

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

어 죽이려고 하였다.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

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

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

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

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

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

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

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8:47,48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

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

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8:49-51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

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

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

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8:52,53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

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

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8:54-57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

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

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

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

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

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

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

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

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

다(C.K.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

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

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

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

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여기 “오십도 못 되었

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

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

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 )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

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

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

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

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

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 )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

(* )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 )의 독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

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

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

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

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 )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

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

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

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

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

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

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

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

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제목 : 독백으로 살지 말고 대화로 살라

본문 : 요한복음 8:1-11

팬더믹 기간 중에 온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처음엔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가 생겨 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 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생각들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이 다릅니다. 자연히 갈등이 생기고 다툼의 소지는 여전합니다. 서로 조심한다고 하지만 깨지는 소리가 요란 하기만 합니다. 갈등과 다툼의 발단은 바로 말 한마디가 문제의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사실 대화의 첫 걸음은 굉장히 중요 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는 첫 마디는 대화가 물 흘러 가듯이 잘 진행되게 합니다. 하지만 배려나 이해하는 마음이 없이 무턱대고 화를 내고 신경질적인 첫마디는 혼자 떠드는 격이 될 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조롱받는 죄인들도 많았습니다. 만약 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목격 되면 똑같이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는 이들은 이웃과 말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화의 대상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저 함부로 뿜어대는 독백에 무시 당하고 살뿐이다. 세상은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 조차 아주 싫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바라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상대방을 향한 대화의 첫걸음은 굉장히 온유 합니다. 예수님은 죄는 미워 하시지만 죄인을 향해서는 긍휼로 품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간음하다 들킨 여인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질질 끌려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적발해서 붙잡아 왔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진정한 숄루션을 얻기 위해 질문한 게 아니다. 한 여인을 미끼로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악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악한 심중을 아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합니다.

그랬더니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슬그머니 하나씩 쏜살같이 사라집니다.

저런 인간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웅성 거리며 떠들석했던 순간은 지나 갑니다. 어느새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

예수께서 여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를 고발하려고 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여인이 대답을 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분명하게 집고 넘어 갑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향한 용서의 마음은 풍성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대화를 보면서 몇 가지 교훈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대화의 첫 걸음이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말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꺼 번에 몰려와서 한 여인을 난도질을 합니다. 여럿이 몰려와서 한 사람에 대해서 온갖 비난과 정죄를 쏟아 붓는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왔을 당시에 이 여성에게 몸을 씻거나 몸을 가릴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여인을 앞에 세워 두고 온갖 모욕을 줍니다. 예수님에게 그녀의 수치를 드러내게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고발할 건덕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한 여인의 수치와 모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위배가 되는 큰 죄를 범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현장 한 복판에 버젓이 세워두고 독백만 할 뿐이다. 독백이라면 상대방을 앞에 세워 두고 혼자 지껄이는 말투 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인을 앞에 세워 둔 채.. 예수께 질문 합니다.

이런 자는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돌려 쳐 죽어야 한다. 공식대로 산다. 여기엔 은혜는 없다. 공식대로 간음한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지배적이다. 이들에게서 긍휼의 냄세는 전무 하다. 그저 잔인할 뿐이다.

여인을 향해 마구 쏟아 붓는 말들을 모습을 보면서 욥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욥이 까닭없이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때에 친구들이 우르르 찾아와 무슨 말을 하나요.. 하나님은 욥에게 까닭없는 고난을 주셨건만.. 친구들은 너가 죄를 범해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친구들이 얼마나 욥의 가슴을 후벼 팠으면 욥이 뭐라고 말하나요..욥 19:2에 “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욥은 친구들을 향해 짓부수기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얼마나 후벼 팠으면 이런 말을 할까? 계속해서 욥은 말합니다. 욥 19:22에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욥이 친구들에게 한 말이 뭔가요? 제발 하나님 노릇좀 하지 말라.

예를 들어 친구 셋 이 와서 누가 심한 말을 하면, 상식적으로 좀 말리거나 해야 하는데 같이 덩달아 욥에게 칼로 상처난 곳을 후벼 파내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도 보세요.우리도 하나님 노릇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좀 잘못이라도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온갖 말들로 더 힘들게 합니다 . 박살을 냅니다. 비단 한 아이가 잘못이라도 하면 부모는 한 가지 대답만 듣고 싶어 온갖 부질없는 말을 쏟아 붓습니다. 그 한 가지 답변을 얻기 위해 “왜 그랬어” 윽박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대화로 어떻게 되었는지 자초지종 물어 볼 인내는 없다. 그저 온갖 욕설과 비난의 말을 쏟아 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합니다. 그럴수록 당사자는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다.

오늘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과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들었던 돌을 내려 놓을 수 있겠는가?

먼저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과 대화에서 보여준 ABC 를 보라.

우선 간음한 여인을 멀리하지 않는다. 결코 간음한 여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간음한 여인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은 향해서 비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죄인을 비난하러 오시지 않으시고 죄인 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다. 마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니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용서하시면서 새로운 가르침을 부여해 주십니다 .요 8:11에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대화의 abc는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침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익숙한 말투의 습관을 보라. 상대방을 향한 대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있나요? 나는 대화로 시작한다고 하지만 내 안에 바리새인적인 생각이 가득차 있지는 않는지! 어느새 내 자신은 상대방을 더 코너로 몰아 붙이는 독백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독백의 말들을 한번 나열해 보자.

“너 이리와 바”.. 벌써부터 우리의 시작은 강압적이다.

어느 누구에나 “야 임마 넌 맨날 그 모양 그 꼴이냐”.. “내가 그럴줄 알았지”.. “넌 잘하는 게 뭐야” 상대방을 향해 인격적으로 모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 상대방을 버젓이 세워 놓고 독백만 한다.

그렇게 당당했던 바리새인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당당했던 자들이 어른 들로부터 얼른 그 자리를 피합니다. 어른들.. 오랫동안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어른들이 쏜살같이 사라져 버린다.그 순간 자신이 돌을 들고 있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거린다. 겉은 노련미 넘치게 보이지만 자신들이 들고 있었던 돌을 순간 남몰래 감추거나 누가 볼까봐 서둘러 버린다.

여기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양심이 워킹한다. 말씀이 내 안에 없을때는 양심이고 뭐고 없다. 그저 자기 욕망과 탐욕에 허덕일뿐이다.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양심이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왜 이들은 그렇게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도망쳐 버렸을까?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토대로 해서 답을 얻어 보자.

표리 부동한 사람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정죄하는 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 지칭하는 용어 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며 삽니다. 소위 내로남불 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좋게 해석 합니다 .하지만 남을 향해서는 너무나 날카로운 칼을 들이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와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일에 다 참견하고 남을 정죄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무시 하며 깔보는 사람, 늘 부정적인 말, 비아냥 거리는 말, 남의 의견을 짓밟아 버리기를 밥먹듯이 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실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너무 의로운 척 했습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의를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평가 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얼마나 챙피했을까요? 스스로 의로운척 하고 말로 자신의 존재감은 드러내려고 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독사의 자식들아 ..

둘째, 아무리 돌에 맞아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자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말문을 열라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다독인다. 질타로 시작하지 않는다. 다독이는 이유는 하나다. 넌 내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죄 짓고 산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합니다.

이 말 한마디는 닫혀 있던 여인의 마음을 열게 하는 신호탄이 됩니다 .대화는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독백하며 간음한 여인을 무턱대고 정죄합니다. 그럴수록 마음의 빗장을 더더욱 단단하게 채울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뭐라고 말씀 하시나요?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 대화는 분노와 억울함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나는 정죄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데 주님은 정죄하지 않고 돌을 내려 놓으라고 합니다 .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들이 예수님과 때론 부닥칩니다. 예수님을 향해 왜 저런 인간을 가만히 나 두시는지 의아해 한다.

나는 너무 성급한 말투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무턱대고 야단과 질타 보다는 다독이면서 대화의 첫걸음을 열면 어떨까? 소리 친다고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게 아니다. 난리 친다고 배우자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난리치고 화를 낸다고 대화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화병만 쌓여갈 뿐이다.

고개를 숙였던 여인.. 그런데 이제는 얼굴을 든다 그리고 예수님께 주여 라고 답을 한다.

우리는 한 가지 틀에 너무 매여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공의와 법으로만 처리하지 않으신다. 사랑과 은혜로 대하신다. 빌 4;5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인은 입을 연다.

여인이 생각하는 예수님.여인은 이 분은 날 존중해 주는 구나..나 같은 쓰레기같은 인간조차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구나..하는 느낌을 받으니까 마음의 문을 활짝엽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태도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을까요?죄인들이 예수님께 이끌렸다는 점입니다 .죄는 미워 하지만 죄인을 향한 끌어 안음입니다. 그들의 죄가 사람들의 눈에는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심각한 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엄청난 죄를 용서 하십니다 .

주님은 죄인들에게 다가 갑니다. 무턱대고 야단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아픈 심정, 그들이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죄인들의 마음을 열수 있었을까? 아무리 내가 죄인들의 친구로 왔다고 말을 하지만 쉽게 통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죄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비결은 먼저 이해다.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이해가 앞설 때에 상대방의 닫혀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린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했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이 너무 강하다. 틀에 박힌 고정관념들,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이해심이 너무 낮다.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상대방만 나무란다. 그러다 보면 독백만 할 뿐, 대화는 없다.

독백은 자기 앞에 인격적으로 대해야 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얘기만 계속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상대방이 왜 이렇게 했는지 에 대해 들으려는 태도는 안중에 없다 . 내 생각에 어긋난 것, 내 뜻대로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분풀이만 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런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없다.

관계 속에서 일방 통행만 주장하는 독백에 머문다면 관계는 더욱더 악화될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만 쌓여갈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더 곪게 할 뿐입니다 .

예수님을 통해서 보자.

우리는 이런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 보자

외형적인 것만 보다 보면 더 중요한 내면을 무시하기 쉽다. 죄에 눈이 멀면 죄인을 함부로 대하기가 쉽다. 스스로 의로운 척 하면 공의만 강조할 뿐 은혜의 깊은 맛을 맛보기 어렵다. 좀더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 지자. 난 공의만 알았지 은혜는 몰랐음을 인정해 보라.

죄만 보았지 죄인을 향한 이해나 배려가 턱 없이 부족했음을 인정해 보라.

무턱대고 소리 친다고 소리 지른다고 상대방이 입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입을 닫을 뿐이다. 마음의 문은 더 깊게 닫을 뿐이다.

마지막, 독백으로 살지 말고 대화로 관계를 만들어 가라

독백은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하지만 대화는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합니다.

자신의 대화 습관은 어떠했나.. 어느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버럭남 버력녀..라고 씁쓸한 별명이 붙여지지는 않았는지요..조금만 참고 먼저 들어 주면 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먼저 화부터 낸다. 남들은 이미 귀를 닫고 마음을 닫고 있다. 혼자 독백하며 온갖 주워 담지 못할 말들을 마구 쏟아 부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누구나 죄가 죄인보다 앞서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툭하면 자기 의를 내세우면서 돌부터 먼저 든다. 돌을 든 채 남을 비판 평가해 버린다.

예수님처럼 대화를 시작해요.

수치와 모멸감에 지쳐 있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없었던 여인이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 앞에 여인은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은 너무나 짠 합니다 .

여인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뭘 느꼈을까요?이 사람이 날 존중해 주는 구나 .

예수님은 죄는 미워 하십니다. 하지만 죄인을 향한 마음은 너무나 부드럽기만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모든 게 바꿔 질 수는 없다. 여인은 죄사함받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과감하게 불편함을 받아 들인다.

예수님의 대화는 결코 독백이 아니라 대화였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경고 하지 않으신다. 혼자 일인 다역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처럼 온유하셨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묵과 하시지 않으셨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격려로 그녀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세상의 떡으로 기준 삼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시선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지금 살아야 한다.

요즘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메타는 초월이란 뜻이고, 버스는 세계(유니버설)란 의미로 즉 초월 세계라는 의미다. 메타 버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순간성이다. 순간을 놓치면 지금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잃어버리기 쉽다. 순간성을 맛보는 맛.. 세상의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그 순간에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맛..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맛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 순간에 얻는 기쁨, 예수의 삶을 맛보는 참 맛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때다.

이것이 오늘 대화는 끊어 지고 독백으로 사는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다.

지금 나의 삶의 처지가 어떠한가?

주님은 한 여인을 버젓이 세워 놓고 독백하는 바리새인들은 향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주님은 오늘도 부단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내면의 바리새인/서기관을 자각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 이중적이고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독백에 머물 뿐이지 진정한 대화를 만들어 갈 수는 없다.

누군가의 대화에서 내 말을 줄여야 할때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올바른 말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 영감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 모습 속에서 간음하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다면 이들을 향해 주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앞에 새로운 삶의 첫걸음을 내딛자.

너무나 익숙한 독백을 멀리하고 대화를 시작하라.

엡 4:29을 보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람을 앞에두고 혼자 화내고 열내고 분노하고 열받아 했던 모습들..독백의 돌을 내려 놓으라

독백은 상대방을 향해 더러운 말만 무성하게 할 겁니다. 더러운 말로 인해 상대방을 더 수치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더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대화는 덕을 세우는 말을 할 것입니다. 경청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해로 인한 끄덕임과 안전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독백으로 살지 않으시고 대화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깐부로 사셨다.

예수님의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대화로 친구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깐부다.

오늘 우리도 내 안에 독백은 사라지고 대화로 어떤 사람일지라도 품고 안을 수 있는 깐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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